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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화 여사가 말하는 이창호의 내제자시절 ③ 아내와 작은엄마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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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제자 7년 동안 딱 두 마디만 말하던 아이 ‘제비’라는 별명 하나로 일관하다 응씨배 우승 ‘바둑황제’로 불린 스승과 달리 창호의 별명은 많았다. 기사의 바둑 두는 스타일, 즉 기풍(棋風)은 여러가지 있다고 한다. 가령 돌다리 앞에서 아무 의심 없이 훌쩍 건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파가 있게 마련인데, 창호는 어느 쪽도 아닌,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돌아가는 지독하게 조심스런 기풍이어서 어려서부터 ‘애늙은이’ ‘강태공’이란 별호를 들었다. 그러나 바둑판 밖에서 같이 생활한 내 시각에서 보건대 신중하거나 기다리는 데 도가 튼 쪽의 이미지를 살린 별명보다는 부동심(不動心)을 표현한 ‘돌부처’라는 별명이 더 맞는 것 같다. 굳이 나더러 별명 하나를 지어보란다면 창호의 과묵한 성격에 더 비중을 두어 ‘두꺼비’라 부르고 싶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내제자로 데리고 있던 7년 동안 내가 창호로부터 들은 소리라곤 이 딱 두 마디가 다였던 것 같다. 그러니 나도 자연, 딱 한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 “밥 먹어라.” 분가한 지금도 어쩌다 밖에서 만나면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할 뿐, 도무지 “안녕하시냐?” “민제는 공부 잘하느냐?”라든가 아니면 “할머니는 건강하시냐?”고 말하는 법이 없다. 오죽했으면 우리 식구들이 ‘까딱이’라고 다 불렀을까. 하긴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창호만큼 반상에서나 반외에서나 금을 캐는 아이는 드물 것이다.  ▲ 이창호가 내제자시절 함께 살았던 서울 연희동 조훈현 9단 자택 앞에서 1987년 1월에 찍은 조9단 가족사진. [사진제공/월간바둑]
조훈현의 수업방식 창호의 내제자 수업방식은 2~3일에 한번씩 그이가 복기를 해주는 식이었다. 낮에 한국기원 연구생들과 둔 바둑을 늘어놓게 한 후 문제가 되는 부분마다 지적해주곤 했다. 직접 두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밥 한그릇을 놓고 스승이 일일이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떠먹을 수 있도록 방향과 방법만 개괄적으로 제시하는 식이었다. 남편의 지도관은 이랬다. 어차피 될 성 부른 나무는 미주알고주알 가르쳐 주지 않아도 떡잎 때부터 제 스스로 찾아내는 법, 그럴 능력이 없다면 어차피 크게 될 그릇이 아니라고 보았다. 선생이란 이 길이다 저 길이다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끔 감시, 감독하는 역할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주에 있는 창호의 할아버지(이화춘 옹, 86년 작고)와 아버지(이재룡 씨)에게는 이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한때이기는 했으나, 전주 창호네 집에선 내제자 수업을 마치 과외공부하듯 하는 걸로 생각하여 아이에게 날마다 전화를 걸어 “어제는 무엇을 배웠느냐, 선생이 바둑은 자주 두어주시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바둑문화라는 것이 채 정착되지 않은 때다보니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창호를 내제자로 받은 것부터가 우리 바둑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더욱이 창호네 어른들은 바둑을 잘 모르는 분들이었다. 그러니 일본의 내제자 수업방식을 이해할 리 없었다. 졸지에 과외선생 취급을 받아버린 그이는 섭섭하기도 했으련만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이 씨익 웃더니 자신의 재일시절 내제자 수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조훈현이 일본 내제자시절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배우던 14세 때 세고에 9단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은 어린 조훈현이 '마마짱'이라 부른 세고에 9단의 며느리다. 스승 세고에는 바둑을 직접 두어주기보다는 기사로서, 승부사로서의 정신적인 가르침을 중시했다.
 ▲ 영화 <승부>에서 스승 조훈현 9단은 제자에게 좀 엄한 선생으로 나온다. 영화의 극적 재미를 위해 어떨 때는 다소 찌질한(?) 면까지 보이게 감독이 연출했는데, 천하의 승부사 조훈현을 이같이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로 다가서게 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한 듯하다. 실제와 정반대로 잡은 이창호의 어릴 적 성격 또한 웃음 포인트를 위한 극적 장치로 보인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처음 접한 조훈현 9단은 이 대목에 이렇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제가 스승님에게 배운 게 있어요. 그걸 그대로 이창호에게 물려준 건데. 스승은 가르치는 게 아니고, 그냥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길로 가게끔. 영화를 보니까 막 이제 야단도 치고 하는데, 그건 영화니까 그렇고 실제로는 아니거든요. 저는 그게 아니고. 이창호가 알아서 저렇게 컸고 알아서 잘한 거지, 제가 저렇게 잘 가르친 건 아닙니다." [사진제공/ (주)바이포엠스튜디오] 기술보다는 정신적인 가르침을 중시한 스승 세고에(瀨越憲作) 선생 집에서 거주한 10년 동안 선생이 두어준 바둑은 불과 서너 판. 그것도 끝까지 둔 적은 한판도 없었다. 두다가 “여기까지!” 하시면 그 걸로 그만이었다. 오히려 바둑의 기술적인 것은 바깥에서 후지사와(藤澤秀行) 선생과의 실전에서 훨씬 많이 배우고 익혔다. 세고에 선생이 정신적인 스승이라면 후지사와 선생은 바둑적인 스승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그이는 창호에게 두 스승의 지도방침을 합성해 교육했는데, 세고에 선생의 정신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두었던 듯하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 한창 어리광을 부리고 골목에서 친구들과 뛰어놀 만 아홉 살의 어린애를 남의 손에 맡겨 놓고 편히 잠이 올 부모는 없다. 창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번갈아가며 줄곧 우리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사흘간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뒤이어 사흘은 아버지가 창호와 기거하며 이것저것 돌봤다. 자식을 맡겼으면 딱 발걸음을 끊었으면 하는 마음 없지 않았으나 오는 사람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떤 면에선 어린 창호를 양육하는 데 더 낫지 않겠나 싶었다. 창호의 식성은 까다롭지 않아 한시름 덜었는데 오히려 아버지의 입이 더 까다로운 편이어서 식탁에 더 신경 썼던 기억이 난다. 맏아들 민제도 창호형을 잘 따랐다. 처음엔 아빠가 창호형 바둑공부에만 신경 써 자기와 잘 놀아주지 않는다며 시샘하고 울기도 했으나 차차 형과 어울려 장난치며 놀았다. 워낙 천성이 순하고 착한지라 창호는 민제의 개구쟁이 짓을 다 받아주는 것이었다. 나는 창호의 바둑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민제가 형 방에 들어가는 걸 가급적 말리고는 했다.  ▲ 대회장에 마련된 검토실에서 어린 아들의 대국을 모니터로 지켜보고 있는 아버지 이재룡 씨. 하루종일 대회장을 서성이며 초조한 마음으로 아들의 승리를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을 터이다. 지칠 대로 지치면 이처럼 쪼그려앉아서라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 할아버지 이화춘 옹이 별세한 뒤로 어린 이창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돌본 사람은 아버지 이재룡 씨였다. 지방대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기원 대국장 주위엔 늘 아버지가 상주하며 종일 어린 아들을 지켜봤다.
대우(大愚)가 곧 대현(大賢) 대우(大愚)는 대현(大賢)과 같다는 이 말이야말로 창호에게 딱 떨어지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재형이란 보통 콜라처럼 탁 쏘는 맛이 있고 뭉툭하기보다는 날카로운 스타일을 떠올리게 되는데, 창호를 이런 쪽으로 대입해서는 결코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천재는 샤프하고 스마트하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창호를 보다간 딱 ‘고문관’이란 인상을 받기 십상이기에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바둑계에서 수재, 천재 소리를 들었던 기사들치고 샤프하고 정돈된 느낌을 풍기지 않은 이 어디 있었는가. 이런 인식에 젖어 있던 우리에게 다가온 이창호의 우둔함은 전혀 상상치 못했던 또다른 당혹감이었다. 하긴 반들반들한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보다는 물먹은 나무방망이로 친 홈런이 더 묵직한 법. 창호는 천재의 정반대 유형을 제시한 셈이다.내제자로 받고 1~2년간은 손수 목욕을 시켰다. 머리를 혼자 못 감는 것은 물론 세수조차 제손으로 제대로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긴 하지만 그 나이면 누구나 세면 정도는 할 줄 아는 게 정상인데, 아마도 창호는 본가에서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듯했다. 운동화 끈이 한번 풀어지면 며칠이고 풀린 채로 지렁이 매달고 다니듯 신고 다녔다. 그래서 아예 찍찍이 신발을 사 신켰다. 원체 무감각, 무신경한 아이였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열정만큼은 집요하고도 집요해 고래심줄보다 끈질겼다. 성인이 된 지금도 창호의 이런 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자나 술을 알만한 나이에 여전히 바둑 외적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바둑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참말 대단한 절제력이다. 아니 절제력이기보다는 타고난 천성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천성을 타고났다는 자체가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잣대로 재자면 창호는 분명 둔한 아이였다.  ▲ 케이블방송 tvN에서 방영해 국민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던 '응답하라 1988' 15화를 보면 운동화 끈이 풀어졌는 데도 이를 모른 채 신고 다니는 창호(박보검 연기)의 모습이 나온다. 사진은 이 모습을 보고 친구(류준렬 연기)가 제대로 끈을 매주는 장면이다.
이창호의 ‘똑딱군화’ 탄생 이야기를 만화와 함께 보시려면 아래 링크 글 클릭! 불을 켜고 문까지 열어놓고 잤던 아이 어린 나이에 난생 처음 부모의 품을 떠나와서인지 한동안 창호는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연희동에 살 때 우리는 창호와 같이 2층을 썼는데 창호는 제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전주에 가고 없는 날이면 무서워 잠을 잘 못 이루곤 했다. 항상 불을 환히 켜놓고 문을 열어놓았다. 그래야만 잠을 청할 수 있는 모습을 보며 조치훈 9단의 유년시절 얘기가 떠올랐다. 조치훈 9단은 일본 기타니도장 수업시절 굉장한 개구쟁이였다. 하도 한국에서 온 꼬마녀석이 말썽을 부리자 일본 내제자들이 하루는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이지메를 가했던 모양이다. 이때의 공포가 뇌수에 박혀 조9단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혼자서는 불을 끄고 잠을 청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창호가 프로기사 초기에 국제대회에 나가 그다지 성적을 내지 못한 까닭도 이에 있지 않았나 싶다. 성인이 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창호는 지방도전기나 해외대국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일본에서 개최하는 대회에 출전하려면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널 수밖에 없다. ‘물 징크스’란 말은, 국내에서는 펄펄 날다가도 비행기 타고 바다만 건넜다 하면 제 기량의 50%도 발휘 못했기에 나온 말이다. 다들 나이가 어려 그렇겠거니 여겼지만, 내가 보기엔 어릴 적부터 그림자 같았던 아버지가 일일이 외국까지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생긴 마음의 동요 탓인 듯했다. 창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번갈아가며 상경해 단거리 주자가 바통터치 하듯 창호를 돌본 것이 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과보호 때문에 생긴 정서불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유년의 창호는 누군가 곁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안되었고, 특별히 귀여운 짓도 않았지만 특별히 미운 짓도 할 줄 몰랐던 창호를 시부모님들은 친손자 같이 예뻐하고 쓰다듬어 주셨다. 연희동 우리집에서 이화여대 부속 초등학교까지는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였다. 처음엔 낯설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이 엎어지면 코 닿을 코스를 창호는 가끔씩 지나쳐 헤매기 일쑤였다. 그것은 바둑판 밖의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문제랄 것도 없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전주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창호가 자기가 둔 그날 낮의 바둑을 제대로 복기 못할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대목에 직면해서는 선생(조훈현 9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애가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 것만은 자명한데, 이거 내가 잘못 봤나…?”  ▲ 제자의 예선대국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스승 조훈현 9단. 맞은편 상대는 정대상 현 9단이다.
복기를 제대로 못하던 천재 아직도 그이는 창호가 복기를 제대로 못했던 것을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하긴 창호와 절친한 김성룡 9단의 얘기를 들어보면 세계 넘버원이 된 뒤에도 헤맬 때가 있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창호가 복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었다. 창호가 내제자로 들어오던 84년은 연구생 1급에서부터 10급까지 등급별로 낙타가 바늘 꿰는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구생의 실력은 프로 뺨치는 수준이다. 연구생 상위 클래스의 실력은 정상급 프로와 반반 승부를 다툴 만큼 세다. 아마추어에게도 오픈된 세계대회 통합예선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연구생은 바둑계의 육군사관학교로 불린다. 프로로 가는 엘리트 코스로서 이미 백성호, 서능욱 9단이 수학하던 70년대 초부터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내실을 기하지 못하다가 창호가 원생으로 등록하던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으니 창호는 바둑육사생도 1기라고 할 수 있다. 84년 9월, 창호가 연구생으로 등록할 때 판정받은 급수는 연구생 5급. 한해 전 해태배 결승에서 창호를 꺾고 우승한 류시훈은 6급이었고 정현산이 4급이었다. 그 무렵은 김영환이 최강으로 3급이었다. 이들은 모두 프로가 되어 이후 이름을 날렸다. 그해 2월 어깨동무배에서 우승한 창호가 5급 판정을 받았으니 당시 연구생 5급은 아마추어 5단격은 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기력을 가진 창호가 낮에 둔 바둑을 선생 앞에서 제대로 복기를 못했으니 그이는 기가 막힐 수밖에. 일본기원 연구생시절 그이는 프로의 바둑을 세 판이나 동시에 기록하기도 했다. 기보용지에 직접 기록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바둑 한판 따라가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를 알 것이다. 웬만한 기력과 기억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마지막 수까지 적어내기가 어렵다. 불행하게도 중간에 큰 패싸움이라도 나 흑백 수순이 왔다갔다 하거나 속사포들을 만나 속기로 두어지기라도 하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그런 바둑을 한판도 아니고 세 판씩이나 동시에 감당해낸 선생(조훈현)이고 보면 불과 며칠 전, 몇 시간 전에 둔 자기 바둑을 되새김질 하는 정도야 식은 죽먹기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한데 복기를 제대로 못해내는 제자를 봤으니…. “내가 공부하던 때는 몇 년 전에 둔 바둑도 복기해냈는데…. 그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구먼. 기재(棋才)가 보통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가끔 복기를 제대로 못하는 걸 보면 그게 또 아닌 것 같고….” 그이는 전영선 사범과 가끔 고민스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결론은 항시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겉으로 번쩍이는 것은 실제 큰 재주는 아닐지도 몰라. 누구나 알아보는 재주는 큰 재주일 리 없거든.” 하지만 우려와 달리 창호의 바둑 느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연구생 입문 1년 반 만인 85년 말 연구생 중 가장 먼저 1급으로 승급했고 다음해 8월 연구생 입단대회에서 김원( 7단, 2019년 사직)과 나란히 입단의 관문을 뚫었다. 당시 11세, 내제자로 입문한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바둑판 밖에서는 그토록 어눌하고 느려터진 창호였건만 막상 입단하고 나니 “선생 앞으로 일직선 전진!” 양상을 보였다. 입단 햇병아리인 3단시절 선생의 최대 라이벌인 서봉수 9단을 무려 여섯 번이나 내리 녹다운시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더니 한달음에 선생 면전에까지 칼을 쓰윽 들이밀었다.  ▲ 스승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런 게 승부세계 아니냐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색하고 난감한 나머지 그저 웃어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짓는 웃음이다. 제자는 두 눈을 아래로 깐 채 시종 묵묵 모드. 하긴 무슨 표정을, 말을 할 수 있으리.
1988년 12월 23일 저녁, 부산 광안리 시사이드호텔에서 가진 제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1국 전야제의 풍경은 이랬다. 너무도 빨리 커버린 제자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그리고 전무후무할 사제간의 첫 도전기로 기록될 제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1국이 치러진 날은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연말 분위기가 감도는 그 성스러운 날 1988년 12월 24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세상 가장 곤혹스런 대결을 펼쳐야 했다. 성탄절 이브에 호텔(대국장) 밖에선 징글벨 가락이 넘쳐났지만 사제는 ‘징그러웠을(?) 것이다. 서먹서먹함을 넘어 난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제간의 첫 대국은 고작 80수 만에 제자(창호)가 돌을 거둠(불계)으로써 단명국으로 끝났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최고위전 도전기를 벌이는 와중에 창호는 또다시 제24기 패왕전 도전자로 나서 선생과 동시다발로 도전기를 치렀다. 어린 창호가 한 기전에서 도전자가 된 것만으로도 ‘바둑계가 혼절할 일(당시 바둑잡지의 표현)’인데 양 기전에서 도전자로 나서다니…. 창호의 쿠데타는 3:1(최고위전), 3:0(패왕전)으로 진압되긴 했으나 아무리 후하게 잡아주어도 5년 이상 빨리 다가온 제자의 도전에 그이는 적잖이 당혹스러워했다. 게다가 선생과 두 개의 도전기를 마친 89년 여름(8월), 입단 3년차에 불과한 창호가 제18기 KBS바둑왕전에서 김수장 7단(당시)을 물리치고 첫 타이틀을 획득했다. 14세, 세계바둑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이었다. 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이의 반응은 “악!” 하는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창호는 제29기 최고위전에서 다시 도전자로 노크하고 나섰고,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놀랍게도 3:2로 선생을 꺾으며 보은(報恩)을 한다. 최고위전은 그이가 귀국해 우승한 첫 타이틀이었다. (조훈현 9단은 74년 1월 20일 운당여관에서 열린 14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에서 당시 일인자인 김인을 상대해 3대 0 승리를 거두며 첫 타이틀을 땄다. 조훈현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창호가 선생으로부터 양위 받은 첫 타이틀도 하필이면 선생의 생애 첫 타이틀이었던 바로 그 기전이었으니 무서운 업(業)이요 인연의 끈이랄밖에. 당말의 시인 조송(曹松)의 시에는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란 시구가 있다. - 한 장수의 공을 이루는데 만인의 뼈가 마른다.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이 말을 이제는 세계 넘버원이 된 창호에게 해주고 싶다. <이 글은 1997년 [월간 바둑가이드]에 연재한 ‘승부사의 아내-정미화 편’에서 가져와 재구성해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 끝!>  ▲ "나 혼자만으로는 힘들어..." 바둑의 세계화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바둑 일인자였던 조훈현 9단은 이렇게 말하며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여 키웠다. 역시나, 1988년 국제대회인 후지쯔배, 응씨배가 연속 탄생하면서 바둑계는 단숨에 국경의 의미를 희석시켰고, '원투 펀치' 조훈현-이창호 사제를 앞세운 한국은 90년대~2000년대 초까지 무려 세계대회 23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스승이 앞에서 끌고 제자가 뒤를 받친 한국바둑은 무적이었다.
사진은 1996년 2월 제4회 진로배 시상식(상하이)에서 김인 단장(가운데)과 함께 황금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이창호, 조훈현 사제. 제자 이창호를 키운 건 조훈현 9단이 세운 무수한 기록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이 아닐까.  ▲ 1989년 10월 19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바둑 세계제패 기념축하연을 열었다. 김우중 한국기원 총재가 응씨배를 제패한 조훈현 9단과 부인 정미화 씨에게 우승을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장면. 이때는 남편을 잘 내조해 바둑황제에 오르게 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테지만 정작 정미화 씨의 최대 공로는 내제자 이창호를 받아들여 키운 공이다. '바둑황후' 소리를 듣고도 남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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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과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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