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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 바둑과 경영 (1)
<제1강>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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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고, 이 가운데 월간『바둑』의 요청으로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바둑과 경영’이란 큰 카테고리로 묶은 글이기는 하나 내용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이창호 같은 세계적인 기사들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와 바둑동네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바둑 속에 들어 있는 경영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나름 읽는 맛이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내용일지언정 이 연재를 통해 바둑사를 반추하면서 긴 설연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10편을 골라 명절연휴 기간 연재합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사이버오로 임직원 일동 배례(拜禮).  바둑은 가장 경제적이고 경영적인 게임이다 수를 읽고 착수를 결정하는 행위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바둑은 ‘의사결정의 연속 게임’이고 이것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미래예측’과 다를바 없지요. 바둑에서 승부를 가름하는 요소는 많습니다만 이 중 수를 읽어내는 능력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둑의 요체는 수읽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둑은 너 한수, 나 한수 교차로 두는 게임이므로 일방통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착점 의도를 다방면으로 간파하고 내 작전을 관철시킬 최선의 수를 찾아야 합니다. 한 수 둘 때마다 9수씩 수를 읽는 사람과 10수씩 읽는 사람, 어느 쪽이 승전고를 울릴지는 자명합니다. 바둑은 수읽기의 연속이고 경영 또한 의사결정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무척 닮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질문을 합니다. “바둑이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서봉수 九단은 이렇게 대답했다죠. “바둑이란 나무 판때기에 바둑돌을 놓는 것이다.” 궤변 같지만 가만 보면 쾌도난마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바둑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바둑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대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둑이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율을 내려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경제적이고 경영적인 게임이다.” 바둑은 집이 많은 쪽이 이깁니다. 대마를 잡았다고 이기는 게 아닙니다. 집, 즉 영토를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의 싸움인 거죠.  ▲ <참고도>
<참고도>를 한번 보시죠. 바둑판 중앙에 한 집을 확보하려면 이처럼 4개의 돌로 에워싸야 하지만 변에서는 3개면 되고, 귀퉁이에서는 2개면 가능합니다. 어떻습니까? 같은 조건이라면 한 집을 얻기 위해 누구나 당연히 2개를 투자하는 쪽을 택하겠죠. 이처럼 돌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놓인 돌들의 효율을 유기적으로 살려야 이길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술과 전략이 필요하고, 집중과 선택이 필요한 거지요. 여기에 싸우는 상대가 있다 보니 심리적인 요소도 많이 작용하는 게임입니다. 바둑이나 경영이나 처한 환경이나 조건에서 어떻게 운영의 묘를 살려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봅니다. <제1강>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먼저 프로기사들의 치열한 승부혼(魂)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피자가 미국에서 꽃을 피웠듯이 고대 중국에서 탄생한 바둑은 일본으로 전래돼 눈부신 발전을 했죠. 80년대까지는 일본바둑을 넘버원으로 쳤습니다. 그런데 1988년 후지쓰배, 응씨배 등 세계바둑대회가 생기면서 일본은 우리나라와 중국에 밀려 2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소니가 삼성전자에 뒤집어졌듯 말이죠. 일본바둑의 퇴보에 대해선 다음에 따로 한번 다루기로 하고….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라는 일본 九단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바둑동네에서 기이한 행동을 일삼아 ‘괴물 슈코’로 불렸던 유명한 프로기사죠. 2009년 5월에 작고했습니다만 이 분이 말년에 “일본바둑이 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도발적인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습니다. “이는 당연히 정상급 기사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땅히 바둑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일본은 전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40~50년 가량 나는 줄곧 이 문제를 생각해 왔다. 내 생각에 바둑은 자유의 세계다.” 여기서 ‘정상급 기사’를 ‘기업가’로 대체하고, ‘바둑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화두를 ‘기업가정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대입해 놓고 본다면 경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기업가정신’의 쇠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한 신문을 보니까 세계가 극찬하던 한국의 기업가정신 지수가 2000년대에 들어와선 뚝 떨어졌다고 우려하며 한국경제가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기업가정신의 부활이 절실하다고 주장하더군요. 프로정신과 기업가정신 프로기사인 저로서는 바람직한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활문제의 정답을 제시하듯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CEO가 철저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할 때 목표한 성과를 달성하고 기업의 장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쯤은 압니다. 일본경제의 사례에서 보듯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혼다나 닌텐도 같은 경우 창업주들의 투철한 기업가정신이 도약의 발판이었으며, 이렇게 일어난 기업들이 패전 후 일본의 부흥을 이끌어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았다는 평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기업가의 정신을 반상 승부사들의 프로정신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후지사와 九단은 호방하고 화려한 바둑으로 팬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바둑황제 조훈현 九단은 세고에(瀨越憲作) 九단의 내제자(內弟子)로 들어갔지만 실질적으로 바둑은 그의 천재성을 아낀 후지사와 九단에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조九단도 “세고에 선생님이 정신적 스승이시라면 후지사와 선생은 실전스승”이라고 말합니다. 후지사와 九단은 군입대 차 귀국했다가 한국에 눌러앉아버린 ‘훈현이가 보고 싶다’며 허리춤에 술 한병 달랑 차고 서울로 날아온 일화가 있습니다. 제자 조훈현을 얼마나 좋아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훗날 조훈현 九단은 “그때 2박3일 내내 호텔에 틀어박혀 선생님 술시중과 바둑상대를 해 드리느라 죽는 줄 알았다”며 크게 웃더군요.  ▲ 1984년 한일프로교류전 차 방한한 후지사와 九단을 공항에서 마중하고 있는 제자 조훈현 九단. 후지사와 九단이 마치 손자마냥 안고 있는 아이는 조九단의 아들 민제.
요코하마 태생인 후지사와 九단은 62년 명인전, 76년 천원전, 77년 랭킹1위 기성전 등 새로운 기전이 탄생할 때마다 1기 우승을 휩쓸어 ‘처음에 강한 슈코’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전이 생기는 족족 첫 타이틀 홀더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큰 승부에 강한 기사였음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정신력과 배짱이 대단하다는 얘깁니다. 이런 후지사와 九단도 아킬레스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술과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한 거였죠. 평소 술에 찌들어 지냈으며 경륜과 경정에 빠져 거액의 우승상금을 고스란히 날린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빚까지 져 늘 허덕였습니다. 자기관리에 소홀한 승부사가 성적이 좋을 리 없겠죠.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이, 여타 기전에서는 형편없는 승률을 보이던 그가 우승상금이 가장 많은 랭킹1위 기성(棋聖)전에서만큼은 딴사람으로 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슈코’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후지사와 九단의 자기관리와 필승정신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1년에 딱 4판만 이기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일본 3대 기전의 결승전 방식은 챔피언이 다음해 도전자를 맞아 우승을 가리는 도전기(挑戰棋)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7전 4선승제인 기성전 도전기에서 딱 4 판만 이기면 ‘1년 농사’를 짓는다는 겁니다. 당시 기성전의 우승상금이 2,600만 엔, 한화로 환산하면 3억 원에 가까운 거금이니 그럴만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전이라고 했던 왕위전의 우승상금이 80년대까지 1,600만 원이었으니 당시 일본 기성전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사즉필생(死卽必生)의 심정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됐을 거라고 지레 말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정신의 발로라고 봅니다. 그는 기성전 도전기 시즌이 끝나는 봄부터 술독에 빠져 살다가도 도전자의 윤곽이 슬슬 드러나는 가을무렵부터는 알코올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설날 축하주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단현상으로 인한 고통이 여간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김유신이 단칼에 애마의 목을 베고 천관녀(天官女) 집에 발길을 끊었듯 술을 끊고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들어갑니다. 게다가 그는 50대 중반 나이에 이미 암 판정을 받은 몸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절제로 승부호흡을 끌어올려 도전기에 임했습니다. ‘대마 킬러’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은 가토(加藤正夫) 九단, ‘컴퓨터 바둑의 원조’ 소리를 듣는 이시다(石田芳夫) 九단, ‘끈기의 이중허리’ 린하이펑(林海峯) 九단, ‘미학자(美學者)’ 오타케(大竹英雄) 九단과 같은 젊은 맹장들을 고꾸라뜨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오십줄의 조훈현 九단이 이세돌, 신진서 같은 쟁쟁한 도전자들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린 거지요.  ▲ 1978년 제2기 기성전 5국 종국 장면. 후지사와 九단(왼쪽)이 가토 九단의 대마를 잡고 승리했다. 1승 3패로 막판에 몰렸던 후지사와 九단은 이 승리를 발판 삼아 내리 3연승을 거두며 최종전적 4-3으로 기성전 2연패에 성공했다. (사진/일본기원)
제1기부터 6기까지, 그렇게 일본 최고의 타이틀을 6년이나 지켜냈을 때의 나이가 57세. 어떻습니까? 30대에 접어들기만 해도 하향세를 보이는 치열한 바둑세계에서 승부사로서 환갑진갑 다 지난 나이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건 약과입니다. 10년 뒤에도 그는 노익장을 과시합니다. 1991년 66세의 나이로 제39기 왕좌전을 우승해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다음해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九단의 도전을 받은 제40기 도전5번기에서도 3승 2패로 타이틀을 방어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지요. 고바야시 九단이 누구입니까? ‘지하철 바둑’이란 별칭으로 조치훈 九단과 숙명의 라이벌전을 펼치며 일본바둑을 호령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후지사와 九단이 1992년 왕좌전을 2연패했을 때의 나이가 67세. 세계바둑사를 통틀어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최고령 우승기록입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최고령 우승기록은 조남철 九단이 1973년 제1기 최강자전에서 세운 49세이고요, 조훈현 九단이 2002년 제1기 KT배에서 타이기록을 세운 바 있습니다. 세계대회에서는 2002년 제7회 삼성화재배에서 기록한 조훈현 九단의 49세 우승이 최고기록입니다.  ▲ 1992년 11월 25일 벌어진 40기 왕좌전 도전5번기에서 67세의 후지사와 九단이 기성·명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던 일인자인 40세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의 도전을 받았다. 도전기가 최종국에까지 이르기는 했으나 결국 기세등등한 젊은 도전자의 낙승으로 끝날 것으로 점쳤다.
그렇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칠십 고령에 가까운 후지사와 九단이 238수 만에 흑 5집반승을 거두며 타이틀 2연패에 성공했다. 동시에 최고령 타이틀 보유자 기록을 경신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보다 높은 차원의 승부는 젊음의 힘이나 기술로써 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다”고 일갈했다. 철저한 프로정신과 승부근성으로 1년에 딱 4판만 이기며 일본바둑 최고의 자리를 6년이나 지켰던 후지사와 九단. 그러나 승부세계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입니다. 괴물 후지사와의 시대를 끝낸 사람은 그보다 더 지독한 승부정신으로 무장한 조치훈 九단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냐고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면 말 다했잖습니까. 지고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던 조치훈의 바둑이야기를 이어서 나눠보겠습니다. <계속>  ▲ 이 연재는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일부를 설연휴 특집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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