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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바둑판은 악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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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바둑판 복원한 중요무형문화재 소목장 이수자 유진경 씨 그동안 우리만의 바둑판을 만든 사람은 여럿 있었다. 상감(象嵌: 금속, 도자기, 목재 등의 표면을 파고 그 속에 금이나 은 등의 다른 재료를 넣어 채우는 기술) 기법을 활용해 바둑판을 만들었던 배정균 씨가 있었고, 그 뒤로 호주에서 우드 아티스트로 활동하던 김종환 씨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현목을 재료로 상감을 입혀 독창적인 바둑판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세상에 공개된 바둑판은 그 외관부터가 범상치 않다. 외관이 우리의 전통바둑판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더욱이 바둑돌을 놓는 상판에 화점 아홉 개가 아닌 순장점 열일곱 개가 선명하게 찍혀 있어 한눈에 우리 선조들이 즐겨두었던 전통바둑판을 복원한 것임을 느끼게 했다.  ▲ 중요무형문화재 이수자 유진경 씨가 복원한 전통바둑판의 윗면. 순장점 열일곱 개가 찍혀 있다.
 ▲ 바둑판의 옆면. 상감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기린이 들어간 부분이 상석이라고 한다.
기대 반 호기심 반을 품고 반세기 넘게 단절된 전통바둑판을 복원해 세상에 선보인 유진경 씨를 만나러 그의 상설전시장과 작업장이 있는 김포로 차를 달렸다. 유진경 씨는 중요문형문화재 소목장 이수자로 김포아트빌리지 내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나무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바둑판을 만들었던 건 아니에요. 고가구 말고 뭔가 차별화된 걸 찾다가 바둑판에 꽂히게 된 거죠. 바둑은 결혼하면서부터 관심 갖게 됐어요. 남편이 바둑을 너무 좋아합니다. 퇴근할 때 동료와 함께 집에 와서 밤새 바둑을 둘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상상 못할 일들이 그때는 당연한 듯 벌어지곤 했다. “그때는 지금 같은 문화가 아니어서 남편이 바둑을 두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바둑판 내놓고 저는 방에 들어가서 애들이랑 자고 그랬죠. 남편은 새벽까지 바둑 두고…. 그런 남편과 살면서 아이 하나 낳고나서 둘째 낳을 때까지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시 만해도 회사에 숙직실도 있어서 바둑 두느라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았죠. 어떻게 하면 남편을 집에 들어오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덜컥 제가 바둑학원을 등록해 버렸습니다.” 남편의 외유(?)를 잡기 위해 바둑학원을 등록했지만 아녀자의 신분으로 바둑을 마음 편히 배우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한 달 배웠습니다. 그 뒤로는 남편이 집에 모셔둔 바둑의 정석이니 포석이니 하는 책으로 독학했죠.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면서….” 소리에 담긴 비밀을 풀다 “IMF 금융위기 때 남편과 제가 같이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어차피 힘들 바에야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그게 업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찾은 게 목수입니다. 게다가 운 좋게 박명배 선생님(중요무형문화재)이라는 고수를 만나서 배울 수 있었고요.” - 목수와의 인연은 그렇다쳐도 바둑과의 인연은 어디까지나 남편 덕분이었다? “바둑판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남편 때문이었습니다. 목수가 되면서부터는 기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 저희 집에 있던 바둑판이 굉장히 무거웠어요. 소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바둑판이었으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판은 아니었던 거죠. 아마도 당시 어디선가 고가를 주고 가져온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 전통바둑판을 만들게 된 건 어디까지나 바둑을 좋아한 남편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바둑실력은 두자리 급수라지만 착점하는 품새는 예사롭지 않았다.
남편과 두었던 바둑판은 우리가 지금 즐겨 사용하는 현대식 바둑판이었을 텐데, 어떻게 전통바둑판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일까? “제가 어느 날 남산 밑 한옥마을 초입에 있는 ‘한국의 집’에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바둑판을 보게 됐어요. 궁금한 마음에 살짝 밀어봤는데 쓰윽 하고 밀리더라고요.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그때는 ‘가벼운 바둑판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겼죠. 그 뒤 어렵게 구한 최순우 관장님의 도록 「한국의 목칠가구」에서 ‘한국의 집’에서 봤던 바둑판과 정말 비슷한 바둑판을 발견하게 된 거죠. 그리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 하나를 알았습니다.” 최순우 관장의 「한국의 목칠가구」 도록엔 바둑판의 외형뿐만 아니라 도판 해설까지 곁들여져 있었다는데 유진경 씨는 거기서 바둑판 속에 철사줄을 넣어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울림을 주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바둑판 도판 해설을 보고 완전히 꽂혔습니다. 여기 보면 이 말이 있죠. ‘가구니까 무슨 나무다 그런 말이 대부분이지만 여기 밑에 보면 천판 밑에는 가는 철사를 종횡으로 여러 줄 설치한 후 오동(나무)으로 막아 울림통을 만들고 가운데 작은 구멍으로 소리를 만들었다.’...제가 (바둑판) 소리 얘기는 남편에게 들었거든요. 그렇게 두꺼운 바둑판을 써야 바둑알을 놓을 때 소리가 좋다고. 저희 남편이 취하면 두보의 시를 읽는 그런 분인데, 그 당시엔 속으로 ‘아유 진짜’, 하면서도 ‘그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걸(바둑판 도판 해설) 보니까 그게 아니고 완전히 악기네! 하고 감탄한 거죠.” 전통바둑판을 여러 번 구경한 사람도 바둑판 상판 밑에 철사줄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넘기기 십상인데, 그 사실을 알았으니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을 것이다. “그 이후 논문 검색하는 곳에 가서 다 찾아보고 기사도 다 찾아보고 했는데 1990년대 조선일보에 배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 배정균 씨 일겁니다. 상감바둑판. “네 맞아요. 거기 소리 얘기가 들어있더라고요. 그 분은 바둑판 줄을 그을 때 홈을 파서 거기에 감나무로 상감을 하는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10mm를 팠으면 6mm 정도만 채우고 나머지 4mm를 남겨서 소리를 공명하도록 했습니다. 그분의 독창적인 방식이었죠. 조선시대 바둑판 공명 방식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관심을 너무 많이 가졌고 조선일보에서 2면을 할애할 정도였으면 좋은 면도 있지만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목수님을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만나봤는데 지금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목수를 하지 바둑판은 만들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다보니 현재는 바둑판에 관심을 가진 목수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고 제가 홀로 하고 있는 셈이죠.”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소리를 찾아낸 유진경 씨의 마지막 과제는 바둑판의 외관이었다. 도록에 남아있는 바둑판 말고도 여러 바둑판이 존재했을 거라고 믿은 그녀는 전통바둑판 수집가를 수소문 끝에 안영이 선생을 찾아가게 된다.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를 보고 나서 안영이 선생님을 무작정 좇아다녔습니다. 전통바둑판을 30여 개 가지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신 분께는 당연히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 안영이 선생님이 아무나 집에 들이는 분이 아니어서 애를 먹었을 듯한데.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셨습니다. 안 선생님 댁을 방문해 바둑판의 제원을 실측하고 조언을 많이 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선시대의 바둑판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전통바둑판에 순장점 열일곱. 당연한 조합이라 여겨지면서도 자꾸만 화점 아홉 개를 찍으면 실용적일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생각도 해봤는데, 전통바둑판에 화점 아홉개보단 순장점 열일곱 개가 제옷인 듯하여 그렇게 하고 있어요.” ‘유진경 나무공방’에 전시된 바둑판들은 외관만 그럴싸한 작품이 아니다. 유진경이라는 한 장인이 집요한 역사 고증을 통해 빚어낸 계승 작품인 것이다. <출처/월간바둑 10월호, 인터뷰/구기호 편집장>  ▲ 유진경 씨가 작업장에서 낙동법(烙桐法)을 시연하고 있다. 전통바둑판 옆면은 낙동법이 사용된 오동나무를 부착해 품위를 높였다. 낙동법이란 인두로 오동나무의 표면을 지져 강도를 높이고 무늬를 부각시키는 전통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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