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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와의 대국, 창의력 아니라 계산서 승패 갈렸다
이세돌·알파고 세기의 대결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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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3월19일자 중앙일보의 주말판 신문 [중앙SUNDAY]에 게재된 '문용직 칼럼' 최신기고입니다. 이세돌-알파고 5번기에 대한 기사가 쓰나미처럼 쏟아진 상황에서 전 프로기사로서, 또 정치사회인문 분야를 공부하는 학자(박사)로서 한 템포 늦춰 거리를 두고, 냉정한 눈으로 '알파고 현상'을 바둑적 관점에서 바라본 글이라 시선을 붙듭니다. ○● [중앙SUNDAY] 원문보기 ☜ 클릭 세상이 한바탕 어지러웠다. 조명으로 눈이 부셨던 대국장은 모두가 떠나 황량하다. 어지러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에 졌다. 1대 4. 그건 첫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중반까지는 비등했지만 계산이 전부인 영역에서는 역부족이었다. 문화적 파장이 큰 승부라 과장된 이야기와 극적인 표현이 넘쳤다. ‘패러다임 혁명’ ‘인간과 달리 두는 알파고’…. 이거 참, 뭐라고 할까. 상황은 이해되지만 표현이 너무나 거칠었다. 많은 이의 정신과 자존심이 압도되었는데, 상당 부분은 아무런 준비 없이 대결을 바라본 데서 왔다. 이 글은 바둑에만 국한하겠다. 반상의 오해만 확인해도 세간의 비약과 충격을 많이 줄일 수 있을 터다. 섣부른 문명론·위기론을 자제하기 위해서도 냉정함이 필요하다. 이번에 우리 사회는 많이 들떠 있었다. 알파고의 승리가 계산 능력에 힘입은 것이라는 일부 과학자의 주장이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묻혀 버린 것은 좋은 예다. 아쉽게도 프로들부터 인식에 문제가 많았다. 현실이 아니라 미리 상상했던 알파고를 전제해 반상을 이해하고 해설했다. 이세돌과 커제(柯潔)의 세계 대회 결승국과는 달리 비논리적으로 대국을 해석했다. 언론은 이슈 만들기에 바빠 단순화와 비약으로 나아갔다. “패러다임 혁명”은 함부로 쓴 용어 ‘직관(直觀)’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감정이나 생각 등의 매개가 없이 주어진, 계시(啓示)된 앎이다. 생각이란 건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선입견이나 감정이 먼저 오면 생각은 그를 따라간다. 직관은 문화와 관계없이 인간에게 있다. 바둑에서는 어떤 것인가. 반상이 주어진다. 그러면 제일 먼저 문득 떠오른 안목, 그것이 직관에 속한다.  ▲ <기보1> 흑1은 직관적인 착점인데 프로들이 잘 안 둔다. 인공지능인 알파고에 직관이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컴퓨터 바이러스를 생물로 봐야 한다는 견해는 이미 20년 전에 나왔었다.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의식의 발현 과정을 제쳐둔다면 알파고는 직관적인 수법에 익숙했다. 모호하고 답이 없는 상황에서 무릎을 칠 정도의 좋은 수를 순간적으로 둔다면, 그것은 직관이 작용했다고 봐도 된다. 2국의 초반인 <기보1>을 보자. 흑1(실전 흑37)이 놀랍다. 정말이지 사람이 둔 것 같은 감각적인 착상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직관이 없을 것이라는 ‘일방적인’ 전제가 있었기 때문일까. 문제가 비약했다. 대부분의 해설이 이랬다. “인간의 이론이라면 있을 수 없는 수다.” “이런 수로 알파고가 이긴다면 혁명이다. 인간 바둑을 뛰어넘었다고 본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20~30년 전에 기성(棋聖) 우칭위안(吳淸源)이 강조한 수법이다. 우칭위안이 『21세기 포석』에서 제시한 <기보2> 백1은 좋은 예다. 흑집을 먼저 굳혀주는 것이라 프로들이 잘 안 둘 뿐이다.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은 즐겨 쓰지만.  ▲ <기보2> 우칭위안이 즐겨 쓴 백1은 응수타진. 따라서 <기보1> 흑1에 대해서는 “잘 안 쓰는 수법”이라고 평하면 족했다. 흑1은 결단이라고도 하겠는데 만약 백A가 온 다음에 흑1을 두면 그때는 공격당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알파고는 망설이지 않고 반상을 결정해 가는 데 능했다. ‘인간 바둑’ ‘인간의 이론’ 그에 더해 ‘패러다임’도 오용된 용어다. 여기저기서 썼다. “알파고의 반상 패러다임 혁명.” 알파고 신화를 바둑계가 자진해서 헌납할 판이다. 관념의 혁명은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등장하는 순간 알 정도라면 그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혁신적인 관념은커녕 알파고가 새로운 수법을 들고 나온 적도 없었다. 예리했던 건 사실이다. 이세돌이 말했다. “완패다.” 이해할 수 있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말은 실재하지 않는 현실도 직조(織造)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바둑계가 그런 표현을 쓰니 언론은 알파고를 별격의 존재로 여겼다. 인간이 모르는 세계를 마치 알파고가 찾은 것인 양 알아들었다. 알파고를 달 착륙에 비긴 허사비스의 감격은 인공지능 분야의 업적이다. 반상에서 알파고는 단지 강했을 뿐이다. 지나친 비약은 우리의 투사에서 온 듯하다. 한국 사회는 무의식적인 경계에 휘둘렸고 정신적 충격까지 받은 듯한데, 그것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반향(反響)에서 오는 상실감 때문이었다. 동양에서 바둑의 상징성은 컸다. 서양과 구별되는 경계에 높이 선 문화적 망루였다. 우리 의식의 밑바닥에 남아 있었던 것은 19세기부터 서양에 밀린 동양의 자존감. 그것이 곧 집단 에고(ego)의 내용 중 하나였고 바둑은 그 피해의식을 보상해 줄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기에 바둑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일부’로, 곧 보루였다. 에고에 경계의 지속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알파고는 서양의 다른 모습. 그 연장선에서 ‘인간 대 기계’에 초점이 잡혀 사고가 한쪽으로만 치달았다. 그런 현상을 하나 보자. 프로들은 물론 과학자들도 알파고의 약점을 찾으려 했다. “알파고는 의외의 수를 두면 당황할 것이다.” 하지만 알파고에는 ‘의외의 수’도 없고 ‘당황’도 없다. 감정이 없어 ‘의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외의 수에 놀란 알파고가 악수를 쏟아냈다”는 4국은 알파고의 버그였을 뿐이다. 1~3국을 지켜본 녜웨이핑(聶衛平) 9단이 말했다. “알파고가 둔 수는 모두가 완벽하다.” 전략 운운(云云)도 오해다. “이세돌이 어떤 전략을 세워 대국에 임할까?” 초점이 틀렸다. 바둑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게임이 아니다. 반상엔 서로의 구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칭위안도 말했다. “수를 추론해 바람직한 전개 방향을 구하는 것이 전략의 전부다.” 여러 가지 변화를 비교해서 최선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그러기에 바둑은 맑은 게임이고, 그러기에 바둑은 3000년 동안 사랑받았다. 꾀가 작용하지 않는 게임인 것이다.  ▲ 동양에서 바둑의 상징성은 컸다. 서양과 구별되는 경계에 높이 선 문화적 망루였다. 그러기에 바둑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일부’로, 곧 보루였다. 100수에 이르면 추론·계산이 전부 바둑의 부분적인 답은 이미 1995년에 발견되었다. 수학자 벌캄프(E. Berlekamp)와 김용환 박사가 발전시킨 끝내기 해법이 그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이렇다. 수순의 차이가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차이가 미묘할수록 인간은 감지하지 못한다. 그런 차이는 수학을 써야만 찾아낼 수 있다. 그렇다. 중반 이후 알파고가 보여준 탁월함은 그것에 힘입었다. 인공지능은 그 미묘함을 수치화할 수 있다.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특히 초반. 대국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세계다. 이창호는 돌부처. 사카타 에이오(坂田榮男)는 면도날. 종반까지 그런 개성이 살아 있는가. 그렇지 않다. 대개 50~60수 지나고 나면 개성은 확연히 자취를 감춘다. 이후엔 돌이 얽히기에 100수에 이르면 누가 두어도 추론과 계산이 전부다. 알파고는 100수를 넘어서서야 비로소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다. 3국 직후 허사비스가 말했다. “알파고는 두면서 승패 추정도 한다.” 소위 형세 판단이다. “중반까지는 대등한 승부라고 봤다. 후반에야 승리를 확신했다.” 그랬다. 서로 둘 만했다. 그러니 알파고는, 일부 과학자가 바르게 반론을 제기하였듯이 창의력이 아니라 계산에 능했을 뿐이었다. 물론 알파고는 뛰어난 지능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알파고는 현재의 바둑 수준 속에 있고, 계산에서 앞섰을 뿐이다. 중반까지는 서로 해볼 만했던 승부 창의력은 어려운 문제다. 사실 창의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과학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알파고는 19세기 일본의 기성 슈사쿠(秀策)처럼 냉정하고 실수가 없었다. 수읽기도 깊었는데 뚜렷한 창의성은 보여주지 못했다. 슈사쿠도 그랬다. 허사비스는 “이세돌을 고른 건 창의성 때문”이라고 했다. 거참, 한 방 맞은 거 같다. 준비를 면밀히 한 구글이 세상을 한바탕 이벤트로 몰아간 기분이 없지 않다. 구글이 한국을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기원은 보수적인 조직이고 중국은 구글이 막힌 나라였다. 사실 자율학습 알파고에는 이세돌이 필요치 않다. 창의성도 마음먹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이번에 이세돌의 변칙적인 수법은 번번이 알파고에 막혔다. 변칙은 정상적인 수법을 넘지 못한다. 그래, 승부는 끝났다. 냉정해지자. 이제 승부에서는 인간이 인공지능과 자웅을 결하기가 불가능하다. 알파고의 지금 버전만 해도 어느 프로보다도 강하니 앞으로야 말할 것도 없다. 아쉽게도 10번기와 같이 짜릿한 승부판이 주는 맛은 이제 얻기가 어렵게 되었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 바둑계에도 알파고의 등장은 큰 충격이다.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바둑이 발전할 수 있을까. 그건 몰라도 바둑은 이제 놀이성과 교육적 효과를 넓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터다. 바둑계가 이런 기회에 강연회 한 번 열지 않은 것은 아쉽다. 대국장에 온 외국 기자만 100명이 넘었고, 세계인이 보는 유튜브 실황중계도 있었는데 말이다. 바둑 보급은 ‘바둑의 가치를 높이는 작업’으로 정의된다. 해외에 기사 몇 명 파견해서 가르치는 건 사소하다. 허사비스는 방한 후 강연 활동까지 했다. 언젠가는 올 혁명적인 세상이 도래했다. 알파고는 이미 와 있었고 이세돌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패배의 부담을 져야만 했다. 이세돌도, 바둑계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어느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넓은 안목과 에고에 갇히지 않는 태도, 그것이 절실한 시간이 왔다. 바둑에서도, 바둑 아닌 세상에서도. [문용직/전 프로기사, 정치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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