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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빛난 神算 이창호
상승장군 콩제 꺾고 구리와 최종 우승결정국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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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 2월 8일 오후 5시 36분(현지시각 오후 4시 36분). 중국 상하이(上海) 화팅(華亭)호텔 2층 특별대국실. 승부는 끝났다. 검토실 폐쇄회로 모니터를 통해 제8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상하이대회 3국(본선13국) 이창호-콩제(孔杰)전을 지켜보던 관계자들은 콩제가 착수를 포기하고 중앙의 돌들을 들어내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패배의 의사표시였기 때문이다. 곧바로 사이버오로의 인터넷 해설창에도 ‘134수 끝 백(이창호) 불계승’이란 문자가 떴다.  대회 스태프와 방송, 신문기자들이 일제히 대국실로 뛰어갔다. 승부가 끝난 현장은 즉각 취재기자들의 전장(戰場)이 된다. 일찌감치 붉은 테이프로 울타리를 쳐 대국 좌석을 사각의 링으로 만들어놓은 포토라인은 좁다. 대국자들의 섬세한 표정과 동작을 잡아내려면 좋은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조명 탓일까. 아니면 기자의 착각일까. 평소 같으면 열이 많은 체질에 승부의 열기까지 더해 붉게 달아올라 있어야 할 이창호의 얼굴은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빛이 났다. 지치고 힘든 얼굴이었으나 거기에는, 힘겨운 그러나 반드시 해내지 않으면 안 될 일을 무사히 마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나른한 평화가 깃들어있었다. 승부처였던 중앙전투를 중심으로 복기 검토가 시작됐다. 반상의 전투에서 감명 깊은 ‘신산(神算)’의 통찰력을 보여준 이창호는 묵묵히 패자의 정서에 순응했다. 잠시 짧은 감격에 휩싸였다. 얼마만인가. 승리를 거둔 뒤 순박한 ‘돌부처’의 얼굴로 패자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저 모습은. 번쩍이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서 이따금씩 두 눈을 깜박이며 상대를 바라보는 이창호의 얼굴은 눈이 부셨다. 띠동갑의 어린 도전자 윤준상을 맞아 믿을 수 없는 착각, 도저히 이창호의 바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으로 도전1, 2국을 내줘 타이틀 상실의 벼랑까지 내몰린 국수전. 상대전적 21승 7패(2002년 한중슈퍼매치, 2005년 남방장성 특별대국 제외)로 압도해온 창하오(常昊)에게 무력하게 무너지며 우승컵을 넘겨준 삼성화재배. 불과 보름 전의 악몽이 연상되는 같은 장소(삼성화재배 결승 장소도 화팅호텔)에서, 그는 돌아오고 있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바로 그때 그 ‘절대지존’의 모습으로. 위기에서 빛나다 2월 8일 오후 3시(현지시각 오후 2시) 2분 전. 이창호가 대국실을 향한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사람 특유의 푸석푸석한 얼굴.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보였는데 문득, 그 졸린 듯 느린 걸음에서 ‘채근담(菜根譚)’의 한 구절을 떠올린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일까. 鷹立如睡 虎行似病 君子 要聰明不露 才華不逞 매는 조는 듯 서 있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걷는다. 군자는 총명을 드러내지 않고 재주 휘두르지 않는다 대국개시 1분 전 콩제가 빠른 걸음으로 대국실로 들어선다. 훌쩍 큰 키에 홍콩연예계 4대천왕 리밍(黎明)의 이미지를 풍기는 준수한 외모. 비교하자면 한국의 동갑내기(82년생) 조한승이 있다. 자신만만한 눈빛과 힘찬 걸음까지, 모든 면에서 이창호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하루 전 박영훈의 5연승을 저지하며 기분 좋게 워밍업을 한 콩제는, 많지 않은 전적이지만 이창호에게도 강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 제3회 춘란배 16강전, 2004년 제2회 도요타덴소배 8강전 2승. 2004년 타이다배 한중일 초청전에선 패했지만 공식기전에서는 전승을 거둔 셈이다. 드디어 대국이 시작됐다. 이제 ‘소신산’ 박영훈의 패배는 잊어야 한다. 4년 전 콩제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는 제몫을 다했다. 흔들리는 ‘신산’을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누가 뭐래도 박영훈의 공이다. 이창호도 그것을 잘 아는 듯했다. 비록, 고단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초반의 평범한 판짜기를 보는 순간 우리는 상서로운 예감을 가질 수 있었다. 국수전에서, 삼성화재배에서 끝 모를 바닥을 향해 추락하던 이창호는 거기에 없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몰입의 구도자 이창호가 거기 있었다.  대국을 전후해서 농심의 박준 사장이 검토실을 방문했다. 이창호의 국수전, 삼성화재배 연패가 화제로 올랐다. 박준 사장은 ‘오늘은 시상식을 하기 싫은데….’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창호의 승리를 기원했고 기자는 ‘초반 전개는 알기 쉽게 풀어나가는 전성기 이창호의 바둑 그대로다. 비교적 빠른 착수도 느낌이 편하다. 예감이 좋다’고 화답했다. 상서로운 예감은, 중반전 초입 흑 47의 중앙 삭감에 ‘태극(太極)’의 요소를 짚어 비스듬히 응수한 백 48의 시점에서 뚜렷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 수였다. 오랫동안 신뢰의 대명사로 우리 눈에 익숙해진 ‘신산’의 모습이 그 한수에 교차됐다. 이후 진행에서 이창호는 전성기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은은히 상대를 압박하는 두터운 반면운영,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손속, 한 마리 토끼를 쫓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호랑이의 신중함. 최근 1인자 구리를 상대로 중국 최대타이틀 창치배를 따내고 출전 첫 대국에서 ‘소신산’ 박영훈을 기분 좋게 따돌리며 당당하게 중국 우승의 자신감을 드러냈던 콩제도 돌아온 ‘신산’의 계산을 벗어나진 못했다. 진땀을 흘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앙 대마를 움직이던 콩제는 134수에 이르러 돌을 거두었다. 그것은 ‘신산’의 단호한 손이 중앙 흑 대마의 명줄을 움켜쥐는 순간 예정된 결과였다. 이창호는 이례적으로 승리의 인터뷰를 사양하고 자리를 떴다. 그에게는 아직 더 큰 승부가 남아있고 그 승부가 끝날 때까지 그는 마음의 부담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작게는 이곳까지 이끌어온 어린 후배 박영훈과 동료들을 위해서, 크게는 병상에서 한국의 우승소식을 학수고대할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이길 때나 질 때나 변함없이 성원해온 수많은 팬들을 위해서 그는 승리의 강박에 시달리며 또 한판의 대회전을 준비할 것이다. 저녁식사 후 피로를 풀기 위해 스태프와 함께 몰려간 발마사지센터 앞에서 이창호, 이영호 형제와 마주쳤다. 특급매니저 이영호는 든든해보였고 변함없는 이창호의 수줍은 웃음은 또 한 번 좋은 예감을 안겨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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