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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천사
날개 없는 천사와 날마다 마음을 거울처럼 닦고 사는 바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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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출판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포항에 사시는 팬이라고 하는데 저자와 통화를 하고 싶어한다. 전화번호를 가르쳐 드려도 되겠냐’는 내용이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사람을 기피해야 할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또 폭주하는 전화에 시달려 스트레스를 받는 인기 연예인도 아니니 ‘가르쳐드려도 괜찮다’고 대답했고 이튿날 포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중년남자의 것으로 들리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크고 밝았는데(통화중 스스로 밝힌 ‘전신마비 장애’의 고통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며칠 뒤 한 통의 편지와 두 권의 책을 받았다. 시와 수필이 섞인 이 책의 제목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 ‘두무치 편지’였다. 故 민병산 선생의 독특한 필체가 연상되는 글씨로 ‘이상열 드림’이라 마무리한 편지의 내용 중 옮기기 낯 뜨거운 칭찬을 빼고 대략 정리하면 이랬다.‘손 선생의 책을 봤는데 재미있었다. 또 다른 저서가 있다면 구해보고 싶으니 알려달라. 나는 교직생활을 하다가 추락사고를 당해 전신마비가 되었다. 입으로 컴퓨터 자판을 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口足畵家) 겸 글쟁이인데 바둑은 인터넷 5, 6단 정도이며 조훈현, 이창호 국수님을 정말 좋아한다. 두 분께 졸저(拙著)를 전하고 싶어 따로 보내는데 번거로우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고 손 선생의 사인도 받고 싶어 책을 함께 보낸다.’ 편지를 받은 다음날쯤인가 다시 이상열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몇 마디 안부인사를 주고 받은 뒤 선생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바둑판에 조훈현, 이창호 국수님의 사인을 받고 싶은데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나는 ‘사정을 밝히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한국기원을 통해서 알아보고 나도 이 국수에게 직접 부탁해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며칠 뒤 두 분 국수가 흔쾌히 응해줘서 이 선생의 바둑판은 조훈현-이창호의 금의(錦衣)를 입고 환향(還鄕)했다.  이 일을 전후로 해서 이상열 선생과 나는 오랜 지기처럼 안부전화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이런 일들이 아이처럼 호기심 많은 스포츠칸의 엄민용 기자의 눈과 귀를 스쳤다. 그는 주저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런 분을 왜 그냥 덮어두려는 겁니까? 같은 처지에서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의미에서라도 이상열 선생 같은 분은 널리 알려져야 돼요.” 사실, 나는 공연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이상열 선생이 더 불편해지거나 선생의 삶이 왜곡돼 가십거리 정도의 화제로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엄 기자의 취재요청이 조금은 두려웠는데 ‘같은 처지에서 힘겹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의미’라는 말에 손을 들고 말았다. 나는 엄 기자에게 ‘그럼, 먼저 이상열 선생의 의사를 묻고 이 선생이 원하지 않으면 포기하라’고 전제하고 이 선생에게 엄 기자의 취재의사를 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선생은 이미 내가 우려했던 일들을 여러 차례 겪은 것 같았다. 몇 번인가를 망설이다가 ‘좋은 뜻인 줄은 알지만 생각해보겠으니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나는 엄 기자에게 ‘이 선생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으면 취재는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여러 날 뒤에 ‘어차피 손 선생을 만나고 싶어 했으니 그냥 마음 편하게 친구 집에 놀러 오는 것으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엄 기자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키는 훌쩍 크고 검붉은 얼굴, 덥수룩한 수염하며 아무렇게나 걸친 옷차림까지 겉 모습은 영락 없는 산적 두목인데 어디서 그렇게 맑은 눈빛이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7월 7일 오후 1시 40분. 서울역에서 동대구행 KTX에 몸을 실은 손종수와 엄민용은 들떠 있었다. ‘바둑을 좋아하는 구족화가 이상열 선생 취재’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정작 두 사람의 마음이 들뜬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 기자에게는 입사 후 첫 출장이요, 손 모씨에게는 생애 첫 포항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 1시간 50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했고 기다리고 있던 스포츠칸 취재용 승용차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운 좋게도 프로야구 취재차 대구에 내려온 김기남 기자(스포츠칸 사진기자)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선생의 보금자리는 포항시 북구 장성동의 한 언덕 위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있는 깔끔한 아파트단지 안에 있었다. 출발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던 이 선생의 목소리가 어쩐지 들떠 있다 싶었는데 그 느낌은 사실이었다. 우리가 취재목적과는 전혀 다른, 처음 소풍을 떠난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면 이 선생은 머리 속에,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시절의 동무가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오는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았다. 이 선생은 평평한 침대 위에 엎드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밝은 웃음으로 우리를 맞았다. 곱게 내려앉은 눈발에 이제는 검은 머리카락이 새치의 역할을 대신하는 나이가 분명한데 연분홍 티셔츠가 더 없이 잘 어울리는 동안(童顔)이었다. 머리맡에는 컴퓨터가 놓여있었고 침대 옆으로 책장이 길게 붙어있었다.  책장은 침대 옆뿐 아니라 방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은은한 향기를 가진 책의 마음을 공유한 사람들은 처음 만나도 어색하지 않다. 공유한 향기를 느끼는 순간 더 이상 처음의 만남이 아니니까. 우리는 곧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엄 기자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그는 중,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던 평범한 선생님이었다. 주말이면 등산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손의 대화[手談]’를 나누며 말술의 호기를 뽐내던 보통 사람. 82년 맑은 하늘의 날벼락 같은 추락사고를 당해 전신마비의 장애가 찾아오면서 그 인생이 마감되고 고통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다시 그 고통으로 잠이 깨는, 결코 원한 적 없는 새 인생이 시작됐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어둡고 긴 터널. 7년의 방황이 그렇게 이어졌다. 만일 누군가 홀로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사람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작은 것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육체보다 더 완강하게 누워버렸던 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장애의 극복’이라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값싼 영웅담을 선호하는 저급한 언론의 부작용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그는 투사가 아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컴퓨터 바둑에 몰입하며 밤을 새우다가 또는 소변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는, 보통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로 응급실에 실려가야 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의 고통과 장애는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진행형이다. 점차 나아진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다. 오랜 방황 끝에 고통은 잊는 것이 아니라 부둥켜 안고 사랑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어쩌면 그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책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끌린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힘겨운 일상에서 틈틈이 그의 얼굴에 웃음을 떠올려주는 것은 극복의 의지가 아니라 체념의 힘이다. 어린시절 우리 어머니들의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 체념은 포기라는 말과 다르다. 포기는 중단과 무용(無用)을 담은 부정의 표현이지만 체념은 순응과 자족을 뜻하는 긍정의 표현이다. 그는 손 대신 입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시선으로 주변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대신하는 편지를 썼고 그것이 묶여 ‘두무치 편지(2005년 9월 도서출판 솟대)가 됐다. 그의 말에 의하면 ‘두무치’는 어린시절 넘던 작은 고개의 옛이름이다. ‘50년 전 어장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넘었던 이 고개는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고 패랭이꽃이 지천에 피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투명한 시절의 기억을 옮겨 머리를 삼았으니 당연히 편지의 내용도 맑을 수밖에 없다. 93년에는 그림에 입문, 김왕주 화백을 사사하고 구족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글과 그림으로 상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따로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힘겨운 그의 장애를 영웅이나 투사로 포장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예전처럼 많은 웃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삶보다 죽음을 더 원했던 어느날, 어둠 속에 비친 한줄기 빛처럼 따뜻한 손을 내밀어준 천사의 덕인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은 천사는 서울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며 살다가 이상열 선생의 간절한 목소리를 듣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이 선생이 일상의 고통을 견디는 힘은 모두 넷.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독서와 인터넷 바둑인데 현재 그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액정 모니터와 컴퓨터도 천사의 선물이다. 깔끔한 아파트와 여유로운 얼굴을 보고 ‘유산이 많거나 사고 전에 벌어놓은 재산이 꽤 많은가’ 했는데 이 선생은 ‘이 아파트, 레지나(세례명)님 겁니다. 저는 거지예요.’라며 웃는다. 그러니 천사다. 내게는 이 분에 대해서 천사가 아닌 다른 호칭을 찾아 부를 능력이 없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마비 장애는 시시콜콜한 잔심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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