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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예선 결승 16국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판
부드럽고 강한 박지은, 일관된 정연함이 경이로운 조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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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일 속개된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전 통합예선 결승 16국을 보기 위해 한국기원 2층 예선 대국장으로 들어섰다. 실내는 조용했다. 중견 기사 몇몇이 조용한 걸음으로 대국자들 사이사이를 오가며 관전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아르바이트 대회 진행자가 앞을 막는다. 보통 예선 대국장은 동료기사와 기자 또는 바둑 관계자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대국자들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세계대회 예선 결승인 만큼 한국기원 직원이나 대회 관계자 이외의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잠깐이라도 곁에서 생생한 ‘느낌’을 얻고 싶은 대국이 있는데 어쩌나. 귀엣말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로(큰 목소리로 떠들었다간 당장 쫓겨날 테니까) ‘취재하러 온 사람이니까 나도 관계자나 다름 없다. 조용히 관전만 하다가 나가겠다’고 사정했다. 그 정도면 허락해주겠지 싶었는데 헉!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한다. ‘내가 며칠째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이다. 기자도, 대회 관계자도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음… 좀 당황하긴 했지만 한국기원에서 사람은 잘 뽑은 거 같다…^^;; 기인이사(?)가 예고도 없이 출몰하는 대국장의 정숙한 환경을 수호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 진짜로! 결국, 다시 한번 ‘소근소근’모드로 이름을 밝히고 ‘3층에 올라가서 직원들에게 확인해보라’고 통사정을 한 뒤에서야 겨우 관문을 통과, 간절히(?) 원하던 대국을 관전할 수 있었다. 누구의 대국이기에 그렇게 보고 싶어 했냐고? 바로, 박지은 5단(중국의 양이 5단과 대국)과 조혜연 5단(중국의 콩제 7단과 대국).  루이나이웨이 9단 이후 세계여자바둑을 평정할, 나아가 메이저 세계대회에서 거센 마초들과 당당하게 겨룰 ‘대기(大器)의 가능성’을 가진 여검객답게 한중일 3국의 젊은 강자들이 들끓는 통합예선의 벽을 나란히 뛰어넘고 있으니 어찌 그 장면을 보고 싶지 않겠는가. 운이 좋았다고 하기에는 두 기사가 결승무대에 이르는 동안 밀어낸 강동윤 3단, 김승준 8단, 왕양 5단, 나카네 나오유키 8단의 이름값이 너무 크다. 네 기사 모두 정상에 근접한 강자들이다. 박지은 5단의 결승진출에 제물이 된 강동윤 3단은 이세돌 9단이 보유하고 있던 최연소 세계대회 본선 진출기록을 깨뜨린 기린아이며 김승준 8단은 세계대회 4강까지 올랐던 강자로 이미 팬들의 눈에 익숙한 스타. 조혜연 5단 앞에 무릎을 꺾은 중국의 왕양 5단도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중국내 주요대국에서 정상급 기사들의 발목을 잡는 복병으로 이름이 높고 일본의 나카네 나오유키 8단 역시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해 기성전 도전자결정전에서 조훈현 9단과 겨뤄 첫판을 따낸 윤준상 3단을 뿌리치고 올라올 만큼 기본이 탄탄한 실력파. 그런데 두 기사 모두 결승 상대가 만만치 않다. 아니, 결승에 오르는 동안 만만한 상대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만만치 않다기보다는 벅찬 상대로 보였다. 하긴, 그게 당연하다. 냉철하게 말해서 두 기사의 결승진출은 대단한 선전이다. 로또 당첨과 같은 천운이 아니고는, 세계대회 본선의 문턱에 만만한 상대가 대기하고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조혜연 5단과 맞선 콩제 7단은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중국의 간판스타. 창하오, 저우허양 등 육소룡의 뒤를 이은 십소호 중에서도 구리 7단, 후야오위 7단과 함께 중국 정상의 트로이카로 꼽히는 강자. 박지은 5단과 겨루게 된 양이 5단은 ‘대륙은 넓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복병. 중일슈퍼대항전의 스타 장원둥 9단과 일본 차세대그룹의 엘리트로 꼽히는 고노린 7단을 꺾고 결승에 올랐으니 결코 방심해도 좋을 상대는 아니다.박지은(흑)의 대국은 막 포석단계를 지나 중반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하변 흑의 진영에 백이 침투한 장면. 언뜻, 흑의 대응이 곤란한 것 같았다. 박지은이 내뿜는 분위기는 진공상태 같은 긴장감이었다. 이따금씩 양미간을 좁히며 수읽기에 몰입중인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왔다. 언제 보아도 그는 소녀가 아닌 소녀다. 소녀라고 부르기엔 20년 7개월의 나이가 무겁지만 그렇다고 달리 부르기엔 너무 여리고 애띤 얼굴을 가졌다. 저 가녀린 모습 어느 곳에, 진공상태 같은 승부의 긴장을 이겨내는 강인함이 숨겨져 있을까. 사실, 나는 누군가 박지은에게 붙여준 ‘여전사’라는 닉네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바둑저널의 공용에 생각 없이 휩쓸려 몇 번인가 써본 적은 있지만!).  승부사 박지은과 일상의 박지은은 확연히 다르다. 많은 프로들이, 특히 여기사들이 사나운(?) 기풍과는 다른 다소곳한 성격을 보여주지만 박지은의 경우는 그 차이가 극과 극이다. 바둑판 위에서는 파워풀한 공격력으로 ‘여자 유창혁’이라고 불릴 만큼 적극적인데 바둑판을 떠나면 매사가 조심스럽고 수줍다. 합기도를 하고 암벽을 타는 것은 오히려 그 반작용이 아닐까. 몸이 기꺼이 따라줘서 격한 운동을 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한계를 느끼는 그 무엇인가를 극복하기 위해서···. 글쎄, 그저 느낌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합기도를 하고 암벽을 탄다고 해도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터프한 근육질의 박지은? 골프의 박지은이라면 모를까 도저히 상상이 안된다. 비유를 하자면 차라리 ‘양들의 침묵’이나 ‘패닉 룸’의 조디 포스터가 낫지 않을까 싶다. 맞다. 이쪽이 낫겠다. 누가 조디 포스터를 여전사라고 하던가? 영리하고 강인하지만 그건 내적 이미지다. 박지은의 강인함은 여자람보 같은 ‘외형의 무엇’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적인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그런 힘의 작용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가끔 들러보는 그의 팬카페를 횡행하는 ‘대장’, ‘필승’이란 호칭이 딱딱한 군대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부드럽게 느껴진 것은.  결단이 어려운가. 생각이 길어진다. 프로의 장고(長考)를 흥겹게 지켜볼 만큼 인내를 갖추지 못한 나는 옆 자리의 조혜연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콩제의 흑으로 시작된 이 대국은 박지은의 대국보다 약간 진행이 더디다. 좌변 접전이 한창인데 앞 길이 제법 험해 보인다. 자의든, 타의든 사방의 실리를 내주고 중앙 세력을 키워 대항해야 하는 스케일 큰 승부를 지향하게 됐다. 세계정상을 활보하는 마초와의 싸움에서 이렇게 통 큰 구도를 짜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남녀를 차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조혜연이 여기사 중에서는 정상의 마초들을 우습게 베어 넘기는 천하의 여검객 루이나이웨이에 필적하는 강완(强腕)이라지만 그런 전장(戰場)의 중압감을 이겨내는 내공(內功)의 깊이에서는 아직 못 미치는 게 사실이다. 여기사들만의 무대에선 루이나이웨이와 대등하게 겨루면서도 루이나이웨이가 번번이 꺾어 넘기는 중견의 마초들을 루이나이웨이와 똑같이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내공? 여기가 무슨 무협의 세계냐고? 물론, 아니다. 그런데 다르긴 해도 프로들은 분명 그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 내기(內氣)를 뿜어내는 발경(發勁)으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그런 내공이 아니라 큰 승부가 주는 중압감, 벅찬 상대가 주는 위압감에 맞서고 이겨내는 무형의 기운 같은 것. 타이틀을 쟁취하고 세계를 제패한 프로들은 모두 그런 무형의 기를 가지고 있다. 흥이 난 김에 좀더 무협을 차용하자면 이렇다. 조혜연은 검을 다루는 초식에 있어서는 발군의 기량을 갖추고 있으나 그 초식에 실어 상대를 압도하는 내적인 기운은 아직 화후가 부족하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혜연은 강하다. 요즘 그는 속된 말로 상당히 ‘잘 나간다’. 여기사로는 다승랭킹 50위권 안에 있는 셋(루이나이웨이 33승 11패 4위, 조혜연 22승 13패 24위, 박지은 17승 15패 42위) 중 한 사람이다. 대 남자기사 전적 18승 13패. 대 여기사 전적은 4전 전승. 중견, 신예를 포함한 남자기사를 상대로 60%에 가까운 승률을 올리고 여기사들은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다. 4승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세계최강의 여기사 루이의 이름이 있다는 것으로 의미는 충분하다.  조혜연의 강인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승부에서나 일상에서 일관되게 지켜가는 ‘정연(整然)’. 선천적인 내력이 그렇고 후천적인 생활이 그렇다. ‘질서나 구획 따위가 잘 정돈되어 어지럽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하다’는 정연의 사전적 정의는 조혜연의 반상, 반외의 삶과 기막히게 일치한다. 85년 6월생, 19년 1개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의 그는 경이로운 존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삶의 교유(交遊)가 일천한 탓이겠지만 나는 아직 그보다 더 반듯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언젠가 그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자녀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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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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