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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그 유럽 바둑축제를 가다
1. 악몽의 이르쿠츠크로부터 레닌그라드대학 캠퍼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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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번 기회에 나랑 같이 가볼 생각 없어? 웬만하면 같이 가자아~” “글쎄요, 유럽바둑대회는 아직 가보질 못해서 저도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유럽 바둑축제를 다녀오게 된 것은 순전히 한 달쯤 전 점심식사 후 차 한잔 마시는 자리에서 가까운 분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용돈씀씀이가 제법 헤픈 나로서도 3개월쯤은 굶을 각오를 해야 할만큼 여행경비가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니까). 47년째를 맞는 유럽바둑대회(European Go Congress)는 해마다 유럽에서 열리는 10여 개의 바둑대회 중 가장 권위 있는 유럽 바둑인들의 축제다. 평소 서양사람들은 바둑을 어떻게 즐기는지 궁금했었는데 더욱 가보고싶은 마음이 컸던 이유는 올해의 개최지가 러시아의 고도(古都) 상트 페테르부르그(st. Petersburg)였기 때문이다. 수도 모스크바가 유럽에서 ‘가장 아시아적인 도시’라면 제정러시아의 수도로서 오랜 세월 유럽을 향한 창(窓)의 역할을 해온 페테르부르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로 꼽힌다. 이 도시는 유럽출신 건축가들에 의해 옛 러시아 영토에서 유일하게 북부 유럽으로 통하는 항로가 이어지는 지역에, 중세유럽의 화려하고 질서정연한 건축미학이 고스란히 구현된 계획도시다.  볼셰비키 혁명이후 한 때 레닌그라드로 불리다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페테르부르그는 세계 3대미술관의 하나인 ‘에르미타쥬 박물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이사크성당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다.문화평론가들은 ‘모스크바가 사람들에게 위협적이라면 상트 페테르부르그는 매혹적’이라고 한다. 급변해온 정치적 변화와 경제정책의 파행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그냥 '피테르(Piter)'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7월 24일 5시 10분 인천국제공항 상트 페테르부르그발 러시아 풀코보항공 FV 275편에 탑승한 일행은 모두 13명. 제47회 유럽바둑대회 일정에 포함된 명지대 주최 제2회 국제바둑학술대회 발표자 또는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가진 대회 참관자들이다(뒤의 학술대회 보고에서 소개). 명지대 바둑학과 남치형 교수의 연락을 받고 출발 당일 오후 2시 30분쯤 공항 로비의 약속장소에 모여 차질 없이 탑승절차를 밟고 비행기에 오른 것까지는 좋았는데 닭장처럼 좁고 무더운 기내좌석(정말이지, 이렇게 비좁은 좌석은 처음 본다. 덩치 큰 러시아 사람들이 앉았을 때를 상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에 앉는 순간 뭔가 이 여정은 순조롭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좋지 않은 예감은 잘 들어맞는다고 하던가. 과연, 협소한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와 씨름하며 4시간쯤이나 날아왔을까. 비행기가 이따금씩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알아듣지 못할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내 곳곳에 앉은 가이드들의 대화를 대충 조합해보니 중간급유를 위해 착륙한다는 것 같았다.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기까지의 비행시간은 11시간쯤 된다. 도중 급유를 위해 어느 한 곳을 경유한다는 말을 사전에 들었기 때문에 놀라는 사람은 없었으나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기내방송이 흘러나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애초 예정은 탑승객들을 기내에 태운 채로 급유를 하고 이륙하는 것으로 돼있었으나 뭔가 기체에 이상이 발견돼 이륙이 불가능하니 모두 내리라는 것이었다. 내리던 승객 중 한 사람이 ‘이곳은 이르쿠츠크인데 애초에 정해진 급유지가 아닌 것 같다. 기체에 이상이 발견돼 가장 가까운 공항을 찾아 이곳에 착륙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린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상태로 비행이 계속되었다면? 일행 중 한 분이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추락한 비행기 있잖아. 일루신86인가 하는 그거, 아마 이게 그 기종일걸?’이라며 말을 보탠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해 페테르부르그에 도착하기까지, 악몽의 25시간은 그렇게 전개됐다. 시골 기차역 대합실을 연상시키는 곳에서 1시간여의 입국절차를 밟고 로비를 빠져나와 이르쿠츠크 공항 활주로 쪽으로 나왔을 때는, 답답한 기내에 갇혀있다가 모처럼 탁 트인 곳으로 풀려났기 때문에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항공사측이 제공하는 호텔로 이동한다’는 안내원의 말이 ‘호텔에서 이 인원을 다 수용하지 못하므로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항 청사 대기실에서 1박한다’는 말로 바뀌면서 비행일정에 전혀 없었던 고문(?)이 시작됐다(이 지면을 빌어 풀코버항공이 제공한 ‘체험, 고통의 현장’이라는 참신한 이벤트에 감사해야 할까). 난민 수용소가 따로 없었다. 모포 한 장 없이 딱딱한 의자에 쪼그리고 앉거나 맨 바닥에 외투 따위를 깔고 누워 새우잠을 청하면서도 항공사측의 공식적인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 그 밤에 제공한 빵과 음료수 정도가 최선의 사과라고 생각한 것일까. 모르겠다. 그나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은 호텔에서 재운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른 아침에 돌아온 남치형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의자 두 개를 붙여서 잘 수만 있다면 여기가 천국. 호텔이라는 그곳은 사람이 잘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불평이 러시아의 척박한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온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확하게 인천공항 출발 25시간 뒤(이르쿠츠크에서 13시간 지체) 페테르부르그 공항에 도착한 직후였다. 공항에는, 친절하게도 러시아바둑협회 관계자 세 분이 승용차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일행은 제각기 언어능력대로(러시아어나 영어로), 나 같이 이도 저도 안되는 사람은 바디랭귀지를 섞어서, 제법 다정한 척(?) 인사를 건넨 뒤 각각 세 대의 승용차에 나누어 탔는데 그 순간, 우리는 말을 못하고 서로 얼굴만 마주보았다.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일찍이 이런 차를 타본 적이 없다. 아니, 타본 적은 없지만 이따금씩 동네 골목 후미진 곳에 누군가 버리고 간, 꼭 이렇게 생긴 차를 본 적은 있다. 그렇다. ‘야~ 정말 본받아야 할 근검, 절약이구먼’이라고 말은 했지만 우리가 탄 차는 한국이라면 폐차장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그런, 고물이었다. 바퀴를 굴리는 게 신통하다고 할 만큼 상처투성이였던 이 녀석은 까르륵, 까르륵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면서도 우리들을 목적지 레닌그라드대학 캠퍼스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비록, 중간에 컥컥거리며 도로변에 멈춰서서 일행을 긴장시키기는 했지만). 페테르부르그의 첫인상은 맑은 하늘과 공기, 눈이 닿는 곳마다 푸른 숲과 탁 트인 벌판이 어우러진 자연으로부터 오는 쾌적함이었으나 곧 그보다 더 진하게 다가온 느낌은 심각한 물자부족과, 인간의 적응력에 관한 경이(驚異)였다. 짧은 시간 동안 내가 확실하게 느낀 것 하나는, 이곳 사람들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문제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다 받아들이고 적응한다’는 것이다. 차가 달리다가 갑자기 도로 한복판에 멈춰서도 당황하지 않았고(늘 그렇다는 것처럼) 낡은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가까운 대학호텔 종업원은, 화장실에 화장지가 떨어졌다고 말하면 태연하게 절반쯤 사용하던 화장지를 주는가 하면 침대 시트를 한쪽밖에(둘이 사용한 투윈룸) 갈아주지 않는다. 나머지도 갈아달라고 하니까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시트가 없어서 갈아줄 수 없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쪽이라도 갈아준 것을 고마워해야 할 처지였다(그나마 안 갈아주어도 될 것을 순전히 호의로 갈아준 것이니까). 이쯤되면 이르쿠츠크에서의 사고 역시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사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하나, 학술대회를 포함한 바둑축제에 다녀왔으면 그 내용이나 전해줄 일이지 러시아 주거환경이나 물자부족, 이곳 사람들의 성향에 관해서 이렇게 시시콜콜히 떠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문을 가지실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떨까. 나의 짧은 견해로는 1인당 GNP가 우리의 1/4밖에 안되는 이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심각한 물자부족 상태의 척박한 생활을 견뎌온(그것도 아주 낙천적으로) 힘이, 바둑을 즐기는 방법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아울러, 이들이 동양으로부터 받아들인 바둑을 짧은 시간동안 어떻게 수준 높은 축제문화로 만들어왔는지 또 그 안에서, 오랜 세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대회 중심으로 형성돼온 우리의 바둑문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새삼 되짚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착 첫날 여장을 풀자마자 달려간 대회장에서 젖먹이를 안고 바둑을 두는 젊은 여자를 보았을 때 섬광처럼 뇌리에 꽂힌 이 생각은(충격이었다), 마지막 날 1,000km도 넘는 머나먼 길을, 기차를 타고 또는 걷고 또 걸어서 이 바둑축제에 왔다는 세르게이 씨를 만났을 때 하나의 화석이 돼버렸다. 내가 알고 기꺼워하는 바둑은, 이기고 지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는 한국의 바둑대회에서도 젖먹이를 안고 바둑돌을 놓는 젊은 여자를 볼 수 있을까. 나는 입상가능성이 전혀 없으면서도 저 먼 땅끝마을까지 순수하게 바둑을 즐기러 갈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하나도 자신이 없었다(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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