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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戀歌1
16인의 프로, 月岳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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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린다. 반쯤 감긴 눈으로 더듬더듬 전화기를 찾아 수화기를 들어올리니 실로폰처럼 높낮이가 똑똑 떨어지는 낯익은 경상도 억양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선다. “손형이에요? 임선근입니다.” 경쾌한 울림 때문일까. 속눈썹에 완강하게 매달리던 졸음이 제풀에 툭, 떨어져나간다. “해설, 아직 괜찮아요?” “네, 다음주 분까지 써서 신문사에 보냈는데요.” “그래요? 그럼, 별 약속 없으면 산이나 갑시다. 오늘 월악산에 가는데…” “저야 좋지만 지금 일어나서 씻고 배낭 챙기려면…” “아, 그건 괜찮아요. 오후 2시 반까지 강남고속터미널로 오면 되니까 시간은 충분해요.” 1박 2일의 월악산(月岳山) 산행은 이렇게 예정도 없이 시작됐다. 프로기사 등산모임의 총무 박병규 3단에게 전화를 걸어 추가예매를 부탁한 뒤 부랴부랴 씻고 배낭을 챙겨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런, 너무 서둘렀나? 약속시간 40분 전. 뭐, 그럼 더 좋지. 모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지하서점에 들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두께도 내용도 가쁜해서 좋은 시집 한 권을 샀다. 그래도 남은 시간은….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점심을 못 먹었네? 순두부찌개로 포만감을 확인하고 어슬렁어슬렁 매표소 앞으로 가니 꽤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희(古稀)를 3년 앞둔 원로 최창원 6단과 창작사활의 대가 김수장 9단, 그리고 젊은 프로기사 10여 명. 어느새 신예들의 두목쯤(?)이 돼버린 ‘LG정유배의 사나이’ 최명훈 8단과 속눈썹이 긴 꽃미남 조한승 6단, 송아지 삼총사 최철한 5단, 원성진 4단, 박영훈 4단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옆에 만능스포츠맨 한종진 4단, 시원시원한 성격의 호남아 이현욱 5단, 제5기 신예프로10걸전 우승자 강지성 5단, 중국리그 원년에 한국신예의 매운 맛을 보여주었던 박승철 3단, ‘신이 내린 완벽한 몸매(정말, 맞아?)’라는 홍민표 3단도 보인다. 서글서글한 성실맨 박병규 3단은 회비 걷으랴, 표 챙기랴 정신이 없다. 소풍열차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조금 들뜬 마음으로 매표소 앞 광장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서 한 꼬마 녀석이 주르륵 미끄러져오다가 두 팔을 벌리며 멋지게 선회한다. 롤러스케이트도 아니고 인라인도 아닌데 뭐지? 유심히 보니까 운동화 바닥 끝부분에 홈을 파고 그 안에 바퀴를 부착해놓았다. 아하,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폭발이라는 휠리스 운동화로군. 사람들은 둥근 것을 보면 다 굴리고 싶어지는 것일까. 어른들도 그런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둥근 것은 모두 아름답다. 우리가 사는 지구도 둥글고 황동규 시인이 굴리고 싶어했던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 마차(아직도 마차가 있을까?), 자동차 바퀴’도 둥글고 ‘노점에 쌓여있는 귤,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도 둥글고 손에손잡고 돌아가는 강강수월래도 둥글고 아이들의 까아만 눈동자도 둥글고 깊은 산 이름모를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도 둥글다. 아, 그러고 보니 바둑돌도 둥글구나. 둥근 생각을 즐기는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사람은 열일곱인데 표는 16장. 표를 예매하면서 대충 머릿속 계산만 믿었던 게 실수였다. 부랴부랴 매표소로 달려갔지만 이미 매진(이런, 소풍 떠난 아기돼지들의 우화가 생각나는군･･･). 어떻게 할까. 이럴 땐 제일 큰 어른이 나서는 법. 결국, 최창원 6단과 임선근 9단이 버스 기사에게 사정을 밝히고 1인 추가 승차를 허락받았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훌쩍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즐겁다. 충주터미널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 프로들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프로도 승부무대를 떠나면 보통 사람이다. 40고개를 넘어선 선배그룹은 몇 마디 주고받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잠의 나라로 떠났고 젊고, 어린 친구들은 가져온 만화를 보거나 서넛씩 짝을 지어 가벼운 카드게임을 한다. 만화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히카루의 바둑’(국내에서는 ‘고스트바둑왕’으로 출간된 베스트셀러)과 임재원의 ‘짱’(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학원액션물). 오후 4시 38분 충주터미널 도착. 일행은 간발의 차이로 월악산 덕주사행 246번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터미널 앞 버스정류장에서 약 40분간 발이 묶였다. 자연스럽게 선 후배그룹으로 갈려 자리를 잡았는데 기다리기가 지루했던지 최창원 6단이 배낭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병 하나를 꺼낸다. “이거, 집에서 담근 건데 맛 좀 볼래?” 뚜껑을 열기도 전에 짙은 솔향이 진동하는 반투명 흑갈색의 일품 솔잎주. 약을 맛보듯 소주잔 절반 크기의 스텐잔으로 한잔을 받았는데 알콜의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입안 가득 차오른 향이 머릿속으로 싸아한 솔바람을 불어넣는다. “어, 이거 완전히 한약이네요?” “괜찮은데요?” “솔향이 정말 좋네요.” 김수장, 임선근 9단도 이구동성으로 호평하자 원로께선 흥이 나신 듯 비슷한 크기의 병 하나를 더 꺼낸다. “하나 더 있어. 이것도 집에서 담근 매실준데, 먹어볼래?” “어? 저도 매실주 가져왔는데요.” 이번에는 김수장 9단이 배낭을 열어 자그마한 술병 하나를 보여준다. 모두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하아, 이거 오늘 저녁 주유소(酒有所) 찾으며 헤멜 일은 없겠군. 행복이란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일상의 사소한 기쁨과 자족의 공감, 그런 것들의 집합체가 행복이 아닐지... 5시 20분. 기다리던 246번 버스가 왔다. 시내를 빠져나와 차창 양 옆으로 푸른 산등성이가 이어지면서 모두들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게 맑아진다. 만물을 포용하는 푸른 자연의 힘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문득, 임선근 9단이 묻는다. “손형, 혹시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말 들어봤어요? 제주에 갔을 때 서예하시는 분께서 주신 글인데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서... 연꽃을 표현한 거라고 말씀하시던데...” “글쎄요, 저도 한자(漢字)는 약해서... 직역하면 ‘향기는 멀수록 맑다’는 뜻인데, 출전은 저도 모르겠고 음, 군자를 은유한 표현 같은데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찾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앎의 기회는 빨리 왔다. 며칠 뒤 한국기원 하훈희 차장이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수필중의 문구라고 가르쳐준 것. 하차장은 중국문학에 애정이 깊은 중국통이다. 뒤에 인터넷 검색사이트에서 자세히 찾아본 결과, 남송(南宋)의 학자 주돈이(자는 무숙, 염계선생으로도 불림)가 연꽃의 미덕을 군자와 비유해서 찬양한 수필 ‘애련설’의 한 문구였다. 오후 6시 30분. 월악산 기슭 덕주골에 도착. 우리 일행은 임선근 9단이 답사한 ‘아란야’라는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아란야’가 무슨 뜻일까. 지적 호기심이 강한 김수장 9단이 ‘산스크리트어 같은데?’라며 주인에게 물었더니 과연,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고대 인도의 표준문장어)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고. 뒤에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니 아란야(阿蘭若)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줄여서 란야(蘭若)라고도 하며 ‘마을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깔끔하고 아담하게 지어진 이층집의 구조도, 저렴한 숙박료도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마음이 끌린 것은 2층 객실에 붙여진 각각의 이름 ‘산’, ‘들’, ‘바람’, ‘구름’이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조용한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산, 들, 바람, 구름의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그런 뜻일까. 문득, 이마를 스쳐가는 저녁바람이 청량하다. 오후 7시 30분으로 예정했다가 8시쯤으로 밀린 저녁식사는 예상외의 만찬. 인심 좋은 주인내외는 새로 밥을 짓고 닭도리탕과 백숙, 갖은 산채에 닭죽까지, 일행이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며 도리질을 칠 때까지 끊임없이 식탁을 채워주었다. 안주가 이리 풍성한데 어찌 술이 빠질까. ‘아란야’의 특주를 맛보는 것으로 시작된 마법의 향연은 최창원 6단이 가져온 솔잎주와 매실주는 물론, 김수장 9단의 매실주까지 바닥이 나서야 끝이 났다. 식사를 마친 후 젊고 어린 프로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 아래 동네로 산책을 겸한 마실을 가고, 남겨진 네 사람은 휘적휘적 한가한 걸음으로 산허리에 앉은 덕주사까지 산책을 나섰다. 민가의 불빛이 끊긴 숲길로 들어서니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질 듯 눈에 부시다. 도도한 주흥에 겨워 주선(酒仙)이 돼버린 최창원 6단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산책길에 동행한 사람은 셋뿐이지만 한 뼘 위로 다가선 밤하늘에 그보다 훨씬 많은 청중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여준다. ‘백치 아다다’ 그 다음이 ‘그리운 금강산’이었던가. 멋쩍어하다가 따라 부르던 임선근 9단도 최창원 6단의 청에 못이기는 척 한 곡 뽑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나알리드라～ 오늘도...” 아아, 봄날은, 봄밤은 이렇게 간다. 밤바람을 타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 마음 깊은 곳으로 낮에 읽은 시 한편이 유성처럼 떨어져내린다. 계곡의 물소리에 실린 바람이 잠든 이슬을 깨우는 밤 어둠 속에 벌거벗은 나무들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쳐다보면 유성이 사랑에 밑줄 그으며 사라져간다 - 김동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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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수
취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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