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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혁, 먹구름 속에서 건져올린 한줄기 인내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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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9일 비 내리는 오후, 하늘은 어둡고 대기는 차갑다. 가늘게 흩뿌려지던 빗줄기가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한 초저녁 6시. 홍익동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토요일, 그것도 궂은 날 오후에 무슨 일로? 물론,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빅쇼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KT배 마스터즈 프로기전은 LG정유배와 함께 국내 최고 상금을 자랑하는 양대기전. 특히, 이번 결승3번기는 상금 이외에 유창혁-이세돌이라는 당대 최고스타들의 격돌이라는 점에서 흥행이 확실하게 보장된 블록버스터급 승부다. 게다가 덤으로 2층에서 진행중인 일반인 입단대회를 구경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2층 대회장에서 일반인 입단대회를 지켜보다가 결승2국 개시 10분전쯤 1층 바둑TV 스튜디오로 내려가 대기실에 들어서니 입회인 서능욱 9단과 이세돌 6단이 앉아 있다가 웃으며 목례한다. 5분전쯤 유창혁 9단이 대기실로 들어섰고 뒤이어 관전필자 문용직 5단도 입장. 파티복을 연상시키는 짙은 가지색 상의에 흰 와이셔츠를 깔끔하게 받쳐입은 유창혁 9단은 결승1국 때보다 더 담담한 표정인데 바람 한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한 얼굴에서 오히려 더 결연한 승부의 의지가 읽혀진다는 게 신기하다. 4월 5일 결승1국이 끝난 저녁자리에서 '좀 춥다'고 했던 이세돌 6단은 검정에 가까운 감회색 정장에 엷은 푸른빛이 도는 와이셔츠차림. 신기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저렇게 천진한 표정 속에 그토록 예리한 칼을 담아둘 수 있을까. 유창혁 9단과는 달리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자주 얼굴 위로 떠올린다. 결승1국의 완승으로 얻어진 자신감이 결승2국의 낙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계자의 신호에 맞춰 유창혁 9단이 먼저 스튜디오에 입장해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이세돌 6단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서 마주 앉는다. 결승1국에서 유창혁 9단이 흑을 쥐었으니까 이번에는 이세돌 6단이 흑을 쥘 차례. 입회인 서능욱 9단의 나직한 대국 개시 선언에 맞춰 결승2국이 시작됐다. 제한시간 20분짜리 속기전인 탓도 있겠지만 두 기사 모두 속기성향이 강한 감각파답게 빠른 속도로 초반을 아로새긴다. 흑1, 3의 대각선 화점에 백은 대각선 화점·소목포진으로 대치. 좌변 흑17의 날일자 씌움을 본 유창혁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 하나가 떠오른다. 평소에 자신이 즐겨 구사하는 수법이었기 때문일까. 흔히, 유창혁을 '세계최고의 공격수'라고 하는데 동료기사들은 이 표현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유창혁이 좋아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두터움'이다. 공격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따라서 흑17에, 좁지만 웅크려 참아둔 백18이 유창혁다운 수라고 할 수 있겠다. 유창혁은 초반에 쌓은 두터움을 종반에 집으로 바꿔나가는 능력이 탁월한 기사다. 그의 공격은, 살상(殺傷)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두터움을 집으로 바꿔나가는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이세돌은 전형적인 '선실리 후타개'의 스타일이다. 유창혁의 공격이 두터움을 집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세돌의 공격은 일찌감치 실리를 벌어들이고 나중에 엷은 모양을 타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선제공격보다는 받아치기를 좋아하는 크로스카운터형이라는 것이고 또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점을 찾는다면 이세돌 쪽이 좀더 적극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기풍을 두고 '상대를 긁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창혁 9단이 백18로 좌변을 지켰을 때 우상귀 백 한점을 잡아두지 않고 좌상귀 쪽을 견고하게 지킨 흑19는, 속도전을 즐기는 이세돌로서는 뜻밖의 한수였다. 당연히 검토실의 예상도 빗나갔다. 아니, 어쩌면 백20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해 크게 공격하겠다는 것이 더 이세돌다운 것인지도 모른다.흑27까지 평범하게 일단락하는가 싶었는데 좌상귀 백28을 받아주지 않고 도발적으로 붙여간 흑29로부터 격렬한 박투(搏鬪)가 시작했다. 쌍방 한 호흡의 여유도 허용치 않는 이 몸싸움은 타들어가는 도화선처럼 걷잡을 수 없이 이어졌고, 관전자들의 뇌리에 우상귀의 처절한 육박전으로 막을 내린 결승1국을 떠올리게 했다. 흑41까지의 외줄타기를 마치고 흑45, 47을 선수한 다음 흑53까지 논스톱으로 이어진 이세돌의 수읽기는 무섭도록 정확했다. 백54에 벼락같이 붙여간 흑55에 유창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흑55면 백A의 단수는 거의 관성의 법칙 중 운동관성에 해당하는 수. 운동하던 물체는 직선 방향으로 운동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운행 중이던 버스가 장애물을 발견하고 급제동하면, 사람들이 앞으로 넘어지려 하거나 달려가던 사람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유창혁은 그런 곳에서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백56. 어두운 죽음의 그물이 펼쳐지고 백이 곤란해지는가 싶은 순간, 이세돌의 계산에 없는 단 하나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흑55가 천지를 뒤덮으려는 먹구름 같은 야심이었다면 백56은 그 먹구름을 뚫고 솟구친 한줄기 빛과 같은 인내였다. 초점을 맞추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둑판을 쏘아보던 유창혁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허점을 찔린 이세돌의 두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상, 결승2국의 운명이 결정된 장면이다. 만일, 유창혁이 흑55의 도발에 발끈해서 백A로 몰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흑B로 이어져 있으면 백60은 선수가 되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후수로 연결하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백은 그냥 중앙으로 달아나야 하는데 흑은 언제든 C로 끼워 상변 백 다섯점을 잡는 수가 남아 중앙전에 대한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선수로 연결해간 실전과는 그야말로 천지차이. 이세돌은 형세의 유불리에 대한 판단보다, 백56을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더 빨리 무너졌는데 그 무너지는 과정이 지극히 이세돌다웠다. 우하귀까지 아낌없이 버리는 대사석작전을 결행하면서 하변 대제국 건설에 승부를 거는, 한 편의 서부활극 같은 드라마를 보여준 것이다. 한때, 검토실의 서능욱 9단, 문용직 5단, 바둑TV의 KT배 전속해설위원 양재호 9단까지 한목소리로 '흑의 대역전'을 진단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이세돌은 '우변 접전 이후 마지막까지 내가 좋았던 적은 없다'며 완패를 시인했다. 국후검토는 우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백56으로 그냥 잇는 수가 있다면 흑55로는 C의 곳에 끼워 백 다섯점을 잡는 정도일 것'이라는 게 두 기사의 일치된 견해. 검토시간이 결승1국보다 훨씬 짧았던 것은 우변 착각의 대미지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통쾌한 반격의 1승으로 결승1국의 패배를 만회한 유창혁은 처음처럼 담담한 얼굴로 잠깐 대기실에 앉았다가 '먼저 가보겠다'며 총총히 사라졌고 패배의 무게에 눌려 훌쩍 사라질 줄 알았던 이세돌은 뜻밖의 밝은 표정으로 대기실로 들어섰다. '별 약속 없으면 저녁이나 함께 하고 가라'는 선배기사들의 말에 웃으면서 툭 던진 '사주실 거죠?'라는 반문 어디에도 패배의 아픔은 실려있지 않았다. '지는 게 괴로워서 이긴다'는 승자의 변(辯)을 들은 게 불과 보름 전. 어느 사이 아픔을 웃음으로 감출 수 있는 연륜이라도 쌓인 것일까. 천재들의 시간은 언제나 빠른가…. 마지막으로 유쾌한 사건(?) 하나. 호방한 서능욱 9단의 주최로 단체회식이 돼버린 저녁자리에서 이세돌은 적지 않은 술을 마셨는데(위로주라고 바둑TV 관계자들까지 한잔씩 돌리는 데야 받지 않을 재간이 없다) 저녁자리가 파하고 자칭 '단골집'이라는 퓨전소주방에서 2차까지 잘 마쳤으나 결국, 비 내리는 왕십리역 앞에서 채 삭이지 못한 패배의 아픔을 고스란히 토해냈다. 아아, 그랬구나. 아파도 웃을 수는 있지만 다 날려버릴 수는 없었던 거구나. 스스로 몸이 상하도록 술을 권한 죄를 묻기에 앞서 이 매력적인 천재가 승부의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기쁜 밤이었다(늦은 밤 급작스런 호출에 놀라 부랴부랴 달려온 가족들에게 사과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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