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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빈 바둑판을 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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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의 붉은 열망도 퇴색하고 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거리마다 황금빛 카펫이 깔리고 어느새 한 해의 마감. 달력의 마지막 남은 한 장을 바라보며 '세월은 쏜살과 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승부를 끝내고 돌을 모두 거둬들인 바둑판은, 추수를 마친 빈 들판과 같습니다. 그 모습은 시작할 때와 꼭 같이 아무 것도 없는 '비어 있음[空]'의 상태입니다만 승부 뒤의 이 비어 있음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상태는 결코 아닙니다. 빈 들판이 한 해의 햇살과 비와 바람을 추억하듯이 빈 바둑판도 놓여진 돌 하나, 하나의 의미를 추억하며 또 그것은 한 장의 기보(棋譜)로 남겨져 많은 바둑 애호가들의 양식이 됩니다. 묵은 신문을 뒤적거리다, 호텔리어로 변신한 두 발레리나가 입사소감을 묻는 말에 '호텔 업무가, 여러 명이 함께 공연하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발레와 성격이 비슷한 것 같아요. 지금도 무대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호텔 손님들이 관객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요'라고 대답한 기사를 보고 슬며시 웃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전혀 다른 직업 속에서 유사한 게임의 법칙을 찾아낸 몰입의 순수성에 대한 호감이며 또 하나는 '여럿이 함께 하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는 것'이 어찌 그 둘뿐이겠냐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그 내면의 세계를 볼 때 서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판의 바둑을 기업의 성장구조와 비교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君看白日馳 何異弦上箭 당대(唐代)의 문인 이익(李益)의 시 중 한 구절인데, 일본에서 활약중인 프로기사 조치훈 9단이 1993년 본인방(本因坊·일본 3대타이틀) 5연패 기념식에서 하객들에게 나누어준 부채에 실었던 휘호(揮毫)이기도 합니다. 의역하면 '흐르는 시간은 막 쏘아지려는 화살과 같다'는 뜻. 아마도 타이틀 5연패와 기사생애의 반환점에 선 소회(所懷)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해의 마감을 앞둔 감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제는 숨가쁘게 달려온 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또 어떨까요. 승부에서는 승리가 최고의 미덕이고 기업의 목표는 이윤의 극대화입니다만 그 모두에 앞서는 것은 언제나 처음, 시작했던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추수를 마친 빈 들판과 승부를 끝낸 빈 바둑판. 다시 그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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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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