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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復棋)에서 배우는 경영교훈 - 바둑과 경영 (6)
<제6강>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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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고, 이 가운데 월간『바둑』의 요청으로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바둑과 경영’이란 큰 카테고리로 묶은 글이기는 하나 내용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이창호 같은 세계적인 기사들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와 바둑동네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바둑 속에 들어 있는 경영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나름 읽는 맛이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내용일지언정 이 연재를 통해 바둑사를 반추하면서 긴 설연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10편을 골라 명절연휴 기간 연재합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사이버오로 임직원 일동 배례(拜禮). ○● 설특집/ 바둑과 경영 (1)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2)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치훈 九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3)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4) ‘오뚝이’ 서봉수 九단의 도전정신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5) 영원한 일등은 없다! 한국바둑, 어떻게 세계최강이 되었나? ☜ 클릭 ![]() <제6강>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복기(復棋)에서 배우는 경영교훈 한번 살면 그만인 인생과 달리 바둑은 다시 둘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은 졌어도 패인을 분석하고 모자란 점을 보완해 내일 이길 수 있는 게 바둑의 승부지요. 기업의 경영도 그렇습니다. 망했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사례가 허다합니다. 이는 유독 패자에게만 유용한 교훈이 아니지요. 승자일수록, 잘 나가는 기업일수록 과거를 분석하고 현재를 체크하며 미래의 실력을 다지는 프로세스가 필요합니다. 바로 바둑의 복기(復棋)가 이 같은 행위입니다. 복기란, 자기가 둔 바둑이나 또는 다른 사람이 둔 바둑을 다시 놓아보며 잘못 둔 수를 찾아 분석하고 최선의 수를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보다 훌륭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여타 스포츠나 게임에서는 경기가 끝나면 인사하고 뒤돌아서 경기장을 떠나지만 바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둑 한판을 끝낸 다음 두 대국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패인과 승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방금 전까지 혈투를 벌인 경쟁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털어놓곤 하는데, 이것이 바둑승부의 관례이자 예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되짚어가며, 혹은 명암이 갈렸던 승부처를 두고 집중 분석하는 과정에서 패자는 패자대로 승자는 승자대로 반성을 하고 교훈을 얻음으로써 진일보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복기는 꼭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혼자 기보(棋譜)를 놓아보며, 혹은 여럿이 모여 공동연구를 하기도 합니다. 조훈현-이창호 사제의 수업방식에서 보듯 복기는 훌륭한 교습법이기도 하답니다. 조훈현 九단이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은 2~3일에 한번씩 이창호가 둔 바둑을 복기해 주는 식이었습니다. 직접 두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스승 앞에서 제자가 자기가 둔 바둑을 복기하면 중요한 대목에서 스승이 지적하고 의견을 묻는 식이었지요. ![]() ▲ 프로기사들은 전력을 다해 상대와 겨루지만 승부가 끝난 뒤에는 자리를 뜨지 않고 패인과 승인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다음을 기약한다. 이러한 복기는 새벽까지 이어질 때도 있다.
“같은 것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복기란 이처럼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수단입니다. 동시에 복기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지략과 테크닉, 판단을 참조한다는 면에서 벤치마킹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단순한 모방을 우리는 벤치마킹이라 하지 않습니다. 모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기만의 색깔을 입히고 창조할 때 진정한 가치가 있지요. 나가모리 일본전산 사장은 “다른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은 경영이 아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만약 이창호가 조훈현 九단의 집에서 배우며 스승의 기풍을 답습하는 데 그쳤다면 결코 바둑사에 전설로 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국바둑 일인자의 계보는 홀쭉이와 뚱뚱이가 번갈아가며 반복한 역사”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온 일인자 계보가 우연히도 홀쭉이 체형(조남철, 조훈현, 이세돌)과 뚱뚱이 체형(김인, 이창호)이 순차적으로 교체를 이룬 데서 나온 말입니다만, 웃고 지나치기에는 이 말 속에 “같은 것으로는 이기지 못한다”는 교훈이 서려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홀쭉이 체형들이 대체적으로 빠른 창을 연상시키는 전투형에 실리파였다면 뚱뚱이 체형들은 두터움을 중시하는 방패형 스타일이었지요. ‘범재가 천재를 이겼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 몽고메리가 ‘사막의 여우’ 롬멜에게 거듭 고전하다 엘 알라매인에서 결정타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어딜 가든 롬멜이 쓴 책을 들고다닐 정도로 적장의 승부 스타일과 전략을 치밀하게 복기하고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기발하고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사하는 롬멜의 스타일에 맞선 몽고메리의 전략은 상대의 병참 보급로를 끊으며 옥죄는 착실한 수성전법이었습니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미 남이 한 것, 남이 앞서가고 있는 걸 그대로 따라가기만 해서는 일등으로 올라서기 힘들겠지요.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아는 ‘복기의 자세, 복기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 ▲ 대국이 끝난 뒤 반드시 바둑판에 다시 둔 수를 놓아가며 복기하지 않고 이처럼 기록자에게 기보를 요구해 승부처를 되짚어보고 말로써 간단히 의견을 교환하는 경우도 있다. 사제대결에서 스승 조훈현 九단이 제자 앞에서 종종 보인 국후 복기 풍경이었다. 사진은 제29기 최고위전 도전1국(1989.12.09) 종국 직후 장면.
모방과 벤치마킹은 다르다. 복기는 벤치마킹의 표본 조치훈 九단의 라이벌로 유명한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九단은 바둑을 둘 때 한가지 특이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는데요, 대국 중 슬며시 일어나 상대방의 등 뒤로 가서 바둑판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내 시각에서 벗어나 상대의 입장에서 국면을 형세판단해 보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한 선배기사에게 “자네는 밥을 먹을 때도 남의 자리에서 먹나?”라는 면박을 당한 뒤부터는 기록자에게 그때까지 바둑을 기록한 기보를 전달받아 이를 거꾸로 뒤집어보는 행태로 대신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함으로써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실수를 줄이겠다는 발상입니다. 이 역지사지의 절실함과 아전인수에 대한 반성을 가장 절절히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 복기타임이기도 합니다. 이베이의 창업자인 피에르 오미디 야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늘 남이 내게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고, 반대의견을 내세운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견을 정당화해 보라고 한다. 나의 모든 학습과정은 이렇게 진행된다.” 또 알프레드 슬로언 2세가 GM의 회장이었을 때, 그는 의사결정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경우 그만큼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경계하고 그럴 경우 회의를 연기했다고 합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수읽기를 함으로써 최고경영자가 자칫 빠질 수 있는 아전인수, 견강부회(牽強附會)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대목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를 쓴 로저 마틴 교수는 창조적 사상가의 특징으로 “단순히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양극단의 아이디어보다 나은 제3의 종합안을 생각하는 것"을 꼽고 있습니다. 대국을 마친 후 두 대국자의 상반된 생각을 서로 나누며 제3의 최상의 수를 찾는 복기의 과정이 그렇습니다. 승부에서 체면은 개나 줘버려라! ‘순국산 된장바둑’으로 불리는 서봉수 九단이 비록 숙적 조훈현과는 복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도 자신의 숙적이 키운 제자 이창호나 여타 후학에겐 자존심을 접고 한수라도 더 배우려 애썼고, 그러한 공부로 이후 결실을 얻은 사실은 유명합니다. ‘다음 판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자존심은 일시 접어둘 줄 알아야 승부사다!’ 조훈현-서봉수 양웅은 어느 순간 서로의 자존심이 발동하면서 복기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도전기 때 점심상에서조차 서로 빗겨 앉을 정도로 의식했지만, 서봉수 九단은 이창호를 연구하기 위해 ‘사제(師弟) 대결’이 벌어지는 날이면 어김없이 한국기원 기사실로 출근했습니다. 조훈현-이창호 사제 대국이 끝나면 슬그머니 대국장에 들어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복기를 지켜보다 간혹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체면이나 자존심은 더 강해진 다음에 내세워도 충분하니 끝없이 물어보고 또 물어보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1990년 2회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에서 이창호를 만났을 때는 그때까지 거듭하던 연전연패에서 벗어나 3대1로 이겨 우승합니다. ![]() ![]() ▲ 예상을 뒤엎은 결과! 1990년 제2기 동양증권배에서 난적 이창호 四단(당시 15세)을 꺾고 우승했다. 그때까지 서봉수 九단에게 이창호는 필생의 숙적 조훈현보다 더 넘기 힘든 소년 장사였다.
이틀에 걸쳐 둔 바둑(도전기)으로 파김치가 된 몸이지만 승부를 떠나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상대와 수없이 의견을 주고받다 새벽녘에야 자리를 뜨곤 했던 일본기사들의 얘기도 그러합니다. 프로기사들에게는, 이러한 복기 행위가 이미 끝난 바둑에 대한 아쉬움에서가 아니라 승부를 마친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또다른 미래의 승부를 준비하는 시작점이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수를 치밀하고 냉철하게 읽고 정확한 판단 아래 확신에 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승부사나 경영자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보면, 어떻습니까? 경영이 어려움에 직면하거나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할 때 권하고 싶은 좌우명이 있습니다. 不將不逆應而不藏 (부장불역응이부장)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말고, 과거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며, 현재의 상황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자’는,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입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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