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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직인(職人)을 만나다
바둑판 공장, 생생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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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없어진 것들이 참 많다. 내 주변의 것들만 생각해 보아도 일단 신문지가 사라졌고, 편지지와 봉투가 사라졌고, 최근엔 유선 전화기도 사라졌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 덕분에 바둑판 역시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 중 하나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바둑만화 “고스트 바둑왕”의 첫 장면은 주인공 히카루가 할아버지의 다락에서 오래된 바둑판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의 기사 ‘사이’의 영혼이 깃든 이 바둑판을 통해 히카루의 인생이 바뀐다는 이 설정은 기사에게 바둑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얼마 전 타계한 후지사와 슈코 9단도 바둑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바둑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바둑은 두뇌게임이므로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와 같이 굳이 좋은 ‘연장’을 써야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비싼 골프채나 전신 수영복은 그 값을 한다고 여겨도 바둑판이야 종이에 그리던 모니터에 띄우던 바둑만 잘 두면 그만이라는 우리나라의 분위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몰라도, 일본이 자랑하는 1억 원이 넘는 비자 바둑판이나 수천만 원 하는 히우가(日向)의 조개알도 그저 의미 없는 사치품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요리를 못하는 주부도 멋진 부엌을 가지면 괜히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아마추어에게 장비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새 드라이버를 구입하거나 비싼 감상용 스피커를 구입할 때 그 물건의 가치가 100% 성능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프로들에게, 장비는 조금이라도 기량을 더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야말로 ‘연장’에 그치지만, 아마추어에게는 오히려 기술적인 것이기보다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주는 분위기 메이커가 아닐까. 바둑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 좋은 바둑판에서 둔다고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겠지만, 바둑을 대하는 자세, 마음가짐, 집중력 등은 어떤 바둑판을 앞에 두느냐에 따라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과연 좋은 바둑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조건 비싸다고 좋은 것은 아닐 테고… 오사카 바둑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리노(森野) 9단이 계시니 뭐, 걱정할 것은 없다. 너무 신세를 많이 지고 있어 죄송하기는 했지만 염치불구하고 가까운 곳에 바둑판 만드는 장인이나 공장이 있으면 견학하고 싶다는 부탁을 드렸다. 물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약속을 잡아 주신단다. 자 그럼 내가 할 일은? 견학 전에 미리 예습하기. 일본의 바둑판에 대해 간단히 공부해 보자. 현재 어느 나라에서나 고급 바둑판이라고 하면 판 전체가 통나무로 되어 있고 판 뒷면에 ‘바둑판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홈이 있으며 팔각으로 조각된 다리가 붙어있는 바둑판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일본식의 바둑판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떤 바둑판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마도 테이블 위에 올릴 수 있도록 두께가 조금 얇고 다리가 붙어 있지 않은 바둑판이 대부분일 텐데 이것 역시 일본식으로 보급용으로 개조된 것이다.  ▲바둑판 공장원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통나무 바둑판이 아닌 속이 비어있는 박스 형태의 판에 다리가 붙어 있는 바둑판을 사용했었다. ‘사이’가 활약했다는 헤이안시대에 백제로부터 넘어 온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쇼쇼인(正倉院) 소장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을 생각하면 그 모양이 상상될 것이다. 바둑판의 속이 비어 있었으니 지금의 바둑판처럼 돌을 놓는다고 해도 그 소리는 전혀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바둑판은 안 쪽에 선을 따라 현을 설치해두어 돌을 놓을 때마다 그 현이 울리게 했다고 하니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났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풍류를 알았던 우리 조상님들의 유산은 보존하지 못하고 일본식 바둑판의 가치에 대해 논하려 하니 좀 괴로운 마음이 들지만 어쨌든 좀더 공부해 보자.  ▲비자나무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식 바둑판에는 보급용(저가품)과 소장용(고급품) 두 종류가 있다. 이 중 고급품의 재료로는 역시 비자나무를 최고로 친다. 비자나무는 바둑판 이외에도 목욕통을 만드는데 많이 사용될 정도로 내수성(耐水性)이 좋아 일단 한 번 건조시키면 여름철의 습한 공기에도, 겨울철의 건조한 공기에도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한다. 더욱이, 비자는 봄철과 가을철에 자란 부분의 차이가 거의 없어 목질이 균일하고 탄력이 좋아 바둑돌을 놓을 때에는 부드러운 느낌이 나면서도 후에 돌 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또한 나무 결이 선명하여 보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벌레를 쫓는 향나무로 쓰일 만큼 독특하고 매력적인 향을 가지고 있어 바둑판으로서는 최고의 목재다.  불행히도 이 비자나무는 도쿠가와시대부터 매우 인기가 높아 어린 나무들조차 마구 벌채되는 바람에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미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 때 수령(樹齡) 500-700년짜리 나무를 잘라 한 나무에서 여러 개의 바둑판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150년도 되지 않은 어린(?) 나무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요즘 새로이 제작되는 바둑판은 일본산 비자나무로 만든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미국 알래스카나 캐나다산 신(新)비자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물건에 있어 재료도 중요하지만 아마도 재료의 가치를 최고로 높여주는 것은 장인의 솜씨일 것이다. 그런데 장인으로서는 바둑판만큼 솜씨를 발휘하기 힘든 물건도 그다지 없을 듯싶다. 문외한인 나로서는 도무지 조형미 등을 발휘할 곳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바둑판을 보고 어느 장인이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최고급 바둑판은 선 하나 긋는 데에도 굉장한 아우라(aura)가 있다. 일본도(日本刀)로 선을 긋는 것이 그것인데 칼날에 옻나무 칠을 묻혀 장인이 무사(武士)라도 된 양 멋지게 선을 긋는다. 평범하게 틀을 대고 그은 것과는 선의 날렵함이 다르다고 하는데 아직 그러한 경지까지 이해하는 것은 내게는 좀 무리인 것 같다. 한편 일반인들이 쓰는 저렴한 보급용 바둑판은 도쿠가와시대에는 칠엽수가 많이 쓰였으나, 주로 가구제작에 쓰이는 목재로서 바둑판 제작용으로는 그리 좋지 않아 메이지시대부터는 홋카이도(北海道)산 계수나무가 주로 쓰였다고 한다. 계수나무 바둑판은 표면이 쉬이 검게 변하는 것이 흠이지만 바둑돌을 놓을 때의 촉감이 좋고, 마디가 적은 큰 나무가 많아 낮은 가격에 제작되기 쉬워 당시 바둑의 활황에 일조했다.  그러나 현재는 앞서 말한 신비자가 가장 많이 쓰인다. 색이 하얗고 목질이 좋은 것이 일본산 비자와 비슷한 데다, 일본산 비자가 건조에만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것에 비해 2년 정도만 건조하면 되는 것이 보급용 판을 만드는 데 적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습을 하고 찾아 간 곳은 야마야(やま屋)라는 이름의 바둑판 생산 공장이었다. 오전 10시 30분, 럭비(일본은 럭비도 프로리그가 있다고 한다!)로 유명한 히가시하나조노[東花園- 히가시오사카(東大阪))시에 있다]역에서 모리노 9단과 부인을 만나 다시 택시로 10분쯤 이동한 곳에 위치한 공장은 예상대로(?) 어딘지 목재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주문이 많은지 공장 안은 3-4명의 직인(職人)들이 톱밥을 뒤집어 쓴 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고는 하지만 괜히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조금 걱정이 되려고 하는데 때마침 사장인 오자키(尾崎)씨가 우리를 알아보고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을 포함해 직인이 4명뿐인 작은 공장. 오자키씨는 이곳에서 45년 간 바둑판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45년을 한 길을 걸어왔다면 뭔가 큰 뜻이 있었겠다 싶어 이 일을 선택하게 된 계기를 물었더니 어느 날 우연히 바둑판 만드는 장인인 니시모토(西本)라는 분과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했을 뿐이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밥 벌어먹기 위해서라는 겸손하고도 조금은 무뚝뚝한 답이 돌아 왔다.  바둑인구가 줄고 있어 사업에 지장이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한 때 1200만 명이라던 바둑인구가 2-300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얘기는 듣고 있지만 자신은 오로지 고급품만 만드는 장인과는 달리 팔리는 물건은 뭐든지 다 만들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없다는 대답이다. 게다가 바둑판이 조금 덜 팔려도 쇼기판은 잘 팔리니 괜찮다는 약간은 서운한 이야기까지. 이건 예습한 내용과는 다른데, 라고 실망하려는 순간 오자키씨가 주섬주섬 자신이 만든 바둑판들을 꺼내 들고 온다. 돛을 만들 때 사용하는 튼튼하고 질긴 천을 바둑판의 뒷면에 붙여 만든 접이식 바둑판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값싼 접이식과 달리 경첩이 없어 바둑판이 똑바로 펴지는 것이 장점이다(즉석에서 하나 구입). 같은 아이디어로 두 쪽의 나무 사이에 자석을 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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