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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그 승부의 시간들, 사진 속에서 다시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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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바둑 1호 사진기사로 셔터를 누르던 그 시간이 벌써 아득한 과거가 되었다. 10여 년간 바둑계에 몸담았던 숨결과 고뇌를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갈무리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두 번째 개인 사진전 <승부>의 문을 열게 됐다” 지난 15일부터 서울 종로2가 전시공간 ‘미끌’에서 바둑 사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17일 이곳에서 이시용(59) 기자를 만났다. 오랜 시간 봉인해 두었던 사진들에 둘러싸인 이시용 기자의 눈빛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의 물결이 읽혔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나와 연예, 패션, 음악, 미술 등 여러 분야에서 사진을 찍었지만, 내 사진 인생에서 가장 깊이 각인된 때는 단연코 바둑판 위 고요한 전쟁을 담아낸 시간이었다. 1994년에 바둑계에 들어왔다. 그때는 정말이지 사진 한 장 건지기가 녹록지 않았다. 대국을 시작하고서 딱 10분, 점심 먹고 나서 5분 그러곤 끝나고 나서 복기 사진. 그게 허락된 전부였다. 언제 대국이 끝날지 몰라 온몸이 긴장하고 어깨가 굳은 채로 대기해야 했다. 지금처럼 바로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도 없던 시절,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으며 감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이거 제대로 포착했다’는 느낌이 딱 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그 예감이 맞은 걸 확인했을 땐 전율했다”  ▲ 정미화 여사, 조훈현 9단, 이시용 기자.
 ▲조훈현 9단-정미화 부부 그리고 양상국 9단이 사범으로 있는 초지회 회원들이 함께했다.
 ▲ 서울 종로2가 전시공간 ‘미끌’에서 열리고 있는 이시용 기자의 사진전 <승부>.
 ▲ '감상하시다가 간식도 즐기시라' 사진전 <승부>는 24일까지 종로2가 전시공간 ‘미끌’(Instagram: gallery_aryeon)에서 열린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입장은 무료다.
이번 사진전엔 유독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사진이 많다. 두 사람의 사제 대결은 90년대 한국 바둑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침 사진전이 열리는 시기와 동명의 영화 <승부>의 상영 시기가 겹친다. 영화 승부도 조훈현·이창호 사제 대결을 다뤘다. 이것을 놓고 단순한 우연이라고 했다. 이 기자는 “이번 사진전은 6개월 이전에 결정된 것이다. 개인 재정을 털어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왔다. 첫 사진전이 기사들의 자유분방한 순간을 주제로 삼았다면 이번 사진전에선 승부사들의 고뇌를 다루고 싶어서 ‘승부’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있었는데 영화 승부가 개봉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침 영화 승부에 나오는 인물들의 실제 모델이 담긴 사진을 많은 분들이 즐길 기회가 될 것 같다”고 이 기자는 말했다.  ▲ 제자에게 진 후의 쓰라림. 수북이 쌓인 담배 개비들이 인상 깊다.
 ▲ 쓴 웃음.
  ▲ 조훈현-이창호 사제대결에서 조훈현이 승리를 거둔 순간. 이시용 기자는 “조 국수께서 이렇게 기뻐하는 표정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바둑을 잘 모르지만 영화 승부를 본 시민들이 이곳 사진전을 찾는다면 더 즐거울 것 같다. 바둑계 바깥 사람들에게 바둑 승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종종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무협지의 세계로 비친다고 한다. 강호의 고수들이 정적이 흐르는 바둑판 위에서 무공을 겨룬다. 영화평론가 전찬일 씨는 영화 <승부>를 놓고 “액션이 전혀 없는데도 와호장룡 같은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한 흥분과 감동을 준다”며 완급 조절을 능수능란하게 한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를 높이 산 바 있다. 영화평론가 ‘라이너’ 씨는 “영화 <승부> 속에서 이병헌 배우는, 조훈현 9단과 실제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도 조훈현 9단처럼 보인다”고 했다. 영화평론가 ‘거의없다’ 씨는 바둑판 위의 심리전을 카메라 워크 등으로 효과적으로 시각화하며, 바둑 드라마를 전달하는 데 75% 이상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최광희 씨는 유아인 배우가 이창호 9단 내면의 들끓는 에너지를 미세한 표정 변화로 나타낸 것을 두고 ‘최고의 연기, 그냥 이창호 그 자체’라며 ‘캐릭터를 얼마나 깊이 연구했는지 감탄이 나온다”고 했다.  ▲ 이창호.
영화 승부가 90년대 조-이사제 대결의 영상적 재현이라면, 사진전 승부는 마치 블랙홀을 통과해 사건의 지평선 너머 실제 승부의 현장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이 기자는 “이번 전시에서는 90년대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집중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흔했던, 대국 중 담배 피우는 모습 같은 것도 일부러 살렸다”고 했다. 사진전을 찾은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 여사는 부군이 당시 장미 담배 피우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그 생생함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기자의 주요 활동무대는 현재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그곳 종로의 관철동에 있었다. 모든 게 열악했던 시절이었다. “사무국과 특별대국실이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의 “끝났다”라는 외침이 들리면 계단을 힘껏 뛰어올라갔다. 복기하는 기사들의 표정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 서둘렀다. 한번은 뛰다 넘어져서 팔꿈치가 깨졌다. 진물이 나는데도 카메라를 품에 안고 대국실에 도착해 셔터를 눌러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또 “사람만 바뀌고 매번 비슷해 보이는 구도 속에서 뭘 잡아낼지 궁리하는 건 한편으로는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바둑 사진기자들은 찰나에 사라져 버리는 승부사의 표정과 몸짓을 잡아내기 위해 혼을 담았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힘들기도 했지만 낭만이 있었다”고 이 기자는 회상했다.  -이시용 - 10평 남짓한 방 또각, 째각, 또각, 째각. 흑과 백의 돌들이 차례로 판 위에 내려앉고 계시기가 시간을 자른다. 두 남자는 말이 없다. 침묵이 수를 두고, 시선이 말을 건다. 프로기사들은 바둑한판에 생을 건다. 수읽기는 그들의 인생이고, 착점은 그들의 결단이다. “목숨을 걸고 둔다”던 누군가의 말에 과장은 없었다. 사진 촬영은 철저히 제한된다. 시작 후 10분, 점심 후 5분. 국제대회도 예외는 없다. 이제부터는 기다림과 긴장과의 싸움이다. 카메라를 움켜쥐고, 느린 숨을 쉰다. “끝났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면 나는 뛴다. 텅 빈 바둑판만이 침묵으로 나를 조롱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수문이 열린 댐처럼 허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승부사들의 복기가 열리는 날도 있다. 나의 검지는 쉼 없이 셔터를 누르고, 플래시가 불꽃처럼 터진다. 찰나를 움켜쥐는 것. 그것이 내 일이자 숙명이었다. 그렇게 바둑사진기자로 10여 년을 살았다. 돌이 멈추고, 움직였던 순간들.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얻은 찰나 중에서도 각별히 기억에 남는 사진들이다. 내가 잘라낸 승부의 시간들을 바둑돌 대신 쥐어보시기를 바란다.  ▲ 전시관 한 켠에는 사진이 아닌 고색창연한 초시계가 승부의 숨결을 전한다. 현대식 초시계로 교체되어 버려질 운명이었던 것들을 이 기자가 역사의 파편으로서 소중히 간직해온 것들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조용한 가운데 째각째각 소리가 나는데, 바로 이 여러 개의 옛날 초시계가 틀어져 있어서다. 이 기자는 그 시절 대국실의 현장감을 조금이나마 전하고 싶어서 전시했다고 한다. 김효정 K바둑TV 이사, 목진석 전 한국바둑국가대표팀 감독은 전시관을 둘러본 뒤 “이 초시계 소리 정말 좋다”고 했다.
 ▲ 이세돌 9단(왼쪽)의 어린 시절 대국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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