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유창혁의 '방심과 냉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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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은 어려움이란 도구를 수반하기에 더 매력적이다. 그러면 바둑이 왜 어려운가? 바둑의 어려움은 바둑 수에 대한 이해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고도의 심리전이 따라오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나 아마를 막론하고 승부를 겨루는 반상 앞에선 상대방의 승부호흡을 필연적으로 느껴야 한다. 바둑이 이런 심리적인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것을 알기에 우리 옛 현인들은 바둑에서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자세를 갖추는 것을 승부사의 최고 자질로 꼽아왔다. 반전무인의 자세. 바둑판 앞에 앉으면 오로지 반상 이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승부에 대한 이기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깔아놓고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얼음장처럼 차디찬 냉정을 유지한다는 것. 승부사들이 반전무인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아주 재미있는 기보 하나를 소개하겠다. 워낙 유명한 대국이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아마 한 번 정도 감상했던 바둑일지 모르겠다. 1997년에 벌어진 제4회 롯데배 한중대항전 1차전에서 유창혁 9단과 위빈 9단이 맞붙은 바둑. 유9단의 백번이다. 장면도 (유창혁, 비세에 빠지다) 초반 유9단이 방심하다가 흑의 노림수에 걸려들어 좌하귀 백대마가 몽땅 잡혀버렸다. 지금형세는 백이 상당히 불리한 상황. 유9단으로서는 이 장면에서 돌을 거두어도 무방한 바둑이지만 초반 노림수에 당한 이후 힘 한번 못써보고 지는 건 승부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백은 중앙 방면에 커다란 집을 마련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 흑1로 삭감을 가자 백은 2로 끊어 전투를 유도하는데, 흑은 의외로 백에게 중앙 ‘빵때림’을 내주고 5까지 넘어가 바둑이 끝났다고 선언한다. 실전진행1 (방심의 순간!) 그러나 위의 장면도는 위빈 9단이 승부를 너무 서두른, 조급함이 불러온 방심. 백은 1의 붙임과 3의 들여다보는 컴비네이션을 구사하며 흑을 절단해 버린다. 흑은 순식간에 뿌리가 잘리며 중앙 방면에서 타개하는 상황에 이르고 마는데, 백의 이후 수순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냉철한 공격의 연속이었다. 백7ㆍ9의 끊음에 귀의 보강은 어쩔 수 없다. 실전진행2 (흑대마 전멸하다!) 백은 흑대마를 못 잡으면 패배가 눈앞에 보인다. 일직선상으로 흑을 잡으러가는 유9의 신랄한 공격은 차디찬 냉정함이 도사리고 있다. 흑은 많이 유리했던 상황에서 단 한 번의 결정적인 실수로 상황이 뒤바뀌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후 수순에서 볼 수 있듯이 흑은 삶을 모색하려하지만 백의 완벽한 공격에 막혀 어마어마한 중앙 흑대마가 전멸하고 말았다. 대 역전! 참고도(냉철함을 잃지 말았어야) 수순을 거슬러 올라가 흑은 백1로 끊었을 때 흑2로 나갔어야 했다. 백을 상변에서 살려주더라도 두터움을 비축해 중앙을 견제했으면 무난한 승리였다. 이런 진행이었으면 백A의 끊음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위빈 9단으로선 부자몸조심 하려던 것이 결정적인 실수로 작용해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조훈현 9단의 바둑은 유리할 때 더 강하게 나가는 스타일로 유명하다. 바둑이란 정말 묘해서 형세가 좋다고 그 상황이 종국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흔치 않다. ‘전신, 화염방사기’란 닉네임이 말해 주듯, 유리할 때 강하게 몰아치는 조9단의 바둑을 보면 세월의 경륜이 바둑판에 절로 묻어나는 느낌이 든다. 우리네 인생도 살아가면서 여러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 어떤 누구라도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기회가 수없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바둑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바둑도 승부를 다 끝마치게 되는 순간까지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아니, 그 보다 더 많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우리 아마추어들의 바둑에서 말이다. 하하^^ 갑자기 예전 일본 기성전 도전7번기, 류시훈 9단과 왕리청 9단의 대국이 생각난다. 류9단이 다이긴 바둑을 공배 메우는 과정에서 단수를 못 봐 패했던 바둑. 그런 것은 기회가 아니고 요행이겠지만... 어쨌든 바둑도 그렇고 우리들의 살아가는 인생도 그렇고, 냉정과 열정 그 사이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는 오늘도 한 판의 바둑을 두면서 명국을 남겨보겠노라 다짐하지만 열정만 앞선 엉터리 수들은 나에게 냉정함을 배우라 가르쳐 주는 듯싶다. 기보내용이 보이지않는 분은 이곳 을 클릭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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