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은 나의 힘! - 바둑과 경영 (8)
<제8강> 경쟁을 해야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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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이 글은 ‘SERI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양상국 九단이 ‘바둑, 경영을 만나다’란 주제로 바둑이 지니고 있는 경영적인 요소에 대해 강의한 내용입니다. 최근 사이버오로에서 <양상국 바둑사랑 55년>을 발간하면서 전편(총 15편)을 실은 바 있고, 이 가운데 월간『바둑』의 요청으로 강의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바둑과 경영’이란 큰 카테고리로 묶은 글이기는 하나 내용은 조훈현이나 조치훈, 이창호 같은 세계적인 기사들의 승부에 얽힌 에피소드와 바둑동네의 생생한 이야기를 곁들여가면서 바둑 속에 들어 있는 경영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므로 나름 읽는 맛이 있을 겁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계신 내용일지언정 이 연재를 통해 바둑사를 반추하면서 긴 설연휴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사이버오로 회원을 위해 10편을 골라 명절연휴 기간 연재합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사이버오로 임직원 일동 배례(拜禮). ○● 설특집/ 바둑과 경영 (1)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후지사와 九단의 “4판만 이긴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2)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치훈 九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3) 프로정신에서 기업가정신을 배운다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4) ‘오뚝이’ 서봉수 九단의 도전정신 - 조훈현 九단의 기풍변화와 기업혁신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5) 영원한 일등은 없다! 한국바둑, 어떻게 세계최강이 되었나?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6) 과거를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복기(復棋)에서 배우는 경영교훈 ☜ 클릭 ○● 설특집/ 바둑과 경영 (7) 자신감이 승부를 좌우한다! 반전무인(盤前無人)의 자세 ☜ 클릭 ![]() <제8강> 경쟁을 해야 발전한다 라이벌은 나의 힘! 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둘 때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는 루이 나이웨이 九단에게 어느 날 한 기자가 “왜 행 복한지 궁금하다?”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이창호 九단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절대 강자, 즉 눈앞에 놓인 역경과 장애물을 두려워하기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도전하는 정신.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을 유지했기에 한국에 안착한 뒤 10년 동안 벌어진 29번의 국내 여자대회에서 무려 20번이나 우승하는 독주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업경영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거창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한다 해도 조직 구성원들이 왜 일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스스로 열정을 갖게 하지 못한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전에 달리는 두 마라토너를 내세워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는 카피로 주목을 받았던 광고가 생각납니다. 어느 사회, 어느 부문이나 독주란 재미없는 법이지요. 마라톤에서도 혼자 외로이 달리는 쪽보다는 둘이 치열한 레이스를 펼치는 쪽이 힘도 덜 들고 기록작성에도 유리하다고 합니다. 바둑의 승부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상처 머금은 조개가 진주를 생산하는 것처럼 승부사는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경쟁자가 있어야 자극을 받아 더 공부하게 됩니다. 오늘은 바둑계의 소문난 라이벌들의 재미있는 신경전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좀 풀어볼까요. ![]() ▲ 조치훈 九단(오른쪽)과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은 일본바둑의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12세에 기타니 미노루 문하로 들어간 고바야시 九단은 조치훈보다 기타니도장 2년 선배였고 나이도 네 살 위였지만 타이틀 획득은 늘 한발 뒤처졌기에 추월하려는 의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본바둑 숙명의 라이벌, 조치훈과 고바야시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은 조치훈 九단의 숙적으로 유명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실리에 짜 ‘지하철 바둑’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스승 기타니(木谷實)의 기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기도 하였거니와, 스승의 딸이자 도장의 사범으로 어릴 적 자기를 가르쳤던 기타니 레이코(木谷禮子·95년 작고)와 결혼해 일찍이 기타니 도장의 적자(嫡子)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레이코는 무려 열세 살 연상이었고, 프로 六단까지 오른 여성기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적은 도장의 코흘리개 말썽꾸러기였던 네 살 아래 조치훈에게 늘 한발 뒤졌고, 더군다나 한국인으로서 일본바둑을 천하통일한 조치훈의 뒤통수만 보며 쫓아가는 처지였기에 이들의 자존심을 건 경쟁은 무척 첨예했지요. 1984년 일본 본인방(本因坊) 리그 마지막 판에서 이 둘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까지 성적은 둘 다 저조해 조치훈이 6패, 고바야시는 3승 3패. 그러나 고바야시에게는 이 판의 결과에 따라 내년 리그 시드 여부가 걸렸지만 조치훈으로선 아무 희망도 없는 패전 처리용과 같은 대국이었습니다. 다들 대충대충 두다가 적당한 선에서 조치훈이 기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딱 한 사람, 고바야시 九단만큼은 “치훈이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습니다. 대국 다음날 한 모임에서 누군가 고바야시 九단에게 어제의 결과를 묻자 그는 마치 이긴 사람마냥 싱글벙글하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는 거였습니다. “죽은 말한테 채였답니다. 치훈이 녀석, 나하고 둘 때만 진지하거든요. 허허. 하지만 그는 열심히 두어주었으므로 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습니다.” ![]() ▲ 조훈현(오른쪽)과 조치훈은 어려서 일본에서 함께 유학했지만 세 살 위인 조훈현이 1972년 군복무로 귀국하면서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궤를 달리하게 됐다. 그렇지만 무대는 달라도 바둑세계의 승부처는 결국은 하나. 두 기사의 마음 깊은 곳에는 경쟁심이 상존했고 세계바둑대회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본격 승부에 돌입하게 된다. 사진은, 조치훈이 일본 명인을 획득하고 1980년말 귀국했을 때 축하연에서 조훈현 九단이 축하해 주고 있는 모습 .
한국과 일본 바둑의 자존심, 조훈현과 조치훈 조치훈 九단에게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이 일본 바둑계의 라이벌이었다면 한국의 일인자 조훈현 九단은 국제 라이벌이었습니다. 조치훈과 조훈현 두 사람은 우리나라 바둑의 위상과 명예를 한껏 드높인 불세출의 승부사지요. 나이는 조훈현 九단이 세 살 위지만 두 사람은 어린시절 일본에서 함께 바둑을 배웠고 차세대 대표주자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조훈현이 병역의무 차 귀국하면서 대한해협을 사이로 무대를 달리하게 됐고, 조치훈은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일본 무대)과, 조훈현은 서봉수 九단(한국 무대)을 숙적으로 대면해 왔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내심, 실은 조치훈과 조훈현은 그 누구보다 심중에 서로 의식하며 경쟁하던 상대였습니다. 1980년 조치훈 九단이 일본 명인에 오른 뒤 금의환향했을 때 한국의 전관(全冠)왕 조훈현과 두 판의 기념대국이 마련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바둑을 메이저리그로 인정하던 때라 조훈현 九단은 내심 칼을 갈았습니다. ‘큰물’에서 정상에 등극한 조치훈에 비해 조훈현은 한국의 모든 타이틀을 거머쥐었어도 변방국의 골목대장쯤으로 취급됐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 역시 조훈현 九단의 승리를 간절히 빌었습니다만 결과는 0대2로 지고 말았습니다. “역시 바둑은 조치훈, 일본바둑이 한수 위!”라는 팬들의 촌평이 난무했고, 그 패배가 얼마나 뼈 아팠던가, 박카스만 마셔도 취하는 조훈현이 그해 연말 소주 두 잔을 털어놓고 종로 뒷골목에 엎어져 신음을 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이때 조치훈에게 진 충격으로 조훈현 九단은 서봉수九단에게 내리 3개의 타이틀을 빼앗기며 전관왕 신화도 스톱됐지요. ![]() ▲ 조치훈 명인의 귀국기념으로 장고대국 한판, TV속기전 한판, 두 판의 특별대국이 마련되었다. 내심 1대1 무승부를 기대했으나 조훈현 九단은 조치훈 명인에게 2대0으로 지면서 충격을 받았다
훗날 국제무대에서 조치훈에 설욕한 조훈현 그러나 이날의 패배는 조훈현 九단에게 큰 약이 됐습니다. ‘우물안 개구리’에 만족하지 않고 마치 월왕 구천이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처럼 미래의 결전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10년 후 바둑세계 또한 글로벌시대가 도래하면서 국제대회가 속속 탄생했고 두 사람이 싸우는 횟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게 됐는데, 이때마다 조훈현 九단은 연전연승을 거두며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 ▲ 두 사람의 역대전적은 비공식 대국 포함 9승 6패로 조훈현 九단이 앞서 있다. 조훈현 九단은 69년 일본에서 두 판, 조치훈 명인 귀국기념대국 두 판을 둘 때까지 내리 4연패를 당했으나 이후 91년 9회 한일TV속기 특별대국부터 2002년 7회 LG배 본선 2회전까지 내리 8연승을 거두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사진은 2000년 6월에 둔 5회 LG배 세계기왕전 본선대국.
![]() 이게 라이벌입니다. 비록 맞수는 괴롭고 얄미운 존재이기는 해도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마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조훈현이라는 그늘에 가려 2인자 딱지를 떼지 못했던 서봉수 九단의 말은 멋지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남들은 내게 조훈현이란 천재가 없었다면 당신이 넘버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조훈현이란 스승이 있었기에 더 발전할 수 있었고 행복했다.” 세상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던 로마제국이 멸망한 건 외적의 침략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풍지대를 달리는 독주(獨走)는 달콤합니다. 그러나 무균실에서 오랫동안 자란 생명이 면역력이 약하듯 독주는 경쟁력을 상실하게 하는 독배(毒杯)가 되기 쉽습니다. 1974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 오퍼레이팅 시스템 (Operating System) 개발로 시장을 독점한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의 생존기간은 2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천재 프로그래머 개리 킬달(Gary Kildall)이 세운 이 회사는 OS시장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도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만감에 빠져 1980년 IBM과의 OS 공급계약을 거부해 버렸고, 이후 MS-DOS로 IBM과 계약한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에 선두자리를 빼앗기고 사라지고 맙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영원할 것 같은 독주 또한 구글의 급부상에 추월당한 처지가 됐지만 건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맞수가 생겼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눈터지는’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는 전자업계의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각축 구도 역시 그렇습니다. 상대의 장점과 강점을 흡수해 나의 체질을 더욱 강화하고 경쟁력을 키우는 동기유발로 삼음으로써 이는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입니다. 이러한 라이벌을 갖고 계시다면 그것을 ‘불운’이 아니라 ‘행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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