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집이 가른 15년 사제대결① 스승과 제자도 피할 수 없는 냉엄한 승부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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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운명 같은 사제 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가 3월 26일 개봉한다. 앞서 바둑을 소재로 쓴 영화가 몇 편 있었으나 대부분 ‘폭력적인 스토리’에 ‘내기바둑’을 오브제로 쓴 것들이어서 실망스러웠는데, 이번에 선을 보인 영화 <승부>는 진정 바둑이야기여서 관심을 끈다. 숙명과도 같은 사제 간 승부 장면과 이에 얽힌 심리묘사, 두 사람의 고뇌를 드라마틱하게 스크린에 담아냈다는 평을 듣고 있어 기대가 남다르다. 게다가 주연배우부터가 급이 다르다. 이병헌이 제자에게 추월당한 뒤 다시 일어서는 ‘희대의 승부사’ 조훈현을, 유아인이 스승 조훈현을 넘어서는 ‘바둑 천재’ 이창호를 연기했다. 세계바둑 도전기 역사에서 사제가 타이틀을 두고 대결을 펼친 예는 없다. 이들의 도전기 공방은 1988년 12월 24일 제28회 최고위전 도전5번기 1국을 시작(조훈현, 80수 백 불계승)으로 2003년 12월 15일 제34회 SK엔크린배 명인전 도전5번기 5국(이창호, 232수 백 반집승)까지 무려 15년이나 이어졌다. 지금까지 314번을 싸워 제자가 195승 119패로 앞서지만, 두 승부사가 마치 백년전쟁처럼 승부를 거듭했던 이 기간은 한국바둑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전성기였다. 영화 <승부>의 개봉에 맞춰 이참에 이전 <네이버캐스트 바둑이야기>에 게재했던 칼럼과 조훈현-이창호 사제이야기를 몇 편에 걸쳐 연재해 볼까 한다. 영화감상에 도움이 되면 다행이겠다. ![]() 반상(盤上) 승부세계는 냉엄하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세상이다. 천재지변을 맞닥뜨리지 않는 한 정해진 대결을 피할 수 없다. 부모상을 당해도 대국날짜를 지켜야 하고, 형제와 부자간에도 피치 못할 대결을 벌여야 하는 세계다. 1986년 조치훈 9단은 기성전 방어전을 열흘 가량 앞두고 전치 25주의 중상을 입었지만 깁스한 몸으로 ‘휠체어 대국’을 펼쳤고, 1999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파리에서 기성전 도전기를 치른 다음에야 빈소를 찾을 수 있었다. 이세돌과 이상훈(형)은 2000년 신인왕을 놓고 형제대결을 벌였다. 바둑의 승부세계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세계라지만 그래도 사람이 벌이는 승부다. 부자나 부녀, 형제자매의 대결을 피하도록 조를 편성할 때는 가급적 결승에나 가야 만날 수 있게 배려한다. 그렇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에누리’가 없다. 30~40대에 은퇴하는 스포츠 분야에 비해 바둑은 승부연령이 길다보니 사제(師弟)가 마주앉아 콧김을 쐬며 대국할 일이 많다. 음악 같은 예술세계라면야 사제가 한 무대에 올라 하모니를 이루는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할 수 있겠으나 바둑은 반드시 승패를 가려야 하는 승부세계. 제자가 스승과의 대결에서 이기면 바둑계에서는 이를 ‘보은(報恩)’이라는 말로 치장하기는 하나 가르친 스승이나 배운 제자나 피차 어색하고 괴롭긴 마찬가지다. 그렇다. 바둑사상 최강의 사제로 불리는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얘기를 할 참이다. 이들의 승부가 곧 한국바둑의 역사인데, 이것이 참으로 묘한 역사이기도 하다. 승부의 길로 들어선 이상 상대를 불문하고 이기고 지는 것은 기사(棋士)로서 받아들여야할 운명이니 순응한다 치자. 하지만 조훈현-이창호 사제가 연출한 한국바둑사의 명승부를 얘기할 때, 승부사가 아니면서 이들보다 더 처절하고 고역스런 순간을 온전히 견딘 반외(盤外)의 내조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창호 9단이 ‘작은엄마’라 부르는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 씨다. 한국바둑사에 찬연히 빛나는 한 굽이에서, 바둑세계이기에 가능했던 ‘승부의 역설’이랄까. 남편을 따르자니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수양아들’이 마음에 걸리고, ‘수양아들’을 생각하자니 남편이 안쓰럽기만 했던, 한국바둑사에 ‘조-이 사제시대’로 양각된 15년 일인자 공방전이다. 잠시 정미화 씨의 처지에서 조-이 사제의 백년전쟁을 들여다보면 더욱 묘미가 있다. 굳이 ‘역설(아이러니컬)’이란 표현을 쓴 까닭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 (왼쪽부터) 조현훈 9단과 아내 정미화 여사, 정미화 여사 역을 한 배우 문정희와 배우 이병헌(조훈현 역)이 시사회에서 만났다. [제공 | (주)바이포엠스튜디오]
![]() ▲ 갓 입단한 무렵의 이창호. 오동통한 볼살과 체형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 ‘똘이장군’을 연상케 했다. 아기였을 때 우량아선발대회에 나가 입상한 바 있다.
조훈현이 호랑이새끼를 키운 까닭 1984년 조훈현 9단이 한국바둑계 처음으로 이창호를 내제자(內弟子, 스승의 집에서 살며 배우는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 “조국수가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았다”는 농이 퍼졌다. 실제로 이창호는 몇년 지나지 않아 15여년이나 군림해온 스승의 시대를 무너뜨리고 한국바둑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런 두 사제를 정미화 씨는 도전기가 있는 날이면 새벽부터 서둘러 따뜻한 아침밥을 지어 먹이고 나란히 승용차에 태워 대국장에까지 데려다주었다. 늦은 밤 귀가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명은 반드시 패자일 수밖에 없다. 불혹이 다 된 남편의 체력은 예전 같지 않은데 내제자의 기세는 욱일승천하니 더욱 착잡할 수밖에. 종일 대국에 지친 남편이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새벽, 그 시간에도 2층 내제자의 방문 틈새로 불빛이 새어나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따악딱, 돌 놓는 소리는 부메랑처럼 작은엄마의 가슴을 섬뜩섬뜩 파고들었다. “앞으로 나 혼자로는 힘들어!” ‘전주 바둑신동’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일 무렵 조훈현 9단은 둘째 출산을 한달여 앞둔 만삭의 아내에게 대놓고 말을 못하고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를 불쑥 들이밀었다. 머지않아 바둑계도 세계화가 될 텐데 지금부터 든든한 후진을 키워 놓지 않으면 일본, 중국 애들에게 먹히고 만다. 국제대회에 대비하려면 창호 같은 애들을 받아 한시바삐 다듬어야 할 것이다. 한국바둑이 언제까지 2류 국가로 멸시 받아서야 되겠냐는 말이었다. 이때 조9단의 나이 서른둘밖에 되지 않았다. 제자육성은 은퇴 후에 하거나 전성기를 지났을 때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토너먼트 기사로서 한창 나이이고 한국바둑을 한손에 죄다 움켜쥐고 있는 절정기에 결심한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 ▲ 1984년 당대 일인자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간 꼬마 이창호는 2년 만인 1986년 11세 1개월의 나이로 입단했다. 조훈현 9단이 젊은 나이에 받아 손수 집에서 데리고 살며 키우는 내제자라 워낙 주목을 받아서인가, 다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입단하지는 못했지만 11세 입단도 스승이 세운 9세 입단에 이은 대단한 기록(그때까지 2위)이었다.
사진은 면장수여식에서 함께 입단한 김원과 한국기원 서정각 이사장으로부터 프로 초단 면장을 받고 있는 이창호 소년. ![]() ▲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국? 당시 최고령 기사 김태현 3단과 대국하는 모습. 소년기사가 입단하니 자연 이런 풍경이 종종 연출되었고 나어린 소년을 마주하는 선배들은 하나같이 어색해했다. ![]() ▲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잠시, 소년의 당차고 맵짠 주먹에 더 당황하고 이내 정신을 차려야 했다. 몸집은 앳된 소년이되 바둑은 이미 장사였던 것이다. 소년장사!
나와는 스타일이 달라! 그렇게 받아들인 내제자였고, 스승 내외는 맹모삼천(孟母三遷) 하듯 주거하던 화곡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사했다. 식구가 늘어 집이 좁기도 했거니와 어린 내제자가 종로에 있는 한국기원을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다닐 수 있게 신경 쓴 것이었다. 대우(大愚)가 곧 대현(大賢)이란 말이 맞다면 이창호가 딱 이런 유형일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생이 혼자 머리를 못 감는 것은 그렇다 쳐도 세수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 바람에 정미화 씨는 1~2년 간 손수 목욕을 시켰다. 운동화 끈이 한번 풀어지면 며칠이고 풀린 채로 지렁이 매달고 다니듯 신고 다니는 통에 아예 찍찍이 신발만 사 신켰다. 원체 무감각, 무신경한 아이였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열정만큼은 집요했다. 세상만사 본시 일정 분량의 주어진 몫이 있다는 '총량의 법칙'이 성립한다면, 이창호는 아홉 가지에 무신경한 대신 그 양이 바둑 한가지로 죄다 발현되었다고 해야 할지. 조9단이 이창호를 내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로, ‘한국바둑을 위해 한시바삐 후학을 양성해야겠다’는 의무감 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 이건 승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저도 모르게 끌리는 호기심 같은 거랄까. 조9단은 어린 창호와 두 번에 걸친 시험기에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 정반대 성향의 싹을 발견했고 가능성의 냄새를 맡았던 듯하다. 두 판의 시험기를 둔 뒤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도 나와는 다른 이놈이 커서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함, 기대감 같은 것 말이다. 1989년 응씨배 제패로 ‘바둑황제’란 별칭을 얻기 전까지 조훈현 9단의 별명은 ‘조제비’였다. 제비처럼 가볍고 날렵한 바둑, 바람보다 부드럽고 빠른 창, 이것이 조훈현의 바둑이었다. 전광석화(電光石火)는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명장 밑에 약졸 없고, 왕대밭에 왕대(大竹) 난다는 말이 있다. 이창호는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그러나, 성격이나 기풍은 딴판이었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바로 건너지 않고 우회해 가는 어린아이의 바둑에 어른들은 ‘졌다’는 표정을 지었고, ‘애늙은이’, ‘강태공’이란 별명이 붙었다. 승부가 유리하건 불리하건 도대체 표정이 없고(포커페이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不動心) ‘돌부처(石佛)’로 불렸다. ![]() ▲ 한국바둑을 세계최강으로 올려놓은 원투펀치, 조훈현-이창호 사제 세계최강의 사제 조훈현 9단의 바람대로 공들여 키운 제자 이창호가 뒤를 든든히 받쳐주었고, 두 사제는 국제무대에서 한국바둑의 신화를 써나갔다.
사진은 1996년 4회 진로배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끈 조-이 사제가 김인 단장과 우승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 일찍이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았다'는 말까지 들으면서, 과연 주변의 예언대로 자신의 시대를 끝낼 가장 위협적인 상대가 될 것을 알았어도, 애초 조훈현 9단이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까닭이 이것이었다. 스승을 뛰어넘은 제자는 많아도 스승보다 위대한 제자는 많지 않다. 세상 모든 스승은 위대하다. 조훈현은 타고난 천재, 이창호는 만들어진 천재 “바둑계 최고의 천재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바둑기자가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망설임 없이 조훈현 9단을 일순위로 말한다. 조훈현 9단은 타고난 천재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뇌회전이 빠르고 번뜩이는 유형의 천재다. 조9단의 비상한 승부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 젊은 시절 유럽바둑대회에 초청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때 동양에서 온 바둑 9단에게 유럽인들은 체스를 소개했다. 그 지역 체스고수가 조9단에게 기본 행마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한두 판 시범을 보인 뒤 직접 한판 둬보자고 청했다. 바둑은 당신이 귀신일지 모르나 체스는 갓난애가 아니겠느냐는 듯, 장난기가 섞인 대국제안이었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즉석에서 배운 조9단이 이겨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시범대국을 할 때 딱 한가지 이기는 코스를 눈여겨뒀었지요. 그런데 그 체스마스터가 바로 그 코스로 오더군요. 재수 좋았지요. 세상에 처음 배운 놈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어요. 하하.” 조훈현에 견준다면, 이창호는 타고난 재능의 양보다는 부단히 노력하여 만들어진 천재에 가깝다. 실은 이런 유형의 천재를 만나기가 더 어려운 건지 모른다. 조훈현 9단의 지하실 서재에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탐독했던 귀한 바둑책이 수천 권 있었다고 하는데, 이창호가 스승의 집에서 독립할 무렵엔 이걸 숫제 머릿속에 다 담아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열정과 노력, 근기(根氣)에 대해서는 혀를 내두를 만했다. 하지만 조훈현 9단이 지금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스터리 한가지는,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제자가 그날 낮 자기가 둔 바둑을 복기(復棋)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 “얘가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 것만은 자명한데, 이거 내가 잘못 봤나…?” 일본기원 연구생시절 프로의 바둑을 동시에 세 판이나 기록하기도 했거니와 심지어 몇 년 전에 둔 바둑을 인화하듯 복기해 내는 총기를 보인 스승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였을 터이다. 이창호 9단은 후일 세계챔피언이 된 뒤에도 자기 바둑을 제대로 복기하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으니, 전주시절 그를 다듬은 전영선 사범의 말마따나 겉으로 번쩍이는 것은 실제 큰 재주는 아닐지 몰랐다. 누구나 알아보는 재주는 큰 재주일 리 없으니까.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이창호의 바둑 느는 속도는 무척 빨라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간 지 1년 반 만에 가장 먼저 1급으로 승급했고 다음해인 1986년 8월 연구생입단대회에서 입단했다. 내제자로 입문한 지 2년 만에, 만 열한 살의 나이로 프로기사가 되었다. 스승(아홉 살)보다 2년 늦은 나이의 입단이었지만 60년대와 80년대는 바둑계의 수준과 층이 달랐다. 그렇기는 해도 바둑계의 시각은 제자가 스승의 아성을 위협하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년은 걸릴 것이라고 봤다. 한국바둑의 모든 기전을 전부 차지하는 전관왕(全冠王)을 무려 세 차례나 달성한 조훈현 9단이다. 줄잡은 5년의 기간도 이 정도 시간이면 도전권 언저리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림짐작이었지 훌쩍 뛰어넘으리라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는데, 입단 이후 ‘똘이 장군’ 이창호의 행로는 ‘아우토반’이었다. 입단 햇병아리에 불과한 소년기사가 ‘된장바둑’으로 불리는 서봉수 9단을 연속 다섯 번이나 이기는 등 연일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한달음에 제28기 최고위전(1988년) 도전권까지 거머쥐었다. 입단 2년 만에 이룬 고속질주였다. 서봉수 9단이 누구인가. 비바람이 거세면 일시 몸을 숙였다 다시 일어서는 들풀처럼 조훈현 10년 왕국을 게릴라 전법으로 줄기차게 두드려 대던 스승의 최대 라이벌이다. 화려한 ‘칼춤’을 자랑하는 스승조차 완전 제압하지 못한 라이벌을 제자가 ‘둔도(鈍刀)’를 스윽 휘둘러 제압한 셈이다. 그러고선 서9단이 그랬던 것처럼 조훈현 왕궁의 성문 앞에 서기 시작했다. ![]() ▲ 예전, 1980년대 조훈현 일인독주가 길게 이어지던 시절, 오직 서봉수만이 힘겹게 맞서 싸우던 때 '도전5강'이라는 신흥세력이 대안으로 떠올랐고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서능욱, 장수영, 김수장, 백성호, 강훈 5명을 묶어 '도전5강'이라 이름하였으나 이들은 2인자 서봉수의 벽조차 변변히 넘지 못했다.
바로 이때 소년기사 이창호가 아장아장 걸어나오더니 놀라울손! 마치 장판교를 지키고 선 장비마냥 조훈현 성채로 가는 길목을 버티고 선 서봉수 9단을 연거푸 다섯 번이나 쓰러뜨리는 파란을 일으켰다(사진은 1988년 28기 최고위전 도전자결정전 장면). 소년 이창호가 당대 2인자 서봉수를 꺾고 당당히 도전자가 되었다. 도전권을 획득했다는 건, 곧 한 집에서 기거하는 스승(조훈현)에게 정면대결을 신청했다는 말. 바둑사 초유의 '사제도전기'가 시작된 것이다. 바둑사에 유례가 없는 15년 사제도전기 조훈현-이창호 9단의 첫 사제도전기인 1988년 제28기 최고위전은 이후 2003년 12월 제34기 명인전 도전기까지 15년 간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사제 백년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역사적인 첫 사제대결은 1988년 12월 24일, 성탄 전일에 두어졌다. 대국장에는 참으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부산 광안리에 자리한 시사이드호텔 특별대국실. 바둑판을 사이에 하고 스승은 곤혹스런 웃음을 연방 지으며 천정을 쳐다봤고 제자는 무슨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방바닥만 응시하다 대국에 들어갔다. 제자의 부담이 컸을까. 사제간의 첫 대국은 80수 만에 제자가 돌을 거두면서 단명국으로 끝났고, 이 도전5번기는 스승이 3-1로 아퀴 짓고 타이틀을 방어했다. 5년은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2년이나 단축하며 도전장을 내민 용맹정진은 가상하나 아직 스승을 상대하기에는 역불급, 시기상조라는 게 대다수 관전평이었다. 다만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스승에게 마냥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고 1승을 거두었다는 점은 높이 샀다. 그러면서도 도전3국에서 올린 ‘반집승’을 행운의 승리로 여기는 기류가 강했다. (이창호 9단이 스승에게서 거둔 첫승은 공교롭게도 ‘반집승’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공교로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편에 계속] ![]() ▲ 어색하고 곤혹스런 사제대결 이창호-조훈현 사제대결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당사자들은 참으로 곤혹스럽고 어색한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자 이창호는 이기건 지건 언제나 죄인마냥 몸둘 바를 몰랐다. 시종 시선을 바닥으로만 깔고 있는 제자에 비해 그래도 어른인지라 스승은 많은 사람 앞에서 짐짓 웃어 보이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지금 내가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야!'
사진은 1988년 12월24일 부산 광안리에 자리한 시사이드호텔에서 열린 28기 최고위전 도전5번기 1국 전야제 장면. ![]() ▲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첫 사제도전기 28기 최고위전 도전1국 장면. 단 80수 만에 제자가 돌을 거두면서 ‘단명 도전기’로도 화제가 되었던 바둑이다. 흑백을 누가 쥘 것인지, 돌을 가리는 순서에 이르면 이미 본격대결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순간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평소와 달리 쓴웃음을 다시며 한웅큼 백돌을 쥐어 바둑판에 올려놓는 스승의 서툰 손놀림이나 흑돌 하나를 살포시 올려놓으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자의 입매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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