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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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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62회] 12부 떠도는 부초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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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는 희색이 만면에 그득했다. 본토에서도 알아주는 전문기사인 아오야마가 흑을 잡은 이상 바둑은 절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흑을 잡고는 거의 패한 경험이 없다는 아오야마였다. 게이오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평사의 바둑이 만만치 않다지만 아오야마가 흑을 잡게 되면 그 순간 아오야마가 이긴 것으로 봐도 좋다고 하질 않았던가. 저 건방진 조센징에게 일본 바둑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리라. 나카지마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이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액을 들여 초청한 아오야마였다. 나카지마에게 승리를 장담하며 그를 불러들였지만 정상급 바둑, 더구나 단판 승부인 경우 기량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그날 운이 따라 주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날의 운에 따라 의외의 결과가 날 수도 있는 게 바둑이었다. 게이오 자신이 겪어 온 바로는 아오야마의 기량이 높다 하나 백을 잡는다고 가정할 경우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게이오가 보기에 그만큼 평사의 바둑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아오야마가 흑을 잡았고 이젠 어느 정도 느긋하게 관전해도 좋을 만큼 안심이 되었다. 바둑을 시작하기 전 아오야마는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평사는 아오야마가 무슨 태도를 보이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빈 바둑판만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묵상에서 깨어난 아오야마의 선수로 바둑은 시작되었다. 한쪽은 손가락을, 또 한쪽은 애지중지하는 여자를 건 괴이한 승부는 출발선을 넘어 긴 장정의 길로 들어섰다. 아오야마는 장점이 많은 기사였다. 전반적으로는 두터움을 지향하지만 전체 국면을 식별하는 눈이 탁월했고 판을 짜 나가는 응집력 또한 대단했다. 그저 무심하게 한 수 한 수를 놓는 것 같았지만 매 수마다 빈틈이 없었고 그 뒤는 확실히 계산된 수읽기가 받쳐 주고 있었다. 그런 형태의 바둑은 일견 평이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상대가 얕잡아 보고 한두 수 욕심을 부리다 보면 흔적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밀리게 된다. 아오야마의 회심의 한 수가 반상 위에 떨어졌다. 50여 수에 이르러 우상귀에서 서로 손을 뺀 미완성의 정석에서 흑을 쥔 아오야마가 3·3(귀의 제3선과 제3선의 교차점)을 침입하는 평범한 수를 외면하고 우변 흑돌의 원군을 배경으로 백의 요석에 붙여 온 것이다. 보기 드문 형태였지만 그 수의 의미는 백의 공격을 유도하여 다시 늘고 젖힌 후 상대의 응수에 따라 백을 양분시키든지 자신의 흑돌을 사석으로 하여 외부에서 서서히 죄어 오겠다는 은밀하면서도 심원한 긴 안목이 숨어 있었다. 평사는 처음으로 장고에 들어갔다. 평사가 장고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일단 흑의 의도를 거슬러 양단되는 수를 피하고자 함이다. 어떤 변화를 주든 양곤마(兩困馬:바둑에서 두 군데 모두 살기 어려운 말로 몰린 형세)를 피할 수만 있으면 일단은 백이 실리를 확보하게 된다. 비록 흑의 세력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어도 그렇게만 되면 백으로선 만족스런 결과이다. 그러나 흑이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 아오야마의 기력으로 보아서 분명 반발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워낙 난해한 난타전이 되어 결론을 미리 내릴 수가 없다. 아무리 수를 읽어 보아도 그 싸움은 백이 불리하게 보였다. 어떤 타협을 보더라도 부분적으로 밀리게 되면 차후의 반면 운영은 한층 어려워질 것이었다. 둘째는 그 변화가 싫어 간명하게 젖히고 한 칸 뛰어서 연결시키는 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아오야마에게 중앙을 선수로 허용하고 다시 3·3을 내주게 되니 다른 곳에서 대가를 찾지 못하면 승부는 결정적으로 불리해진다. 더구나 자신의 기질과는 상충이 되는 밋밋한 변화였다. 셋째는 붙여 온 수를 과감히 몰아서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귀에 20여 호의 집을 장만하는 것이지만 흑은 사석 여섯 점의 대가로 우변에서 중앙에 이르는 방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백의 실리가 크다 하나 흑에게 웅대한 세력을 허용한다면 국면의 향방이 극단적인 세력과 실리의 양상으로 양분되어 쌍방 겁나는 바둑으로 치닫게 된다. 지금까지의 반면 운영으로 보아 두터움을 지향하는 아오야마는 내심 세 번째 결과를 원할 것이다. 평사의 장고는 30분 이상 지속되었다. 장고 끝에 평사는 세 번째의 변화를 선택했다. 평사는 극단적인 승부의 길을 간 것이었다. 아오야마는 자신의 의도대로 평사가 따라와 주어 흡족했으나 막상 평사가 그 길을 선택하자 의외라고 생각했다. 일단 몰아온 수가 놓여진 이상 바둑은 외길 수순이었다. 백은 귀를 배경으로 20목 정도의 튼튼한 집을 장만했고 흑은 우변에 방대한 철벽을 구축했다. 판세는 불투명했다. 다만 흑의 두터운 위력이 돋보였고 선착의 효과가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백의 실리도 그리 녹록한 편은 아니었다. 승부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고 아오야마나 평사 어느 쪽이건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할 쉽지 않은 국면이었다. 바둑을 모르는 화정은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알 수 없었다. 게이오나 나카지마의 얼굴은 밝아 보이고 남작의 얼굴은 흐려 있다. 화정은 대국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오야마의 미끈한 용모에 비해 평사의 모습은 어둡고 거칠었다. 간혹 아오야마의 착점을 보며 뒤틀리는 그의 입가엔 냉소의 그늘이 짙게 묻어났다. 바둑은 더디게 두어졌다. 중반을 넘어 흑의 세력과 백의 실리로 더욱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흑은 우변에서 중앙을 싸고 도는 거대한 세력으로 마침내 약 60집의 대가를 형성했다. 또한 우상귀에 10여 집, 좌변에 흑의 눈목자와 두 칸 벌린 곳에서도 최소한 대여섯 집은 실했다. 백은 도처에서 실리를 취했다고는 하나 모두 합해 70집 언저리였다. 덤이 없던 시대라 전체적으로 보아 아무래도 흑의 유망한 형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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