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매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인 26일부터 서머 타임이 적용되는 시기에 접어들어서 평소 서울과 오지리간에는 8 시간의 시차(서울이 빠름)가 있었으나 7 시간으로 줄어들었다.

여행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행기를 계속하기 전에 지난 번 오지리란 나라의 소개에서 별로 언급되지 않은, 현재 필자가 머무르고 있는 비엔나에 대하여 한 가지만 다루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한다.

비엔나 현지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 도시가 얼마나 좋은지, 혹은 나쁜지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세계적인 경영 컨설팅 업체 ‘ 머서 ‘ 가 조사하여 발표한 바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위가 오지리의 비엔나, 2위는 스위스의 취리히, 3 위는 뉴질랜드 오클랜드라고 나와 있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의 수도 서울은 76 위로 나와 있으니 솔직히 살기에 썩 좋은 매력 있는 도시는 아닌 것으로 세계인들로부터 평가되고 있다.

필자가 느끼는 비엔나의 생활 물가는 서울에 비하여 130 % 정도로 비싼 것 같다.  비엔나 커피 브랜드가 따로 있지도 않은 이 도시의 무엇을 긍정적 장점으로 평가한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건 데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좋은 점 한두 가지만 짚고 넘어간다면,

1. 어디를 가나 음식값이든 물건 값이든 바가지는 없다. 수백 명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유명한 음식점이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아서 가격을 대폭 올려도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상품의 경우에도 물건 값을 올려서 폭리로 떼돈을 벌려는 악덕 상인은 못 봤다. 물론 관광 유원지 물가나 시내 물가간에도 큰 차이가 없다.

    

2. 대형 매점이나 백화점에서 세일을 할 경우, 한국은 안 팔리는 물건이나 흠이 있는 물건, 철 지난 물건, 신 모델이 나와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구형 모델의 물건을 주로 세일하고 어떤 경우는 동일 제품인 경우에도 세일 상품은 정품보다 질이 떨어지도록 별도로 만들어 세일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비단 오지리 뿐만 아니라 유럽 대부분 나라의 바겐세일을 보면, 매상을 올려준 고객들에게 사은 행사 성격으로 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상도의가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처럼 땡 처리 상품을 세일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정가대로 팔아도 없어서 못 파는 상품, 고객들이 선호하는 상품도 통상 고객들에게 미리 고지한 세일 계획에 의거 그 날짜가 되면 어김 없이 세일에 들어간다.  세일 상품이라고 질이 떨어지거나 재고품 처리 차원이 아니다. 물론 재고품 처리 성격의 세일의 경우는 반드시 재고 처리임을 밝힌다.  또 하나 다른 점은, 많은 상점들이 년간 세일 계획을 나열한 카탈로그를 만들어 어느 달 며칠부터 언제까지 무슨 상품을 몇 퍼센트 세일할 것인지를 고객들에게 미리 알게 하여 알뜰 구매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나라와 완전히 다른 또 하나의 세일 제도는, 특별 세일 기간에는 배포된 세일 쿠폰을 가져가면 그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물건 중 고객이 원하는 아무 물건이라도 무조건적으로 제시된 할인율(가격 20 %)을 적용해주는 파격 세일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물품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세일 가가 적용되는 세일 기간이나 발행되는 쿠폰의 수량은 무한정은 아니고 제한적이지만 고객들이 진정으로 그 매점에 대하여 신뢰를 갖도록 해주는 신나는 제도이다. 또 한가지는 한 달에 가령 500 유로 어치 이상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는 이 금액을 상회하는 매상 순간부터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일정액을 할인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서민들은 그 혜택을 보기 위하여 열심히 단골 매장을 출입하는데, 이를 보면 돈 되는 일에는 동/서양인을 가리지 않는 것이 사람 심리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레인 체크(Rain Check) 제도도 있지만, 너무 장황해질 것 같아서 생략한다.

바르셀로나 시내 관광을 마치고 승선한 우리 가족은 오늘 저녁은 뷔페가 아니라 정식을 먹기로 했다. 배의 후미 쪽 10 층 뷔페 식당만 생각하고 올라갔다가 정식은 배의 선수 쪽 3 층 식당이란 기억을 떠올리며 선내에서 5~6 분 정도를 걸어서 찾아갔다. 우리 앞에 30 여명 정도가 줄을 서고 있는 뒤에 섰다가 우리 차례가 오자 일행이 6 명이라고 접수계에 밝히고 종업원이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 전망이 좋은 자리여서 밖을 내다보니 배가 막 출항하려고 기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륙식 정식은, 미국식과는 달리 다섯 코스로 나왔다. 우리가 배정받은 테이블 위에는 이미 따끈따끈한 빵들이 바구니에 담겨져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고 인공 촛불이나마 켜져 있어서 운치를 느끼게 했다. 오늘 정식은 이태리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Chef, Bruno Barbier 의 스페셜이라고 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이태리 정통 요리의 대가(大家)가 만든 별미 요리를 먹어보는 호사를 언제 누릴 수 있을까!

종업원이 건네주는 메뉴 판은 이태리어와 영어로 적혀있었다. 다섯 코스를 전부 먹으면 배가 만땅이 되겠지만 어떤 요리들이 어떤 순서로 나오는지 확인을 할 겸 모든 코스의 메뉴를 누락 없이 전부 주문을 했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와인과 샐러드를 주문했다.  와인은 식사와는 별도로 유료인데 한잔에 6 유로였다. 샐러드와 와인이 나오기 전에 빵을 이미 두 개나 먹었다.  이어서 생선 수프, 그 다음은 파스타를 먹었다. 가져다 주는 접시들을 전부 비우고 나니 아직 메인 요리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이어서 스테이크를 잘랐다. 음식을 먹는 중에 커피 잔이 비면 종업원이 알아서 채워줬다. 디저트로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어른들은 포도와 파인애플, 멜론이 포함된 과일을 먹었다. 저녁을 90 여분 간에 걸쳐서 너무 거하게 먹었다. 이런 식사를 일주일 동안 반복하고 집에 와서 체중을 측정한 결과 무려 3.2 kg 이 늘어서 이를 감량하느라고 아직도 고생 중이다. 아무리 식도락도 좋지만 과식은 금물이란 교훈을 새삼 확인하며 이 나이에 식탐이라니 참 미련 곰탱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침실에 있는 TV 에 한국 방송은 KBS 국제방송과 아리랑 방송만이 나와서 주로 BBC 를 통하여 세상 소식을 들었다. 외국에서 보도되는 한국 관련 단골 뉴스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다가 여행 종료 3~4일전부터는 김정남의 독살에 대한 뉴스가 속보로 다뤄지는 것을 봤다. 취침 전에 영화를 한 편 보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침에는 일찍 눈이 떠졌다. TV 를 켜보니 배가 막 스페인 령(領) 팔마 디 마요르카 항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208 ㎢ 크기(제주도의 1/9 정도)의 이 섬은 스페인의 전형적인 관광지라고 했다. 조그마한 섬이지만 돌아보는 과정에서는 대단히 큰 섬처럼 느껴졌다. 이 섬의 상주 인구는 40만 명인데 겨울철에는 80만 명으로 늘어난다고 했다. 그 사연인즉, 내륙 쪽의 부자들이 제주도에 별장을 지어서 쉬러 오는 것처럼 이 섬에도 겨울철 피한(避寒)을 위한 유럽 부자들의 별장이 많아서 동계 인구는 여름철의 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관광지답게 관광객들도 많고 관광상품들도 다양했다. 어느 관광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진풍경처럼, 이 섬에는 고대 장군 복장으로 차려 입은 사람이, 이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는 관광객 어린이에게 칼을 쥐어주며 사진을 함께 찍고는 아이의 부모에게 모델 비를 뜯어내는 모습은 차라리 애교로 봐줘야 할 것 같다.

섬에 있는 종교 시설과 뒷골목의 상가들을 돌아보면서 오전을 보냈다. 집 사람이 구두 가계에서 예쁜 신발에 끌려서 정신 줄을 놓고 보자, 눈치 빠른 사위가 장모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얼른 계산을 해줘서 아내는 굉장히 흡족한 표정이었다. 나는 잡화상을 지나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보물에 이끌려서 상점으로 들어갔다. 티타늄 몸체와 상아(인조 상아겠지만) 손잡이가 달린 길이 25 cm 크기의 양날의 단검(Dagger)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빈티지(Vintage)와는 거리가 먼 최근에 제조된 단검이지만 태양을 받아서 반짝이는 금빛 찬란한 색깔과, 단도에는,  ‘ 욕망은 피를 부르고 파멸로 이끈다 ‘ 는 경구가 한 쪽에는 라틴어로, 다론 쪽에는 영어로 적혀 있는 부분이 나를 끌리게 했다. 백병전(白兵戰) 용(用) 이라기 보다는 저격용으로 적격이었다. 주인의 상술이 교묘했다.  정원에 준비된 과녁을 향하여 던져보라고 했다. 단검을 들었으면 던져보고 싶은 것은 사나이라면 킬러가 아니더라도 호기심이 간다. 단검을 던지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칼날을 손바닥 쪽으로, 손잡이를 표적 쪽으로 향하도록 한 후에 힘차게 던져봤다. 기대 이상이다.  주저 없이 정통으로 꽂혔다. 꽂힌 칼의 손잡이 쪽이 일순간 파르르 떨렸다. 한 손으로 뺄 수 없을 만큼 깊숙하게 박혔다. 만일 사람을 향하여 던졌다면 손잡이 쪽을 제외하고 17 cm 가 전부 들어갔을 것이다.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장식용으로 진열 해놨다가도 의도하지 않은 사고의 불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일순간 떠올랐다. 우리 집 서재에다가 소장하여 심심할 때 던져보고 감상한다면 정신 수련용으로는 그만인 것 같고 120 유로가 아깝지 않지만 ‘ 총포/화약/도검류 법 ‘ 이란 현실 앞에, 그리고 허황된 욕심 때문에 화근을 자초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만 했다. 결국 그 날은 80 유로짜리를 단돈 15 유로에 파는, 나에게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중절모(싸구려 티가 나지 않는다)를 면세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고풍이 풍기는 식당에 들어가서 맛있는 서반아 요리를, 향토 맥주를 반주로 곁들여서 마시고 사진도 한껏 찍고 나서 다시 이름 모를 거리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귀선을 하였다. 이 섬을 출발하면 금번 여행 중에서 다음 기항지까지 장장 36 시간을 바다에서 항해하고 나서야 이태리의 첫 기항지 시비타베치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날 밤은 왠 일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오늘 날까지 정처 없이 달려온 인생, 고생만 하시다가 먼저 가신 부모님, 어린 시절 한라산에서 공비 토벌을 나갔다가 잠시 집에 들른 경찰관 아버지에게 총 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졸라서 노루 사냥을 신나게 하고 노루 고기까지 맛있게 먹고 나서는 무단 총기 사용으로 아버지가 계급이 순경으로 강등되도록 만든 철부지 노릇했던 서너 살 때의 아련한 기억, 정말 평소에 그렇게 엄하시기만 했던 그 아버지도 그 때만은 아들을 탓하지 않고 너그럽게 안아준 후에 본 대로 복귀하셨는데, 아마 내가 너무 어려서 철부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경찰관들은 그렇게 다 사냥을 하곤 했지만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문제가 된 이유는 향토 경찰이 아닌 공비 토벌 차 수도권에서 파견된 군 지휘관에게 걸렸기 때문이었음을 크고 나서 들어서 알게 되었다. 그런 부모님들이 저 세상으로 가신지도 수십 년이 되었는데 왜 하필 오늘따라 평소에 떠오르지 않던 부모님 생각이 나지? 

오만 가지 상념으로 뒤척이다 늦잠을 잤다. 8 시가 넘었다. 아침을 먹고 시내 구경을 나가려다가 생각해보니 배는 여전히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24 시간을 더 바다를 달리고 내일 아침이 되어야 이태리에 상륙하게 된다. 가족들이 모여서 간단하게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오늘은 가장 무도회와 댄스 파티가 있고 Baby Girls 들의 선상 축제 퍼레이드가 있는데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우리 손녀 딸이 참가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왕관을 쓰고 드레스를 입고 참가한 55개월 짜리 손녀의 앙증맞은 사진은, 내 딸이 게재에 반대했기 때문에 혼자 보기에는 아쉽다. 다른 서양 아기들 사진들도 함께 찍힌 것이 있지만 혹시라도 프라이버시와 초상권 침해 문제 가능성 때문에 올리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오늘은 시간이 많으므로 갑판에서 일광욕을 하면서 낯선 사람들과 통성명도 하고 바다 경치를 좀 구경해야 하겠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인데도 지중해의 유람선 선상에서 영접하는 한 낯의 햇살은 따가웠다. 선 글라스와 중절모를 쓰고 15층의 후면 갑판으로 나갔다. 벌써 수 많은 선탠 족들이 자리를 잡고 야외용 간이 소파에 들어 누워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쭉쭉 빵빵 영화에서나 봤음직한 한 미모 하는 몸매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미끈한 금발의 인어 아가씨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물고 대부분은 러시아의 중년 여성들을 연상하게 하는 우람한 중년이나 노년의 부부 동반 족이 대다수여서 솔직히 살짝 실망이었지만 나도 내 나이와 분수를 생각하면 몇 명의 미녀들이나마 공짜로 근거리에서 나란히 누워서 눈요기 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감지덕지 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도 한 자리를 잡고 웨이트리스에게 차가운 생맥주를 한잔 시켰다.. 누구 한 사람 이 동양인의 출현을 주시하거나 뭐라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으니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동양인은 나 이외에 없으니 나는 홍일점이나 청일점은 아니더라도 황일점은 된다고 엉뚱하게 착각하면서 정신 사납게, 그렇지만 넋을 놓고 미녀의 쭉쭉 뻗은 다리들을 안 보는 척 하면서 훔쳐보고 있는데, 50 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뭐라고 얘기를 걸어왔다. 영어도, 독일어도, 불어도, 스페인어도, 그렇다고 이태리어도 아닌 말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말은 안 통해도 내 옆 빈 소파에 일행이 있느냐, 한마디로 소파를 자기가 점유해도 되느냐는 질문임을 알아차리고 좋을 대로 하시라고 흔쾌히 자리를 선심 썼다. 미녀 아가씨였으면 더 좋으련만 어차피 내 소파도 아닌데 뭐…………”

영어로 통성명을 하고 보니 이 사람은 노르웨이에서 목공 일을 한다고 했다. 피서가 아니라 피한을 위하여 아내와 함께 휴가로 왔다고 했다. 일본인이냐고 물어서 한국인이라고 하니 다소 의외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영어가 국어냐고 물어서, 노르웨이의 국어가 영어라면 한국도 그럴 것이라고 답해줬더니 깔깔 웃었고 그런 사이에 우리는 서로를 알아갔다. 목공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전혀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거의 전부 전동 기구이거나 자동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술 한잔을 사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는 술을 못 마신다니, 술도 못 마시는 노가다라니 의외였다. 그러나 자기 천직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 북구인(北歐人)에게 신뢰가 갔다. 그런데 노르웨이에서는 몸으로 때우는 기술자가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일년에 8 개월 정도 일을 하고 나머지는 개 썰매나 순록 썰매, 빙원(氷原)에서 스키를 탄다고 했다.  그는 커피를, 나는 맥주를 시켜서 마셨다. 초면에 커피 값을 내가 낸다고 하니 사양을 했지만 내가 계산을 했더니 이 친구, 경우가 너무 밝았다. 술을 안 마시지만 나를 위하여 술을 한잔 사주겠다고 해서 나는 선상에서는 모히토(럼주로 만든 칵테일)가 어울릴 것 같아서 한잔 추가로 시켰고 계산은 그가 했다. 친해지다 보니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목공으로 한 달에 900 만원 정도를 번다는 사생활까지 듣게 되었는데 년 평균 월봉으로 그런 것인지 일이 가능한 8 개월만 그렇다는 것인지는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크루즈 여행을 그간 많이 했느냐고 물으니 처음이라고 해서 나도 그렇다고 했다. 그 때 동양인으로 보이는 부부가 나타났다. 40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이 동양인 부부가 얘기를 하는 것을 들으니 유럽 어느 나라에 정착하여 사는 중국계 사람으로 보였다.  그들도 모처럼 동양인을 보게 되니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탐색을 하려고 내가 말하는 것을 안 듣는 척 하면서 유심히 듣는 것 같았다.

유럽인들이 보는, 한국인이나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 등 동양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고 미주인(美洲人)들이나 유럽인들에게 물었을 때 그간 매 번 들은 대답은, 동양인들은 해외에 나와서도 자기 나라 사람들 하고만 어울리고 대화를 하는 폐쇄적이라는 점, 그리고 친한 서양인들의 솔직한 답변은,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 특히 중국인들은 더욱더 남을 의식하지 않고 공중 장소에서도 너무 시끄럽다는 얘기를 듣고 매번 쥐구멍에라도 들어 가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한국인들도 해외 여행을 많이 하면서 공공 장소에서는 목소리를 낮추는 추세가 확산되는 것을 보게 되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인들이 폐쇄적이라는 지적이 싫어서 해외에 나가서 외국인과 접촉할 기회가 되면 가급적 한국인들보다는 외국인들과 폭 넓게 접촉을 의식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처신이 일행인 한국인들에게는 간혹 오해를 받은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한국인 친구들도 언젠가는 나의 처신을 이해할 날이 오리라 믿기에 걱정하지는 않는다. 한국인들도 국제 무대에서 서구인들과 어울리며 당당하게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 혼자라도 보여줌으로써 한국인에 대하여 소극적, 폐쇄적이라는 서구인들에게 각인된 부정적 인상을 불식시켜야 하겠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을 나는 갖고 있다.  

나의 국적을 가늠하지 못한 중국인 부부는 잠시 동안 뱃전을 맴돌더니 곧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 중국인 부부 중 부인과 이틀 후에 승강기 안에서 조우하여 서양인들이 동양인에 대한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는 현장에 함께 하게 될 줄은 그 때까지는 꿈에도 몰랐다. 하여간 중국인들만은 피하고 싶은 것이 현재의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 날 갑판에서 노르웨이인을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된 사실은, 서양인들도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크루즈 여행이 일상화되어 있지는 않음을 알게 된 점이고, 또 한가지는 동서양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수컷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미녀들을 좋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빈 말이겠지만, 노르웨이에 오면 꼭 자기를 찾아오라는 사람 좋은 노르웨이인과 작별하고 선실에 돌아오니 아내는 연속극에 넋을 놓고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갈라 쇼 장에 가서 어설프지만 살사(Salsa) 춤도 배우고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폭스-트롯도 두 곡을 췄다. (엉덩이를 살살 돌리는 살사를 남자가 췄다는 사실이 솔직히 좀 쑥스러웠지만 현장에서는 배꼽을 잡은 것도 사실이다.)

• 5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