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 소나기는 시름을 씻어가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는 업보를 떠나

세상 끝으로 몰고 가는 듯한 공포를 안겨준다

촉촉하게 내리는 비는 쓸쓸하거나 성가시게 여기는 이 없잖겠지만

삼류영화 낡은 스크린 화면에 입모양과 엇갈리는 성우들의 변사에 아랑곳 않고

면사무소 마당에 비료포대기와 가마니에 쪼그려 앉은 어린 자신을 떠올려 보며

추억과 그리움 속으로 빨려드는 이 의외로 많을 듯하다

그땐 어지간한 비는 맞으며 자리를 지켰었고 여기에 카메라맨도 어쩔 수 없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스크린에도 장대비가 내렸었다

그리고, 탁. 피리리릭…….하면

필름이 끊어진 것이고 야유와 원성 속에 다시 돌아가는 장면은 밑도 끝도 없었지.

지금 피식 웃게 만드는 그때 절박했던 모든 일.

그때 실소했지만 지금은 인생을 바꿔버린 일들이 빗줄기타고 상념처럼 쏟아져 내린다.

추억하면 제목처럼 선명하게 떠올려지는 게 아마도 첫사랑이 아닐까.

가로등 아래서 비에 젖어 궁상떨며 “불 꺼진 창”을 수 십 번을 되부르다

눈밭 강아지가 좋아서 뛰노는 게 아니라 발이시려 그런다고 하시고

비 맞은 강아지의 궁상은 털이 젖어 무거워서 그런다던 할머니가 떠올라

이 손자는 지금 마음이 시리고 사랑의 날개가 젖었다고 투정부리다가

내 첫사랑을 바래다주고 돌아가며 흙탕물 한 바가지 뒤집어씌우고 사라지던

부자 집 뺀질이를 따라가며 죽여 버린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그나마 비닐우산이 가려주었던 어깻죽지마저 다 젖어 결국은 새앙 쥐가 되었지

그렇게 모두 지나간다는.

너무 많이 들어 헤프게 흘렸던 그 말속의 진액이 갈수록 강하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가는가. 내가 벌써 이만큼 죽었는가........ .

따로 또 같이 매달렸던 추억의 방울들이 알싸한 그리움으로 창을 타고 흐르고

무딘지 어리석은지 추억을 먹는 나인 줄 알면서도 아직 추억을 쌓는다고 믿는다.

40엔 30을 그리고 이제는 40을 엊그제라 생각하고 오늘을 애써 부정하면서

그리움이 있어 외로움을 자주 느끼면서도 굳이 태연하려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인생이라면 지금이 어쩌면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처럼 처연한 시기인지 모른다.

푸르른 시절에 좋아하던 비는 어디선가 사랑이 찾아 줄 것 같은 막연함 이였다면

지금 좋아하는 이 비는 자주 보지 못하는 하늘에 추억들이 매달렸다 떨어짐인가

문득 한 여름의 강렬한 햇살아래 푸르게 펼쳤던 젊은 날의 꿈과 야망을 복기하다가

그때 당연했던 패기가 거친 행마였다는 것을 알고  얼굴 붉혔다 싶은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선명한 주름살 위에 흑백으로 울긋불긋하니 잠시 서럽다.

진공상태로 창을 바라보다 선팅지 줄 따라 빗방울이 올망졸망 붙었으니

조금 전 복구 불능으로 던져버린 한판의 바둑판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일상에 쫓겨 바둑을 잊었다가 인터넷을 접한 지도 십여 년이 넘었다

바둑이라면 그래도 깊은 맛의 된장찌개와 총각김치에 가마솥 국밥이라

기원을 고집하다가 어느새 마요네즈와 스프 같은 간결하고 편리함에 젖어

모니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우연히 인연을 맺은 게시판에서의 도리깨질도 한 몫 하지만.

중독은 아니라 해보지만 쉬는 날 5시간 이상 평상시에도 두어 시간은 죽친다.

아버지의 잘못 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여자와 도박을 멀리했지만

잠깐의 도피적인 날이 있었어도 기실 인내하지 않아도 투기와 도박엔 흥미가 없어

대창에나 게시판에서 접하는 기우들의 배팅애환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렇게 밋밋하게 게시판과 바둑판에 나의 상념들을 도리깨질 해보는 것이 일상이지만

예선 던이 있어 쓸 자리 고민하고 없어 절박하지도 않으면서 딱히 심심할 사이가 없다

쉬는 날 틈틈이 설거지랑 밥이랑 집안 청소하는 건 눈의 피로도 식힐 겸 일거양득에다

그저 담배와 커피만 있으면 잔심부름 없이 온종일 잘 노니 바가지꺼리가 있을 리 없고

저녁이면 수고했다고 주안상 차려주면 경우와 사람의 도리나 읊조리면서 취하면 되니

대장부 삶을 모른다 한들 어쭙잖게 나이 들어가면서 더 이상 바랄 게 있겠는가.

외로움이 낯설지 않고
사랑이 떠나가도

그때처럼 슬프지 않은 건

이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혼자가 좋다.

적당한 외로움을 찻잔에 띄우고
약간의 고독을 담배 한 모금에 담아 길게 내뿜으며

창에 매달린 그리움들을 하나하나 세어본다

그렇게 인생은 빗방울을 모아 강으로 흘러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