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다소 불공평한 면도 있지만 나름 그 매력에 사는 맛을 느끼는지 모른다.

스포츠가 동등한 조건에 예상 가능한 둥근 공으로 겨루는 경기가 주를 이루지만

럭비 같은 과격하면서도 불규칙한 공으로도 스릴 넘치는 경기를 할 수도 있으며

단순할 것 같은 둥근 공으로도 수많은 기술이 들어가 변수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 개개인의 생물학적 능력과 환경의 효율적 활용 등 복합적인 조건이 많다

인생 또한 존재의 가치는 동등하게 주어지나 삶의 질에서 경쟁의 연속이고 보면

충족조건에 의한 결과는 별반 차이 없겠다.

바둑에서는 누군가의 고심의 시간으로 빚어 낸 정석이 수많은 변수를 감안했으나

어느 부분까지 최선의 길이 되지만 전체를 보면 역시 그 변수를 가늠할 수 없으니

인생을 바둑에 곧잘 비유하는 이유가 상식의 한계와 무한의 변수 때문이 아닐까.

바둑은 정석 일상은 상식을 기본으로 하고 그 변화의 응용력이 곧 능력이 되지만

그것을 대가 없이 고루 분배한다면 인생도 바둑도 존재의 의미가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인생은 모자라기에 의욕이 생기는 것인지도.

그러나 승부를 떠나 어이없이 아니면 불가항력의 힘에 상식이 휘둘릴 때도 있는데

거기에 대응이나 응징의 가타부타를 떠나 우리는 허허 웃고 말 때도 더러 있다.

“어르신 고향이 어디요.”

술 냄새 풍기며 옆 좌석에 앉은 취객의 첫 마디가 고생길을 열어 놓는다.

분명 가게에서 나올 때 이를 대비해 차를 뒷좌석으로 유도하면서 세웠는데

굳이 앞으로 와서 탄다.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지금부터 인내를 해야 얼마간의 돈과 오늘 일에 지장을 최소화 할 수 있다.

대답이 없다.

흘깃 돌아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르신 고향이 어디요.”

아주 바리톤으로 깔아 유격대원 같이 몰아 붙이 듯 다시 물어왔다

“하하하 고객님 제 고향보다 목적지가 우선 인 것 같은데요.”

침을 두어 번 삼키고 서행을 하면서 재차 목적지를 독촉했다

“좌회전.”

“욱”

(이거 오늘 단단히 걸려들었구나.)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끝까지 자기 뜻을 관철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분류다

나의 웬수 아버지처럼.

방금 응급실에서 어머님과 교대하고 나왔는데 30여 년 동안 수차례 겪는 일이다

“가족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일단 마음 단단히 잡수세요.”

의사로부터 그 말도 응급실 찾는 횟수만큼 들어왔으니 이젠 웃음이 나온다.

허허허.

“여튼 하는데 까지 해봅시다.”

‘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리고 폐렴이 심각한데 CT를 찍고 와서는.

“다행히 이상은 없습니다만…….

의식불명을 이유로 다시 MRI 찍기를 거의 강요한다.

팔순 노인이고 뇌졸중 30년이 넘어 합병증에 체력저하로 수술도 불가능하다

“이런 사항에 이상이 있다 해도 뭔 조치를 하겠습니까.”

네가 뭘 안다고 이상 있으면 어쩔 거냐고 인턴 같은 젊은 안경이 몰아붙인다.

(짜샤. 나도 간병 30년을 소꿉장난 한 게 아냐)

별의 별 전문용어 강의 듣고 폐렴 환자를 그 비싼 뇌 사진까지 다 찍고 와서는

“다행히 뇌에는 이상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나야 짐작했지 자네가 더 걱정하더만.)

나는 그냥 덤덤하게 웃어주고 수고했다고 말하니 어색하게 웃고 가버린다.

이 천륜의 덫은 언제..........

“어어.”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았다

“아니 저 앞에 고정단속기 있는 거 몰라. 왜 이리 달리는 거야.”

이런. 그새 어르신에게 반말하는 싸가지하고는.

그래도 혹시나 하며 계기판을 보니 규정 속도로 달리고 있었으며

수 십 년 다니는 길이라 본능적으로 카메라가 감시하는 차로를 피해가고 있었다.

삐~익....... =3=3=3

머리 뚜껑 열리며 천정으로 하얀 김이 내뿜어진다.

“제대로 가고 있는뎁쇼.”

단어 하나하나 꼭꼭 씹히는 모양이 내 이빨사이로 보였는지.

“아 어르신 그렇다는 말인데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래.”

어쩌구리.

이제는 일류중국집 주방장이네 말을 짧게 그리고 맛있게도 반죽하여 내민다.

“좌회전.”

후~우

업이로다.

한숨을 내쉬고 하자는 대로 깜박이를 넣고 차를 돌리는데.

“아아아. 이 양반 진짜. 장난하나 지금 뭐하자는 거야.”

“좌회전이라 메.”

드됴 나도 터져 버렸다

“그래 좌회전이라는데 왜................”

맞고함을 지르던 화상의 말이 끊어졌고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좌회전은 막다른 길.

운전대에 머릴 얹고 쳐다보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모르나. 말을 잘못 할 수도 있지.......

그래도 끝까지 자신을 정당화 시킨다

“이것 보슈. 세상사 다 피곤해유. 도대체 목적지가 어디유........”

다시 부드럽게 목적지를 물었다

“아예. 어르신 미안하게 됐심다. 실내체육관으로 갑시다.”

그래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뭐.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방향을 돌렸다

“네~. 진작 그러셨으면 제가 알아서 모셨죠. 뭔 일 있으신가요. “

어라 차차.

그대로 침묵해야 되는데 어색한 분위기 반전을 꾀하다가 또 매를 벌었다.

그때부터는 다시 카드로 돈 잃은 이야기를 구구절절 들으며 가야했다.

그리고 내가 듣든 말든 교차로마다 직진 좌회전 우회전 단속기 앞 서행지시는 여전했다.

“다 왔습니다 손님.”

팔공산에서 실내체육관까지 30여 분간의 긴(?) 여정이 끝났다

그나마 이정도면 무사한 편이라 한숨 돌리는데.

“잠깐만 기다리쇼. 내 금방 들어갔다 올 테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린가.

그동안의 경험이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고 그 황당했던 일들이 왈칵 덮쳐온다

다시는 안 당하리라 하면서도 여 중고생에 할머니까지 당했었다

그리고 차를 돌리기도 어려운 골목 구석까지 끌고 와서 기다리라고라.

“아니.........”

뭐라고 말하기도전에 벌써 내리고 문까지 닫힌다. 거기다 소지품은 죄다 챙기고.

(이런 시팔. 지~인짜 한도 초과하네)

“인간아. 내가 한두 번 당했어야 믿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따라가려고 하다 다시 주저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문다.

후…….=3

호출 손님이니 연락처가 남아 있고 지금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에서 상황이 악화되면

자칫 사고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

(그래. 피하자.)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마침 차들이 지나가지 않았고 5분쯤 지나니 화상이 나타났다

그 상황에서 5분은 엄청 긴 시간이다.

“자 갑시다.”

“................”

“돈 가지러 간 게 아니고요.”

“아 내가 현찰을 주고 싶어서 그래요 가까운 농협에서 찾아 줄 테니 출발해요.”

사실 카드도 되지만 그땐 깜박했고 우리는 결재가 보통 4~5일 걸려 좀 기피한다.

지금은 현찰이 아쉬운 때라 그러자고 했지만. 아까 내가 그런 말 했던가 싶다

“지금 12시가 넘었는데 24시 하는 곳은 너무 멀어요.”

“아. 내가 이 동네 방범대장이고 우리 동네는 항상 찾을 수 있어.”

방범대장하고 현금인출하고도 연관이 있나.

(술 퍼마시고 늦게 돌아다니는 방범대장이라면 한 때 내가 원조지. )

이제는 돈 자랑에 옛날 한 가닥 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으니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 놈의 아파트는 7채 있다가 한 신호 지나면 5채가 되고 다시 늘어났다.

잠시 후 그가 말한 농협에 도착하였지만 깜깜하다

“여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안되긴 왜 안 돼. 어제도 찾았는데. 차 세우고 잠시만 기다려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나오기 전에는 불안했지만 이젠 그런 걱정은 좀 사그라졌다

(그래 오늘 같이 함 놀아보자. 전. 현직 방범대장끼리.)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 그래도 심적으로 안정이 되고 조금 여유를 찾았다

하는 행동은 가관이지만.

결국 어둠속에서 뭘 했는지 투덜거리며 나온다.

“어제도 찾았는데.”

“하하하. 시간이 다르겠지요.”

미터기는 돌아가지만 돈 자랑에 전직 한가락 곡조도 지겹고 이런 경우는 끝이 불안하다

빨리 수습해야 하는데 그때서야 카드결재가 떠올랐다.

“손님 뭐 쓸데없이 미터기만 돌아가고 피곤하실 텐데 카드로 하시죠.”

“카드도 되요.”

“네~~~”

아. 드디어 마무리 하는가보다 했는데.

이 아저씨 속내는 돈을 찾아서 팔공산의 복수혈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제일 큰 농협으로 갑시다.”

“농협본부가 10분 거리에 있지만 거기도 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24시 운영은 그만큼 유동인구가 있는 곳에 설치하죠. 크고 작은 것보다.”

“아아. 일단 가봅시다. 어르신은 손해 볼일 없잖아.”

그렇게 우리는 심야데이트의 종지부를 찍는 황당역을 향해 밤거리를 달려갔다.

다시 달려 온 곳은 농협 경북 대구지역 본부다.

“여기도 꺼졌는데요.”

“아니 본부에 왔는데 안 되면 말이 안 되지. 차 세우고 기다려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고 성큼성큼 어두컴컴한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이 사람아. 암 돼지고 숫돼지고 간에 불이 꺼졌잖아.)

그런데 불이 꺼진 건물 안으로 문을 열고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가.

안에는 절전용 인출기라도 있는가보다 생각하고 잠시지만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산소 호흡기를 꼽고 호스로 죽을 넣어가며 생명을 연장하지만 이번엔 힘들겠다.

아무래도 임종을 각오하시라는 이전 병원에서 담당의사 말에 그래도 그렇지 않다며

응급차로 큰 병원으로 옮겼다

가산 탕진하고 뇌졸중 30년 넘은 웬수에게 무슨 애틋함이 있었겠나.

천륜의 덫에 걸린 자의 도리에 대한 몸부림일 뿐.

폐로 음식물이 들어가 염증을 유발했고 수술도 불가능하여 약물 치료에 의존하나

팔순 노인이 그동안의 삶이 가상할 뿐 이제는 의지나 집착으로는 한계에 왔다.

얼마나 모진 인연인가.

그러나

보내드려도 무방하다는 의사의 말과 그 많은 한스러움도 죽음 앞에선 모질 수 없었다.

의식불명 상태에 눈동자도 멈추었고 가는 숨길만 까닥인다.

의사와 간호사가 가슴을 흔들며 계속 고함을 친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전혀 움직임이 없고 몇 번이고 플래시로 비추어도 눈동자의 반응이 없다.

나를 보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하지만 나는 서럽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대로 의식 한번 돌아오지 않고 가시게 둔다면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 귀에 대고 말했다

“아버지 가실라고요.”

“그래도 눈 한번 떠보고 그동안 수고했다는 눈짓이라도 함하고 가소.”

“나하고야 그렇더라도 어무이에겐 그래야지요.”

“그리고 곧 설이고 아버지 생신도 있는데 그거라도 챙겨 드시고 가소.”

“내말 들리거든 따라가던 친구 손 놓고 고개 끄덕여 보소”

흔들지도 않았고 그리 큰소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약하게 턱이 움직였다

모두 보았고 의사도 다시 달려들었다

나는 다시 귓가에 대고 말했다

“아버지 아직 가시기 싫으면 힘내소. 생일 밥이라도 챙겨 드시고 가소”

“내 말 들었으면 고개 끄덕여 보소.”

이번엔 아까보다 더 확연하게 끄덕였다

부랴부랴 간호사와 의사가 링거와 산소호흡기 그리고 코로 호스 넣었다

다시 살아났다

잠시 의식이 돌아 왔지만 회복은 힘든 상태고

담당의사의 말과 여느 때 몇 번이고 회생한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퇴원하면 죽는다.

하지만 병원에 있어도 생명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부터는 내가 결정하기에 달렸고 주변에서도 포기하라는 권유를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가실 때 그 죄스러움과 허탈감에 비교되지 않아도

어머님이 이런 상태라면 나는 의사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절규할 것이지만

애정이 다를 뿐 도리는 별반 차이가 없다.

최선을 다한다.

“앗. 뜨거”

잠시 생각하는 사이 담배가 다 타들어갔고 손가락을 데었다

부아가 치밀어 시팔 니팔 하다가 그 화상이 아직도 안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10여분이 지난 것 같은데.

뭐고.

다른데 신경 쓰는 사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건물 쪽으로 다가가보니 컴컴한 곳에 뭐가 있을 리 없다

갑자기 허탈감에 다리가 풀리는 것 같다

어이가 없어 하늘을 쳐다보니 별도 달도 나를 비웃는 듯.

하아.

한숨을 땅이 꺼지라 몰아쉬는데 안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바짝 다가가보니 그 화상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가슴을 쓸어내리고 따질 요량으로 문을 잡아 당겼지만 이게 뭔 일인가.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우랄 질 놈이 있나 지금 안에서 걸어 잠그고 나랑 뭐하자는 거야.)

내가 큰 유리문을 두드리면 고함쳤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요.”

그러자 화상도 안에서 문을 광적으로 흔들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문이 안 열려.”

“....................................”

갑자기 상황 정리가 되지 않았다

들어 간 사람이 안에서 문이 안 열린다니.

그래서 112에 전화를 한 것 같은데 내 눈에는 바깥벽에 걸린 캡스 전화번호가 들어왔다

일단 정황을 설명하고 출동하라고 한 뒤 바로 112 순찰차가 도착했다

경찰관이 나에게 묻는데 난 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안에서 화상은 쥐덫에 걸린 생쥐 마냥 이리저리 문을 흔들고 다녔고

경찰관과 나는 담배를 피우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나냐고 마주보며 웃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던 경찰 한 명이 캡스로 연락하라고 하기에 이미 연락 되었다하니

수고했다며 담배를 한 대 권했고 우리는 다시 건물 안을 쳐다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관과 그렇게 편안한 자리를 한 것도 첨이다.

어이없는 상황에 웃고 있다가 갑자기 내가 저 덫에 걸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천륜이라는 창살로 만든 덫에.

이윽고 캡스의 출동으로 상황은 종료되고 혼이 난 화상은 집으로 가자고 했다

얼이 빠졌는지 갈 때는 수월하게 갔고 결국 카드 결제로 종료 된 시점에서 보니

무려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소요 되었다.

정 나지 않는 인간과의 한밤의 데이트 그리고 아버지와의 모진 천륜의 여행.

나도 저 인간처럼 덫에 걸려 허둥대고 있는 삶일까.

나는 누가 문을 열어주지.

뒤뚱거리며 골목을 돌아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다가 올 나를 떠올리니 자신이 두렵다

그동안 그 어떤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모진 대사가 아직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