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구로 생각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바둑사이트 오로에서 만난 청도선비(내가 부르는 애칭)라는 분이 있다

인품이 워낙 선하여 흔히 말하는 법 없이 살 그런 사람인데

나를 아는 그러니까 예전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의외로 여길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니 운 좋게도 선한 친구들이 몇 있다는 게 참 든든하다

나는 10년 지기지만 이름도 모르고 만나는 사람이 허다하고 그도 본명은 모른다.

아무리 호감이 가고 나에게 그렇게 다가와도 사생활은 금기로 여기는 탓이다

가끔씩 나에게 의사를 물어 오는 경우에 주워듣고 나면 그 이상은 알려고 않고

내가 쓰러지기 직전에 만나 하소연 들어주는 사람은 예외지만 드물게 있을 정도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사생활이 봇물 터지면 나도 감당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의 사생활을 아는 건 귀농했다는 것과 같은 보훈 가족이라는 것뿐이다

부친께서 얼마 전 지병으로 별세하셨는데 문상을 갔다 문득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6.25 참전 용사로 또 다른 연민을 느끼게도 하는 부분인데

병원 간병을 농사철에 2~3달가량 했던 것으로 기억하니 한편 안타깝기도 했더랬다.

나는 20살쯤에 시작해 아직 이러고 있으니 30년이 넘었으나

그 백배를 넘게 한 경험으로 나로선 일상이 되었지만 처음 겪는 마음은 알 수 있다.

우리 세대의 교육에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실과 불우이웃돕기 이승복과 6.25가

정서적으로 큰 자리를 차지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충혼탑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중학교 때 까지 위문편지를 썼으며

연말에 다가오면 사회로 뭔가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아마도 그때의 참전 용사들이 이제 남은 분들이 얼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왜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국군아저씨로 자부심을 느끼지 못했을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를 여느 우국충정에 못 미치겠나 마는

이유는 그 후 수신제가를 하지 못한 탓이다.

허긴 나라를 살리겠다고 나선 몇몇 나라님들도 집구석 교육은 개판 이더라마는.

그런데 말로 국민의 자유를 찾아주는 대가는 천문학적인 숫자고

똑 같이 국민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은 사람들은 왜 가난하게 사는 걸까.

그 친구의 아버님은 현충일이면 꼭 동행하여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기억이 없다

내 어릴 때 기억은 밤새도록 담배 피우며 노름하는 아버지와 꾼들의 틈새 잔 것과

갑자기 마귀로 변해 엄마를 두들겨 패는 원수 같은 아버지의 화상이었고

그때마다 3남매는 구석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그냥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후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주먹질 하고 다닐 때 내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면서도

칼에 찔린 친구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어도 나보다 친구부터 살피라 했었고

사람들이 오가는데 말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도 내가 심각한 상황인 줄 몰랐었다

몇 칠 후 어머님을 알아보고는 짐작했었을 정도니.

군에서 코 앞 적들과 대치 할 때도 그 때의 죽음에 대한 공포에 비교할 수가 없다

그때 처음 신을 찾았고.

어쩌다 비명소리에 달려 온 옆집 아저씨는 우리에겐 구세주였었다.

그마저 구원의 손길이 없을 때 엄마는 실신했는데 나의 선택은 오직 하나였다

밤에는 달걀귀신이 무서워 화장실도 못 가던 나였는데

어떻게 용기가 났었는지 근 오리 밤길을 내달려 파출소로 뛰어 들었다

“우리 아버지가 또 엄마 때려요.”

“우리 엄마 살려주시고 아버지 좀 잡아가세요.”

“우리 아버지 제발 좀 죽여주세요.”

“으아앙.”

그렇게 파출소에 쓰러져 목 놓아 울어 버렸다.

그때는 순경 아저씨들이 나쁜 사람을 잡아가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훗날 알았지만 아버지가 당시는 순경아저씨들을 죽이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다가 언젠가 부터는 훗날 몇 백배 돌려주리라 어린 마음속에

서슬 퍼런 칼을 품고 있었다.

온몸과 얼굴의 시퍼런 멍을 계란으로 문지르면 낫는 것도 그때 첨 알았다

울면서 계란으로 엄마 눈언저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엄마 나중에 내가 크면 아버지 더 많이 패줄게.”

어린 마음이지만 가슴깊이 새긴 말을 엄마를 위로 한다고 했다가

도로 흠씬 두들겨 맞았고 영문 몰라 하는 나를 끌어안고 엄마는 그렇게 슬피 우셨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면서.

초등 내내 아버지 서슬에 눌려 살아가는 동안 여럿의 여자들에게 새엄마 소릴 했고

그때마다 단보따리 끌어안고 떠나는 엄마를 따라가며 가지 말라고 애걸복걸 했었다

“동생들 네가 잘 챙겨야 한다.”

엄마 말에 고개는 끄덕였지만 이유를 몰랐다

엄마를 태운 버스 먼지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마냥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 후 수많은 아픔을 겪었지만

평생을 가슴 한 구석에서 또아리고 있는 멍에는 여동생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중 어느 여자와 사는 동안에(하도 많아서)

막내 여동생이(4~5살 정도) 그날따라 엄마가 보고 싶다고 너무 울어대는 바람에

그 벌로 우리 3남매는 돼지우리에 넣어졌고 놀란 돼지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했다

동생들은 새파랗게 넘어갔고 나도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앙칼진 목소리로 다시는 엄마소리 하지 않을 것을 다짐 받는 마귀 같은 여자에게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목소리 높여 소릴 질렀다

“이 시팔. 너는 진짜 우리 엄마가 아니잖아.”

그리고 무서워 매달리는 여동생의 따귀를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가스나야 울지 마라. 꾹 참고 기다려야해. 알았나.”

기다림은 엄마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어 돼지들을 구석으로 몰았다. 여기까지다

그때 돼지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었으면 아마 나도 쓰러졌을 것이다.

다행히 돼지들이 물러서는 바람에 나는 용기백배하여 손으로 돼지 똥을 쓸어 모아

그년에게 뒤집어씌우고 기겁을 하는 사이에 돼지우리 문을 넘어와 동생들을 빼냈다

그리고 기겁을 하며 몸부림치는 그년 앞에 나는 몽둥이를 들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 때 비로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그렇게 여유롭고 편안할 수가 없었다.

그년은 돌변한 나를 보고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좀 전의 내 여동생들처럼.

동생들에겐 친했던 엄마 친구 집으로 도망가라고 해 놓고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뿐이었고 돼지를 몰아넣고는 그년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소라야. 나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네 때문에 우리가 돼지우리에 들어 간 것이 원망도 되었지만

네가 너무 울고 있으니 그년이 더 기를 올리는 게 싫었고 나도 남잔데 하는 자존심에

엄마를 쫒아낸 그년에게 너무 구차하게 당한다고 생각 했던 것 같아

그래서 너에게 따귀를 올렸던 거야.

나도 너보다 두 살밖에 더 먹었냐.

아니다.

네가 막내였으니 두 살 터울이니 네 살이구나.

아마도 내가 여덟인가 아홉인가. 무엇보다도 사실은 내가 무서웠던 것 같아.

그리고 이듬 해 너는 이름 모를 병으로 죽었지.

엄마가 달려왔고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밤이 새도록 오지 않아 네 언니랑 무서워서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었다

아침이 밝아 밖에서 소란한 소리가 들리고 그 와중에 엄마의 통곡소리도 들렸단다.

반가움에 엄마~ 하고 달려 나갔을 때 엄마는 우리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기만 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은 아마도 그때 처음 느꼈을 거야.

엄마. 소라는......................

아이고.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살꼬. 아이고 아이고…….

엄마…….

소라가……. 소라가 죽었어?

엄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나를 끌어안았지.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마당에 쓰러져 하염없이 울었단다.

네 이름을 목 놓아 부르며.

그날 저녁 단 하루 밤 같이 보내며 나는 너를 끌어안고 밤새도록 용서를 빌었지.

내가 잘못했다고.

그리고 지금까지 네 생각이 나면 눈물이 나지만 꽃 한 송이 들고 갈 곳이 없고

가끔씩 잊을 때도 있었지만 살다보니 이제는 가끔씩 생각하게 되는 게 또 죄스럽구나.

후우,

병원 창밖으로 개미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분주하다

정초에 쓰러져 근 한 달 만이다.

퇴원 수속을 기다리며 잠깐 생각에 젖었다가 아버지의 탁한 음성을 듣고 정신이 들었다

젠장. 그새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내 똥 좀 누자.”

(그래그래 오냐 불쌍한 내 새끼)

다른 건 할 일이 없다 침대 커튼을 둘러 가려주고 기저귀 물티슈 준비하고 기다리면 된다.

30여 년 전부터 시작 된 일이나 그땐 그냥 싸버렸지만 이젠 통보는 한다.

아버지 당신은 나라를 위해 사선을 몇 년에 몇 백번을 넘었겠지만

나는 당신이 만든 지뢰밭을 30년 넘게 넘었소.

내가 당신을 자식으로 입양하지 않았으면 열 번도 더 죽은 목숨인 걸 알기나 하소.

이 원수야.

수 십 차례 응급실을 들락거렸지만 이번처럼 사경을 헤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보통은 일주일 내외고 길어야 열흘 남짓 했었는데 한 달이라니.

기본 계산서를 받아보니 무려 천 만 원 돈이다. 물론 보훈대상이라 혜택을 받겠지만.

“아버지 기분 어떻소.”

“좋다.”

집에 간다니 좋소. “

“응.”

다소 쉰 목소리지만 그래도 많이 또렷해졌다

“환자복 벗고 사복 입으니 인자 사람 같소. “

“자자. 날 보고 눈 똑바로 함 떠보소,”

시키는 대로 되도록 또렷해 보이려고 눈을 부릅떠 보인다.

그 때 설거지거릴 들고 나갔던 어머님이 들어와 같이 거든다.

“아이고. 당신 인자 사람 같구려.”

“방금 대변 보고 치웠소. 퇴원 기념이라고 그러나 나갈 때까지 참말로.”

우리는 그렇게 웃었다

꽃다운 나이에 버림받은 엄마가 무슨 정이 있을 것이며

그 험한 어린 시절도 모자라 갓 스물에 시작한 뇌졸중 간병에 난들 무슨 보람이 있을까.

업이거니 살아가는 어리석고 선한 사람들의 허한 웃음일 뿐.

중학교 때부터 맞아가면서 또박또박 대들었고 고등학교 때 노름꾼들과 애첩과 함께

벌겋게 단 연탄불을 집게로 집고 뛰어 들어 난장판을 만들었었지.

달아나다 지레 다리몽둥이 부러진 놈 휘두르는 연탄과 집게에 화상 입은 놈 …….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다.

뒤 늦게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에게 앵기며 도움 청하는 계집과 함께 엎어 쳤으니

당신은 평생 겪어보지 못한 수모였지만 나는 평생의 한풀이였소.

여동생을 잃고 몇 년간 정신 차린 듯 살아가다 다시 막내를 보았는데

그것도 잠시였고 다시 여색을 밝히고 끝내 외할머니까지 잡아먹었소.

엄마가 무남독녀라 외할머니의 전답을 이런저런 핑계로 다 팔아서 말아 먹고는

다시 엄마를 내 쫒아 버렸으니 할머니의 한을 어찌 풀겠소.

조만간 동생들을 데려가기로 엄마와 의논하고 같이 지낼 방을 구하고 있던 참이라

나도 집에는 자주 들어가지 않았기에 동생들에게 다짐만 해놓았소

조금만 참고 있으라고.

나는 이미 반항아로 공부도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동생들이라도 공부시키려

엄마는 식당으로 나는 섬유공장으로 취직하게 되었소.

내가 당한 어린 시절이 눈에 챙기는데 그 불쌍한 막내를 노름꾼들에게 방을 내주고

몇 푼 쥐어주고 내보내니 엄마 없이 자라는 것도 안쓰러운데 그놈이 갈 곳이 없어

학교 운동장 철봉 밑에서 혼자 모래 장난을 하고 있었소.

언젠가는 하고 벼르던 참에 천지를 헤매 막내를 그렇게 찾고는 내가 눈이 뒤집혀 버렸소.

어쩌면 죽은 여동생 소라가 내 몸을 빌려 그랬는지도 모르오.

그리고 출동한 경찰에 두 팔 꺾여 존속상해죄로 잡혀가 일주일 넘게 구타를 당했소.

당신이 지인을 통해 아예 반 죽여 버리라 했더군요. 그 맘은 이해하겠소.

엄마가 보증하고 다시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법적으로 접근금지) 나오게 되었소.

허나.

내 행동이 정당한 이유는 없지만 당신의 억울함 역시 사회로부터 양해되지는 않을 것이오.

그게 당신의 아버지 역할은 마지막이었소.

그리고 막내만 데려오고 여동생은 남겨뒀는데 그마저도 여동생은 부려먹기 위함이었소.

술도 안 마시면서 그렇게 모질고 잔 머리꾼이었는지.

그래서 신문기자로 악명을 휘날리며 자전거도 귀한 시기에 검은색 짚 차를 끌었겠지.

조금 전 그 막내가 아들 딸 데리고 병문안 다녀갔는데 보기가 어땠소.

그 때 데려와 대학까지 마치고 지금은 철도청에 다니며 안정 된 생활을 하고 있소

여동생은 엄마만큼 팔자가 센지 먹고 살기가 힘든 가 본데 나도 여력이 없다오.

뭐했느냐고.

인간답게 살았고 아버지 역할 제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이다.

한 하늘 아래 살아도 한 지붕 밑에선 살 수 없다는 할머니의 완고함 때문에

할머니는 집에서 모시고 당신은 따로 모시게 되었으니 이 또한 돈 먹는 일이고

내가 동생을 데리고 나와 초등을 마치고 군에 갔었는데

제대하기까지 5년 정도 당신과의 공백에 가난해도 우리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당신은 삼청교육대까지 들어갔다가 끝내 뇌졸중으로 쓰러졌소.

같이 살았던 애첩이 돈 되는 것 다 싸들고도 모자라 대출까지 해서 달아났는데

잡아 죽이려는 나에게 용서해주라고 했었소.

참 가지가지 한다 싶더이다.

그 때부터 내가 우리 집 가장으로 장기집권(?)에 들어가게 되었소.

물론 당신이 내 아들로 입양되는 시기고.

당신이 아버지였던 10여년과 내가 아버지가 된 30여 년은 그런 차이라오.

당신은 호의호식 했어도 나는 당신의 아들 때부터 당신을 입양한 지금까지

늘 몸과 마음이 허기지고 가난할 수밖에 없었소.

그러고 보면 당신께선 참 복도 많소.

젊을 때는 그때라고 그렇고 나이 들어 쓰러지고는 환자라고 그렇고.

그것도 가족을 부양하다 그랬으면. 그랬다면 이 편지 쓸 이유가 없겠지요.

할머니 당신 대신 호강시켜 드린다고 약속했지만 마음뿐이었소만

그래도 100수까지 모셨고 비바람 피해 삼시세끼 따뜻한 밥 공양은 했소.

치매로 10여 년 엄마와 갈등도 많았고 나도 포기하려 몇 번을 망설였지만

한계를 느낄 때 들쳐 업은 적은 있었어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소.

왜. 왜 그런지 아시겠소.

불쌍해서 그랬소. 불쌍해서요.

할머니를 다시 내려놓고 안타까워서, 안타까워서 그냥 소리 내어 울어 버렸소.

아버지 당신은 가족을 불쌍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소.

모를 것이오. 그 가슴 미어지는 아픔을.

할머니와 별보다 많은 이야기 중에 한 가지 들려드리리다.

나를 줄려고 이불속에 감춰 둔 도넛은 내가 사드린지 일주일도 넘었던 것이었소

아무도 없을 때 그것을 나에게 내미는데 썩는 냄새가 물씬 났었소.

손수 비닐을 벗겨 내밀며 환하게 웃으며 나의 손을 잡고 먹기를 재촉했소.

잠시 당황했지만 먹는 시늉만 하고 버리려는데 할머니의 그 만족스런 웃음과

꼭 잡은 손을 뿌리치지 못했소.

그런데 한 입 먹은 순간 역겨움이 치밀었지만 할머니 성의에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배 고팠제.”

할머니의 그 소리에 가슴이 탁 막히더이다.

그리고 영문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이 빵을 흠뻑 적시니 그 맛을 짐작이나 하겠소.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소.

그 후론 구석구석에 음식물이 나와 다시는 그럴 수 없었소만 치매 할머니도 그랬는데

술도 안 드시는 당신께선 가족에게 어찌 그리하셨소.

다른 사람은 다 몰라보고 모두 도둑년 놈들이라 했었지만 나는 알아보았고

내말은 잘 들어 주었소.

엄마도 당신을 내다버리려 한다고 나보고 일 나가지 말라고 애원한 적도 많았소.

늘 하시던 말씀이 “ 나는 니만 믿는데이.”였었소.

그리고 당신과 같이 쓰러졌다가 그다음 날 나와 늘 하던 하이파이브를 하시고

그날 저녁에 자는 잠에 가셨고.

당신은 의식불명에서 다음 날 아침 깨어나셨소. 모두 할머니가 양보 하셨다고 했소.

벌써 4년이 지난 일이 되었지만.

할머니 치매 10년에 100수까지 모시고 당신 30년 넘게 간병하면서 도통한 게 있소.

세상 사람들에게 그 부담스럽고 힘든 효자 효녀 되려고 노력하지 말라 권하고 싶소.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나도 효자라 이 긴 간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 도리 하느라 메운 시간이었소

나는 결코 효자가 아니라 도리와 의무에 성실하려는 한 인간일 뿐이오.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나 당신에 대한 천추의 한이 있더라도 모두 내 자식이니까.

부모로서 도리를 찾은 것이란 말이오.

효자 효녀타령은 내 경험상 다 가식이요 연극이요 고통스런 인내의 가시밭길이요

인간이 좀 간사하고 감정의 기복 또한 여간 아닌데 어찌 도덕경처럼 섬기겠소.

그나마 인간다우려면 부모가 나이 들면 자식으로 입양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하게 되었소.

야단도 치고 어부바도 하고.

빈부를 떠나 나와 당신과 환경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솔하되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며

대신 죽을 수 있는 책임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가끔은 제 잘나 그런 줄 아는 막내가 섭섭하기도 하지만 나는 나에게 늘 대견해 했소.

그리고 할머니 100수 하신 것도 내 자부심이고 원수 같은 당신을 자식으로 입양한 것

마지막으로 그동안 모자지간이라기 보다 간병 전우였던 엄마만 잘 모시다 보내드리면

나는 염라대왕에게 술 석 잔은 요구할 수 있소.

그리고 살다 피치 못해 지은 업을 다 갚지 못했다면 기꺼이 지옥으로 떨어지리다.

세상에 귀한 것 많다 해도 사나이 인생에 이 보다 더 한 부귀영화가 있겠소.

말 한 마디 섞기도 싫은 사람이었는데 막상 가시려나 하니 참 할 말이 많구려.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치며 문득 당신께 몇 자 넣어 보내고자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말도 주절주절 길어졌지만 다시 퇴원한다니 솔직히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겠소.

일단 말미를 받았으니 이 편지 내 마음 추스르는 방에 잠시 보관해야겠소.

그래도 당신이 남긴 유산은 있소

당신께서 만든 척박한 환경 탓에 나는 성실하고 진솔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소.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아버지.

엄마도 열녀가 아닐 뿐 아니라 나도 절대 효자가 아니외다.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은 그저 평범한 모자지간으로 서로가 위로 될 뿐이라오.

내가 가장 허탈해질 때는 이 모든 역경을 같이 한 내 전우 엄마의 마지막을 보는 것이고

아마 나도 그때쯤엔 목표를 잃고 이 악착같은 삶의 이유를 놓겠지요.
2014년 정월과 설을 우리는 그렇게 병원에서 보냈다오

그리고 말이요 당신과 나의 극단적인 차이점이 또 하나 있소.
솔직한 심정이지만 마누라에게 술김에 털어 놓았다가 내가 쫓겨났다는 것이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