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탕

아내와 딸과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딸이 할인 쿠폰을 구했다.
“밀집지역에 가지 말라 면서 영화 할인 쿠폰을 주는 것은 또 무슨 짓인가?”
딸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우리는 셋이 합해서 구천 원 싼 값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관객은 열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했다.
나는 영화 제목도 모르는 상태였다.
기상학자와 열기구 조종사가 열기구에 타고서 벌이는 모험, 스릴, 감동, 액션이 100 분 동안 이어지는 영화였다.
손에 밴 땀이 식을 줄을 몰랐다.
마스크 밖으로 나와 아내가 지르는 비명이 주위에 퍼졌다.
주변에 관객은 없었지만 딸애가 손으로 치며 우리를 제지시켰다.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고서야 영화제목이 [에어로 너츠]인 것을 알았다.

영화가 끝나고 저녁식사로 감자탕을 먹으러 갔다.
뼈다귀에 붙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파먹으면서 아내가 말했다.
“애야, 아빠 먹는 것이 빡빡해 보이는데 술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해줘라.”
딸애가 허용할 리가 만무했다.
나도 전날의 모임에서 과음한 탓으로 별로 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참았다. 감자탕의 얼큰한 국물이 갑갑한 속을 잘 달래주었다.

아내가 두 쪽 반, 딸애가 두 쪽, 내가 한 쪽 반을 먹고도 아직 뼈다귀 두 쪽이 더 남았다.
 모두 배가 불러서 남은 두 쪽의 뼈다귀와 먹던 감자탕 국물을 포장해달라고 했다.

이튿날, 점심때에 포장해온 감자탕을 먹을 줄 알았다.
집안에 제사 지내고 남은 청주가 서너 잔 쯤 있어서 감자탕과 함께 마시려고 했다.
 이제 속은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그런데 딸애가 점심에 냉면을 끓여 먹자고 했다.
“뭐 그것도 괜찮지.” 술은 저녁때 마시면 되니까.

문제는 저녁때에 터졌다.
딸이 배가 부르다며 저녁으로 간단하게 김밥을 사먹자고 했다.
 나는 당연히 반대였다.
술을 마시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저 배부르다고 계획을 변경시켜? 절대 안 되지.
딸애가 아무래도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꺼림직 했는지 다시 감자탕을 끓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밥 귀신인 아내가 이미 김밥 얘기를 들은 뒤였다.
김밥소리가 아내의 귀에 꽂히자마자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었다.
아내는 김밥을 사러가기 위해 벌써 옷을 갈아입었다.
딸애와 아내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간다는 아내와 말리는 딸애.
내가 보다 못해 김밥을 먹겠다고 양보했지만 이미 열 받은 딸애가 감자탕을 끓이고 말겠다고 우겼다.
아내를 붙잡아 놓고는 쿵쾅거리면서 감자탕을 끓였다.

끓여 논 감자탕을 앞에 놓고 나는 밥을 먹었다.
 아내는 저녁을 굻겠다고 선언했다.
감자탕은 입에 맞지 않는다고.
“아니, 어제 저녁에는 맛있다고 두 쪽 반이나 먹어놓고 뭔 말이여?”
내가 핀잔을 주었다.
저녁을 먹어야지 약을 먹을 수 있는데 저녁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딸애가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밥만 먹고 술은 마실 수가 없었다.
만약 술을 마시면 즉시 공격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 그래, 그거였어요? 결국 술을 마시기 위해서 감자탕을 먹겠다고 우겨댄 것이었구먼.”

조롱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는 방법을 생각했다.
자기 최면을 거는 거였다.
실제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술을 한잔 마셨다. 아 취한다. 기분이 좋구나.”
이 방법이 통했다. 그런대로 맛있게 감자탕으로 밥 한 그릇을 비웠다.

딸애가 약을 치우며 말했다. “엄마, 약도 먹지 말고 저녁도 굶으세요.”

저녁 설거지는 내 차지가 되었다.
감자탕 기름 때문에 설거지는 30분 넘게 걸렸다.
설거지를 마친 나는 바둑을 두기위하여 컴퓨터 방으로 들어갔다.

300만원씩 내기가 들어왔다.
내가 가진 사이버 머니가 700만원 인데 두어 판만 져도 사이버 머니가 모두 사라진다.
그러면 하루에 네 판씩 밖에 두지 못하게 된다.
 나는 무조건 ‘내기 없음’ 이나 내기를 하더라도 10만원이나 25만 원 정도의 내기에만 응했다.
계속 여러 판을 졌다.
왜 이리 실력들이 좋은 건가?
혹시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 없겠지.
나도 한번 인공지능을 사용하려다가 화면에 경고가 뜨는 것을 보고는 ‘어마뜨거라’ 하고는 지운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지다가 마지막에 100만원 내기가 들어왔다.
“이왕 지는 거 모르겠다.” 하고는 응해버렸다.
 자포자기 상태였다.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바둑도 잘 두어지는데 오늘은 틀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어허라? 상대방이 못 두는 건지 내가 잘 두는 건지 바둑은 내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마지막 끝내기 에서는 한 점을 아까워하는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상대방의 대마까지 잡아버렸다.
상대방이 돌을 던졌다.
“오, 예.” 바로 이런 맛으로 바둑을 두는 거지.

밖에서는 딸애와 같이 나갔던 아내가 김밥을 사가지고 와서 먹고 있었다.
“나, 바둑 이기고 돈도 땄어.” 나는 아내에게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