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기는 쌀 두말을 등에 지고 독골 할머니 댁을 나섰다.
작은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쌀이었다.
 열 살의 순기에게 쌀 두 말은 다소 무거운 듯 했지만 순기는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거뜬히 지고 나섰다.
보리밥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이때에 쌀 두말이라니!

순기 아버지는 순기가 어릴 때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여덟 살 때까지 독골 고향에서 살던 순기는 사봉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자기소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어머니의 친구인 원배 형 어머니의 제안을 어머니가 수락하셨기 때문이었다.

돌마루가 가까워져 왔다.
돌마루에는 온통 야산뿐인 독골에서는 다소 큰 편인 바위가 있어서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 역할을 하였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소꿉놀이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였다.
큰 바위를 보면서 순기는 친구들과 같이 놀던 때가 그리웠다.
지금 살고 있는 사봉은 동네가 작아서 그런지 친구들이 없었다.
유일한 친구라고는 원배형의 동생인 복순이 뿐이었다.
복순이는 순기보다 두 살이 어렸다.
둘은 가끔 돌담 옆의 뽕나무에 올라 말 타기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뽕나무 가지에 올라서 가지를 발로 구르며 노는 것이었다.
“이랴, 달려라 달려, 다 다 다 닥, 개성까지 달려라.”
 말 타기 놀이가 끝나면 복순이는 순기에게 끊임없이 물어댔다.
 “어디에서 이사 왔니?, 거기는 어떤 곳이니? 아버지는 왜 안계시니?” 등등이었다.
순기는 짜증내지 않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답변해주었다.

돌마루의 큰 바위를 지나자 용수천의 여울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다슬기가 많아 잡혔다.
이곳에서 여러 번 할머니와 같이 다슬기를 잡아 국을 끓여먹었다.
된장의 구수한 맛과 다슬기의 시원한 맛이 우거지와 함께 잘 어울렸다.
다슬기살의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맛은 일품이었다.

돌마루는 여울이 져서 물이 얕았지만 물레방앗간 앞의 방죽 위는 물이 꽤 깊었다.
여기에서는 겨울에 동네 형들과 함께 얼음 배를 탔다.
얼음을 크게 도끼로 깬 다음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장대를 넣어 노를 삼고 저으면 훌륭한 얼음 뗏목이 되었다.
이 얼음 배를 타며 그 위에서 썰매까지 탔다.
추우면 볏단에 불까지 붙여서 불을 쪼이면서 놀았다.
얼음이 깨지면 모두 물에 빠져 목숨이 위험한 형편이었지만 전혀 그런 불안감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얼음배의 재미가 짜릿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는 방죽위의 물의 깊이가 더 깊겠지만 순기는 방죽위의 물보다 물레방앗간의 큰 나무 바퀴 밑의 물이 방죽위의 물보다 훨씬 더 깊다고 느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컴컴했기 때문이었다.
바퀴 밑의 컴컴한 물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물귀신이 나와서 순기를 잡아갈 것같이 무서웠다.

독골 앞 논에서는 겨울에 썰매를 탔다.
막내 삼촌이 썰매를 만들어 주셨다.
날이 무디어서 쓰지 못하는 낫을 두 개 준비한 다음 불에 달구어서 약간 휘어진 부분을 평평하게 폈다.
그 다음에 뾰족한 부분을 부러뜨리고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 기둥에 박아 넣었다.
이 두 개의 소나무 기둥에 판자를 대면 썰매는 완성되었다.
썰매 송곳은 가늘고 긴 나무 막대의 끝에 다듬은 작은 나무막대를 대어 손잡이를 만들고, 반대편에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밀어 넣어서 만들었다.

여자애들은 앉은뱅이 썰매를 탔다.
썰매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송곳 손잡이를 잡지 않고 대를 잡고 썰매를 지쳤다.
안전은 하지만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남자애들은 썰매에 앉지 않고 두 발로 섰다.
송곳도 손잡이를 위에서 내려누르듯이 잡았다.
무릎과 허리의 힘을 이용하여 위에서 내리 굴렀다.
한번 구를 때마다 몇 자씩 미끄러져 나갔다.
다섯 마지기나 나가는 넒은 논도 몇 번 구르다 보면 금방 가장자리에 다다랐다.
속도가 느릴 때는 송곳을 앞으로 찍어서 제동을 걸지만 빠를 때에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썰매는 논둑에 부딪치게 두고 몸만 논 둑 위로 뛰면 그만이었다.

논에 얼음이 언 첫날은 동네 꼬마들에게 축제의 날이었다.
맑은 얼음 밑으로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먼저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시험을 해 보았다.
용감한 아이들이 얼음에 올라가서 발로 굴러보았다.
괜찮으면 함성을 지르면서 썰매를 가지러 집으로 뛰어갔다.
썰매가 없는 애들은 얼음위에서 뒹굴며 놀다가 썰매를 얻어 타려고 기다렸다.

날이 지나면서 얼음은 점점 투박해지고 눈까지 내리면 얼음판은 울퉁불퉁하여 썰매를 빨리 지치기가 어려웠다.
이 때 부터는 속도 보다는 기교를 중시하였다.
험한 얼음길을 요리조리 썰매를 몰면서 정복해가는 것이었다.
얼음이 녹아가면 더욱 재미있었다.
일부러 송곳으로 얼음을 찔러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고 깨질듯 말듯 한 얼음 위를 위기를 느껴가면서 지치는 것이었다.
 담력대결이었다.
결국은 누군가는 물에 빠지고야 말았다.
이 때 논둑에서는 썰매를 타지 않는 아이들이 불놀이를 하고 있게 마련이었다.
물에 빠진 아이는 불에 옷을 말리었다.

돌마루의 들판으로 들어섰다.
왼쪽에 용수천이 흐르고 오른쪽은 좁은 다락 논이 이어졌고 논 옆으로 봇물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초겨울의 태양빛이 순기의 눈을 부시게 했다.
순기는 힘차게 걸음을 재촉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