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은 강의 시간 내내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바둑을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창밖을 보는 것도 아니었고 멍하니 초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현실과 분리되어 다른 공간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강의가 끝이 나자 혜빈은 시야를 가린 모깃불의 연기를 후치듯 머리를 가볍게 흔들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신입생 교류전의 선발을 위한 대국에 참여하기 위해서 도착한 동아리방은 여전히 안개와 같이 희뿌연 담배연기가 선계를 연출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쿰쿰한 냄새와 후덥한 온기는 시각적으로 다가온 선계의 기분과 달리 지옥계를 생각나게 했다.

벌써 교류전 참가를 희망한 동기 몇은 서로서로 짝을 지어 대국을 시작하고 있었다. 동기들 중에 상대적으로 기력이 약한 축에 드는 8명은 서로 만만해 보이는 상대와 먼저 골라 두고 있었다. 바둑을 이제 막 시작했거나 아직은 초보인 그들의 눈에는 누가 자기보다 강한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첫인상으로 바둑이 약해보이거나 자신보다 더 초보였으면 하는 바램으로 마주한 것이다.

혜빈이 상대없어 조용히 앉아 기다리는 것을 본 회장 김진우는 혜빈에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진우가 신입생일 때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을 당시 하수에게는 얼마나 전설 같았던지 마음에 새기곤 했다. 그런 과정은 선배의 선배에도 그랬고 선배의 선배의 선배에게도 있었다. 그러고는 마치 시골 마을 한겨울밤 전구 하나에 의지한 불빛과 군불로 데펴놓은 아랫목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신입생이 들어오고 친해질 무렵이 되면 통과의례처럼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눈보라에 삭풍이 몰아쳐도 불피워놓은 방은 따뜻함으로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듯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지금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공간도 이미 외부와는 단절된 새로운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진우는 이야기를 신입생이 들어오면 꼭 하고 싶었다. 고참 선배들은 신입생이 들어올 때마다 그 이야기를 풀어놓은 통에, 말하는 것도 지겹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듣는 것도 지겨웠지만 아직 진우에게는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시작도 하기전에 상상만으로도 입이 마르는지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수 한잔을 벌컥 마시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부터 20년전의 일이야. 꼭 바둑을 잘 둬야만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기우회에 가입한 신입생이 있었지. 그러니 지금부터 20기수 위의 선배이지. 자기 인생에서는 바둑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하며 가입의 변을 밝혀 선배들은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되었지. 그래서 당시 선배들은 그의 의지가 강한 만큼 어느 정도 기력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쁨과 호기심이 반반씩 섞인 대국이 시작되었지. 그런데 대국을 둔 선배나 그것을 지켜본 선배 모두 기겁을 하게 된거야. 한마디로 “물바둑”이었지. 그래서 그날부터 그 선배를 사람들은 “물바둑”이라고 불렀지. 그정도 자신있게 말하면 동기 수호처럼 3급 정도는 되려니 생각했는데 바둑의 '바'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욕만 가득한 것이었지.

그때가 동아리가 생기고 2-3년 정도 지나 기수가 1-2대 정도만 있을때라 회원수도 많지 않았어. 사람들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 보여야 동아리가 활성화 될 것이라도 믿었지. 그 방법 중에 하나로 지역최강을 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지. 그 다음 목표를 전국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내심 생각하고 있었지. 만약 그렇게 되어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의외로 빨리 기우회가 활성화되고 지역에서 바둑을 잘 두는 신입부원들도 많이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시간이 나면 모여서 바둑을 연구하고 공부했어. 물론 당시 바둑을 좀 둔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기우회를 만든 탓에 시작부터 평균 기력이 2-3급정도는 되었지. 그러나 1급이 되지 못하면 대회에 출전하더라도 입상의 가능성이 없기에 1급이 되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공부를 한거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둑책이 너무 없었지. 먼지나는 주머니를 털어가며 헌책, 새책 구분없이  구해서 봤지. 그러다가 최신 일본서적을 구할때면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지. 하여간 그 시절이 경제개발이라면 모든 것이 뒷선이 되는 것처럼 1급이 되는 것에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지.

그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초보자라도 바둑이 느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 사람인 이상 주위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니까 물바둑선배도 바둑이 늘기 시작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시절에 들어온 것이지. 지금처럼 목표의식이 약해진 시절과 다르나까. 그때 선배들이 대부분이 1급의 경지에 올랐고 개인도 한번 올라간 기력이 쉽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듯이 단체로 그렇기에 약해졌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우리가 어느정도 유지는 하고 있는 것이지. 한번 1급에 오르는 것이 어렵지 한번 1급이 되는 방벙을 알면 그것을 물려주는 것은 처음 오르는 것보다 어렵지 않으니까 말이야. 고산을 등반할 때도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어렵지, 한번 루트를 확보하고 나면 그 다음 등반자는 어렵지 않거든. 그런데 그때 당시 함께 1급이 되기 위해서 시작한 10여명의 선배가 중에 누가 가장 먼저 1급에 올랐을 것 같니?“

진우 선배의 말을 혜빈이 대답할 틈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말하는 진우도 듣는 혜빈도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이 이야기의 불가사의한 점이기도 했다. 누가 말을 하든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바둑에 관한 이야기에 몰입되지 않는 기우들이 없겠지만 이야기기 만큼은 그 정도가 뚜렸했던 것이다. 꿈인줄 알면서도 동화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악몽처럼 빠져든 것이다.

“의외로 물바둑이었던 선배가 바둑을 배운지 불과 1년만에 2-3급의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1급에 올랐지. 불가사의했어. 워낙 바둑에 대한 의지가 강했더는 것. 또 동료의식을 가지고 선배들이 꾸준히 바둑을 가르쳐 줬다는 등 여러가지 원인을 생각해봤지만, 결국은 2-3급의 선배들을 제치고 스스로 1급이 되었다는 건데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러나 그 실력을 인정은 했지. 잘 들어봐 그 과정을... 어느새 물바둑선배는 접바둑의 돌을 하나둘씩 줄이더니 마지막에는 선으로 두기 시작했어. 그러나 선배들은 그가 모두 같이 공부하는 분위기에서 바둑에 재능이 있어서 빨리 느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지. 모두 2-3급 정도의 기력이 되어본 사람은 모두 한번쯤은 바둑이 급속도로 늘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어. 그들도 바둑에 대해서만큼은 누구한테도 기재가 뒤처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바둑을 배우면서는 어른들로부터 늘 듣던 이야기가 '천재났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리고 사실 바둑이라는 것이 2급에서 1급이 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지, 그들의 실력이 2-3급 실력이고 선이면 물바둑선배의 기력은 3-4급 정도인데 그 정도는 노력만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었지.

물바둑선배는 평소 말도 없었고 늘 같이 주위에는 있었지만 드러나는 법이 없어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별로 이미지를 각인시킬만한 일이 없었지. 그런 사람 있잖아. 있어도 없는 듯 한 사람. 그런 부류의 전형이었지. 게다가 선배들이 1급이 되기 위한 공부에 집중한 탓에 바둑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관심도 없었고 어쩌면 같이 1급이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안했으니 관심적인 면에서 방치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 그러나 물바둑선배가 저녁에 사람들이 동아리 방을 떠나고 나면 밤에 다시 돌아와 바둑판을 앞에 두고 공부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알려졌냐 하면 말이야.

한 날은 선배들끼리 술을 먹으면서 한참을 바둑이야기를 하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중에 한명이 학교를 가로질러 학교 반대편에 있는 집에 가는 사람이 있었어. 보통은 그냥 다른 길로 갔는데 그날따라 동아리방 근처로 둘러서 가게 된 거야. 고개를 올려보니  불이 켜져 있었지. 그래서 궁금함에 올라가보게 되었는데...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건물의 복도를 지나 4층 모퉁이에 있는 동아리방까지 복도의 불을 하나하나 켜가면서 조심스레 올라가서 문을 여니 물바둑선배가 혼자 바둑을 두고 있더라 이거야.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헤어진 노트에 바둑에 대해서 뭔가 적고 있었데. 급히 가방에 넣는 탓에 자세히는 보지 못했는데 아마 그것이 급속히 기력이 늘게 된 비법일 꺼래. 그 당시는 정신이 없어서 뭔지 묻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다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바둑을 한판 두었데. 먼저 두자고 하더래. 그것도 물바둑선배가 먼저 말이야. 그때 생각해보니 한 번도 먼저 바둑을 두자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더래. 그냥 같이 있다 보니 서로 바둑을 두게 되어 누가 먼저 두자고 한 것을 기억할 이유도 없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렇더래.

그렇게 시작한 바둑은 선에서 곧 호선이 되었고, 호선이 되었지만 술이 취한 탓이라 생각하며 계속 바둑을 뒀지. 당시 바둑을 둔 선배는 미세하나마 그들 중에 가장 잘 두는 창수선배로 누구나가 가장 먼저 1급이 될  것이라 인정하는 선배였지. 호선으로 둔 바둑은 이미 3점까지 내려가 있었고 그 당시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격이 2점이었고 선배와 아마추어 고수들과 간격이 2점 이상 벌어지지 않을 시기였지. 1급이라고 보기는 힘들어도 거의 1급의 반열에 접어든 상태였거든. 아주 약한 1급이었지. 분명 한건 2급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야. 정말 하나의 뭔가만 해결하면 당장 누가 뭐래도 1급이라고 말할 수 있을정도 였거든. 만약 창수선배가 음주상태였다고는 하나 정상적인 바둑을 둔 것이라 가정한다면 물바둑선배의 기력은 이미 프로의 경지였을지도 모르는게 되거든. 그런데 바둑이 상대적인 것이라... 그리고 그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때 물바둑선배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그런데 바둑이 그 상태에서 끝나고 말았어. 창수선배가 정신을 차리려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 한 번하고 온 사이에 물바둑선배가 없어지고 만거야."

"재미있지?"

"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혜빈도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떼었다.

"어떻게 되긴, 그날 밤 이후 물바둑선배를 본 사람은 없고 “전설따라 삼천리”, “전설의 고향”이 된 것이지"
진우선배는 그 이야기가 너무 허무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자기가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쉬웠는지 물바둑선배와 같이 바둑을 둔 후의 기우회 이야기를 좀 더 해줬다.

"물바둑 선배와 같이 바둑을 둔 선배는 그날 이후 바로 강1급의 아마 강자가 되었고 곧 나머지 선배들도 창수선배가 1급이된 후 영향을 받아서인지 모두 금방 1급이 되었지. 그리고 지역대회에서 전승으로 우승을 하고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했지. 그 후 계속 그 실력이 내려와서 지금은 그 당시 보다는 좀 약해졌지만 계속 지역 최강은 유지하고 있지. 전국대회에서는 늘 1회전 탈락이지만 말야. 아마 그때 기염을 너무 토해서 힘이 빠졌나봐. 역시 토하는 것은 힘들어.. 하하하"

진우선배는 토하는 시늉을 한번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끝냈지만, 사실은 이야기의 끝으로 가자 지금의 실력이 선배들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것이 부끄러워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는 현 재학생중 최강인 졸업을 앞둔 4학년 선배들도 멋쩍은 듯 웃었다.

"야.. 그런데 우리가 졸업하고 나면 너희는 어떡할꺼냐?"
"...."

모두들 조용하고 있을때

"제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없습니다"

3학년 영탁선배가 큰소리로 자신있게 말했지만, 선배들은 한마디씩 했다.

"열심히는 무슨... 바둑공부 좀 해라. 다른 것에 정신 팔지 말고..."
"니 정도의 감각이면 공부만 조금 더하면 약해도 우리처럼 1급은 무난할텐데... "

사실 영탁 선배는 감각이나 기재를 보면 1급이 벌써 되어야 했지만 그놈의 ‘성실함’이란 녀석이 존재하지 않는 성격이라 여전히 유망주에 머물고 있었다.

"하하하.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말이야"

자신에게 몰린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었는지 끝났을 것 같은 이야기의 다음 이야기를 영탁선배가 이었다.

"어느날 낙서장을 뒤적거리다 보니 물바둑선배가 님긴 메모가 있었어. 메모에는 자신은 원래 바둑을 잘 뒀데,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아서 고생을 했던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머리에 맴돌 던 것을 계속 되새기고 정리했을 뿐이래. 그래서 자신이 정리한 것을 동아리방에 두고 간다고 했데. 그런데 자기만큼 바둑에 열망이 있고 관심 있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래. 아마 물바둑선배는 최소한 자신이 바둑실력을 되돌리는데 필요했던 노력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바둑에 대해서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야.“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잠시 어수선해졌다. 혜빈의 머리속에는 물바둑선배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이야기 속에서 말한 비밀의 노트를 자신이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또 다른 신입생 한명이 동아리방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학과 1학년 이현이. 현이는 바둑을 배우고 들어왔는지 아니면 들어와서 배웠는지 혜빈에게 기억이 없다. 그동안 주로 선배들에게 바둑을 배우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보니 서로 바둑을 둘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혜빈은 자기보다 더 초보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돌을 가리니 혜빈이 백이었다. 혜빈은 처음 두수를 양화점을 두었다. 며칠을 선배들에게 바둑을 배웠지만 겨우 바둑을 두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고 책에서 읽은 것이라고는 화점밖에 기억에 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많은 분량을 읽었지만 읽은 것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겨우 화점의 초보적인 이해를 했을뿐이었다. 바둑책은 소설책처럼 감정만 이어가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은 아니었다.

현이가 화점에 있는 나의 돌에 걸쳐오자 나는 한칸을 뛰었다. 날일자는 안정적이나 다음에 공격하는 수가 약하고, 한칸 뜀은 흑이 손을 뺐을 때 보다 강하게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책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둑은 그렇게 바둑알이 바둑판 위로 채워지는 동작의 반복으로 진행되었다.

"나~의 모든 사랑이 떠!~어~~나 가는 나알!~~엔!~~~~"

요즘 최신 유행하고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가 들렸다. 복학한 선배인 기정 선배가 통기타를 치면서 들고 부르고 있었다. 대국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중에도 노래 소리가 들렸다. 긴장감 사이로 파고드는 노래소리였다. 그만큼 노래 소리는 대국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부분이 있었다. 애수 짙은 김현식의 목소리가 배어 나와야할 노래를 나훈아가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익살스럽게 심하게 목을 꺾고 있었다.

"얌마!~ 노래가 그게 뭐고?"
"잘 부른다 잘불러!~"

주위의 선배들이 한마디씩 핀잔을 더하자 그것이 더 흥을 돋구은 것인지 노래는 더 빠르게  디스코 리듬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기정선배의 행동에 선배들은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바둑을 두고 있었고 기정선배는 어떻게든 사람들의 반응이 있자 더욱 신이 나서 불러댔다. 신중한 대국과 즐거운 노래 과연 어울리기나 하는 것일까? 나에게 그렇게 이질적으로 다가온 것이 이 공간에서 나를 제외한 부분에서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원래 바둑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노래가 그런 것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기꺼이 즐거운 노래의 꽃비를 맞으며 바둑을 두어가고 있었다.

바둑이 중반쯤 진행되었을까? 혜빈의 바둑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혜빈은 기분이 묘했다. 두고 있는 바둑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 내가 한수 한수 둘 때마다 사람들의 눈이 내 손을 따라서 본다는 것.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그들은 나의 다음수를 기다린다는 것. 어느덧, 바둑판은 나와 현이 그리고 구경꾼들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그 중에는 알 수 없는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돌아볼 여유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누구의 시선이었을까? 바둑은 반상에 펼쳐지는 움직임 이외에도 다른 능력이 있다. 주위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마치 한 몸에 있는 신경 세포들처럼 유기적으로 묶어준다는 것이다. 바둑은 그렇게 정신적인 교감을 시키는 힘이 있었다. 각각의 생명을 가진 세포를 하나의 생명체로 묶어주듯 바둑판 주위에 있는 사람은 각각 개인이지만 바둑이 두어지는 그 순간 만큼은 대국자 뿐만 아니라 대국에 집중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주위의 다른 생명체와 구분이 되는 정신적 연결을 가지고 된다.

"얌마야!~ 수업 안들어가냐?"
"들어가야지. 바둑한판 두고 들어갈라 캤는데, 자리가 없다. 자리가... 요즘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난 뒤부터 자리가 더 없따 없어!~"

기타를 치던 기정이 선배와의 대화였다. 그리고 보니 자리가 없었다. 모두 바둑판에 마주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고 두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대국을 보면서 서 있었다. 아마 자리가 나면 자신이 그 무리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서 다시 교감을 이끌어 가든지 다시 다른 사람이 바둑을 두면 기꺼이 하나의 세포가 될 것이었다. 강의가 마치고 다시 시작하는 시간인지 지하철역의 사람들이 서로 내리고 타듯이 동아리방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자리 하나 있네!~ 친구야~ 바둑한판 두자"

내시 같은 얇은 목소리로 상대를 놀리듯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징그러워서 안둔다. 니얼굴하고 같은 목소리, 편하게 내라!~"
"하하하하....,."

그 소리에 갑자기 떠들썩해졌다.
...
웅성이는 공간사이로 조용조용 의견을 주고받는 이가 있었다. 

“바둑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글세... 상식적으로는 이현이가 이겨야 되겠지”
“그런데, 바둑판이 이현이가 불리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바둑이란 것이 실력의 구분이라는 것이 뚜렷해서 절대 하수가 상수를 이길 수는 없어. 지금처럼 정선으로 두는 바둑에서 하수가 상수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바둑에서 하수가 상수를 이기는 일이 종종 있잖아요?”

둘의 목소리는 겨우 서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조용했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귀를 기울려 들어야 할 만큼 장황했다.

“프로들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있지. 바둑 실력이라는 것은 디지털적이 아니야. 계단처럼 다음칸, 다음칸 이렇게 끊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분포를 가지고 있지. 선형적인 분표지. 직선에서 어느 일정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형태의 기력이지. 그런데 프로의 세계에서는 그 분포가 각개인의 실력차보다 넓은 것이지. 그래서 상수가 분포에서 낮은 위치의 실력을 보이는 날과 하수가 높은 실력을 보이는 날이 겹치면 하수가 상수를 이기는 날이라고 보는 것이지. 그러나 아마추어 특히 우리 같은 하수의 세계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지. 바둑의 원리상 한번씩 교대로 두는 착점에서 그것이 서로 100번 이상 진행되면 실력의 차이는 바둑판위에서 반드시 나타나지. 확률적으로 거의 100에 가까운 현실이지.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하수가 성장중인 상태라면 다르지. 바둑을 배우고 들어온 이현이가 물론 측정할 수는 없지만 혜빈이보다 잘 둔다는 것은 맞는 말이고 이 바둑에서도 아직은 이현이가 유리하지만 진행되는 수들을 보면 두 대국자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 할 만큼 범위가 벗어나 복잡하거든. 그래서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야.”

신입생들의 바둑에 조용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두선배들의 말이 옳았다. 나중에 이현이와 혜빈에게 물어봐도 그때 서로 누가 유리한지 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현이와 혜빈이 1미터 앞을 비출 수 있는 랜턴을 들고 길을 가고 있다면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안개가 자욱해서 더 이상의 앞은 확인할 수 없는 미로였기 때문이다.

"다뒀네"
"계가하지"

선배들이 다 뒀다는 소리에 끝이 난 것을 알고 계가를 시작했다. 어설픈 계가에 선배들이 빠르게 손을 움직여 도와주었다. 2시간 가까운 혈투는 혜빈의 15.5집 차이의 승리고 끝이 났다.

 ‘내가 이겼나보다. 아니 내가 이겼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그리고 상쾌한 기분이 몰려왔다.

'이래서 바둑을 두나보다.' ‘나도 물바둑선배처럼 기력이 급성장해서 고수가 될 수 있을까?“

혜빈은 어렴풋이 바둑에 대한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