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양쪽 옆으로는 차들이 윙윙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딸애가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아빠 어디야?” “여기? 몰라 그냥 길이야.”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봐.” 

한 참을 걸어가다가 지나가는 사람한테 전화기를 넘겼다. 

“아빠 그 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어, 알았지?

나는 길옆에 앉아 기다렸고 딸애와 아내가 택시를 타고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한 발짝만 앞으로 움직이면 그냥 차들이 질주하는 대로변 곁의 조그만 돌 위에 앉아있었다.

그날 고등학교 모임이 모처럼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나던 친구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정말 반가웠다. 일차에서 헤어진 뒤에도 다시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고, 그 친구들과 헤어진 뒤에도 이상하게 또다시 길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술을 그만 마셔야한다는 다짐은 이미 잊어버린 상태였다.

집에 가는 길에서 아마도 전철이 끊어진 듯 했다. 

나는 그 때 쓰고 있던 소설의 주인공처럼 집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한 듯했다.

방안으로 스며드는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나는 몸서리를 쳤다. 

“어젯밤에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른다.”

술을 자제하기로 작정했다. 

딱 세잔만 마시기로. 내 이름을 세잔이라고 바꾸기로 결심했다.

또 다른 친구들의 모임에서 그 다짐을 실천했다. 

딱 세잔만 마셨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찜찜할까?

 나의 다짐을 제대로 지켰지만 기분은 영 그게 아니었다. 

친구들이 평소의 나 답지 않게 왜 이렇게 말이 없어졌느냐고 불평을 해댔다. 

나는 또 다시 갈등에 휩싸였다.

60년 동안 나의 독서 실력이 는 것은 확실한듯하다. 

초등학교 때 집안에 톨스토이의 책이 굴러다녔었다. 

책을 보았지만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책을 어떻게 읽을까? 투덜거리면서 책을 방바닥에 던진 기억이 났다. 

요즈음 전쟁과 평화를 빌려서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책이 무척 재미있다. 

 젊었을 때 영화 전쟁과 평화를 보다가 중간에 너무 지루해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소설책은 지루하지도 않고 술술 읽어졌다.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로스토프가 말에서 떨어지면서부터 프랑스군에게 쫓겨서 숲으로 달아나는 장면에서는 그만 책상을 치며 탄복을 했다. 

역시 톨스토이로구나. 정말 기가 막힌다.”

무라야마 하루끼의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란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 중에 모든 경험을 머리의 서랍 속에 집어넣는 장면이 있다. 

이 서랍 속에 있는 내용을 글을 쓸 때마다 꺼내는 것이다. 

그런데 글을 자주 쓰게 되면 서랍의 내용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함부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만 써야한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나도 되도록이면 필요 없는 글은 쓰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딸애가 받았다. 아는 지인이 건 전화였다. 

그 지인 집을 방문할 때마다 지인은 나에게 와인과 맥주를 거의 무한정 대접해준다. 

전화의 요지는 딸애에게 네가 울면서라도 설득을 해서 네 아빠가 절대로 독한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와인과 맥주같이 약한 도수의 술은 괜찮지만 고량주나 위스키나 소주 같은 독한 술은 절대로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지인이 왜 전화를 걸었을까? 

얼마 전에 내가 술에 취해서 집에 늦게 온 사실은 지인이 전혀 모르는 일인데? 

딸애와 아내에게 다그쳐봤지만 자기들도 그런 사실을 절대로 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지인의 가까운 사람 중에 술로 인하여 불행을 겪은 일이 발생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다시 한 번 술에 대한 자제를 결심했다.

토요일에 딸애가 친구를 만나기 위하여 저녁때 나간다고 하였다. 

아내와 내가 저녁을 해결해야한다. 

딸애가 없으면 나는 술에 대하여 자유로워진다. 

세잔만 마시자는 결심은 몇 주 만에 이미 무너져 버렸다. 

술을 마시는 친구들을 만나면서 세잔이 적당히 로 바뀌었고 그래도 결과는 괜찮았던 것이다.

토요일에는 저녁을 오랜만에 두메산골 쌈밥집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지난번에는 다소 부실했었는데 계속 그런지 아니면 다시 좋아졌는지 궁금했다.

토요일이 가까워올수록 그날 무슨 술을 먹을지 고민이 되었다. 

아무래도 막걸리보다는 소주라야 할 것 같았다. 

소주는 무엇으로? 지인의 부탁도 있으니 도수가 낮은 걸로? 

그러나 낮은 도수의 소주는 머리만을 적실 것 같았고, 나는 빨간 것으로 가슴을 적시고 싶었다.

두메산골에 들어섰다. 

손님은 우리를 포함해서 두 팀이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반찬들이 나왔다. 두부조림이 포함되었다. 된장국도 나오고 비싸다는 상추도 푸짐하게 나왔다.

 다시 이전의 푸짐한 밥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첫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음, 인생의 희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손님들이 꾸역꾸역 들어오더니 어느새 우리의 사방이 손님들로 꽉 차버렸다. 

쌈밥이나 삼겹살, 김치찌개 등을 시키면서 왁자지껄하다.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와 겹쳐서 술이 들어간 내 머릿속에서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볼콘스키 공작이 땅에 누운 채로 높은 하늘을 쳐다보는 장면, 보르지노 전투를 앞에 두고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잠긴 채 그동안 자기가 아등바등 노력하던 모든 일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되는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내가 되도록 아껴두면서 글을 쓰지 말자던 다짐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느껴졌다.

 “그래, 집에 가자마자 이런 심정을 글로 쓰자.”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글을 썼다.

 반 쪽 정도 써놓고는 즐겨보는 연속극인 ‘빅마우스’를 보기위하여 거실로 나왔다.

새벽에 잠이 깨자 속이 약간 불편했다. 

글을 쓴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냥 싹 다 지워버릴까? 이따가 읽어보고 결정하자.

아침을 먹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횡설수설 해 놓았을 줄 알았는데 제목도 제대로 썼고, 글도 엉망은 아니었다.

 며칠 더 두고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