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이우 공략에 실패한 러시아는 당분간 공세를 멈춘 탓인지 전선은 조용히 평온을 유지하였다. 

한가해진 우리들은 하루 동안 휴가를 얻어 키이우 인근을 구경하기로 했다. 

제일먼저 드니프로 강을 찾았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지리부도를 펼쳐놓고 친구들과 이름이 가장 긴 도시를 찾는 시합을 가끔 하였다. 

그 때 내가 찾은 도시 이름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였다. 

친구들은 그 보다 더 긴 이름을 찾지 못하여 내가 우승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로 이름이 바뀐 이 도시는 키이우를 거쳐 흘러가는 드니프로 강의 하류에 위치해있다.

강은 한강 보다는 좁지만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도 깨끗하였다. 

이 강은 흑해로 흘러든다. 

아르고호 같은 배를 만들어서 이 강을 따라 흘러내려가 콜키스 지방을 탐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아손처럼 황금양털을 발견하게 될 수 있을까?

상상에 잠겨있는 동안 어디에선가 고소한 빵 냄새가 났다. 

길거리의 식당에서 파는 치킨키이우 냄새였다. 

닭 가슴살에 버터를 듬뿍 바르고 빵가루를 입혀서 튀긴 음식이다. 

고소한 빵 냄새를 맡자 호떡 생각이 났다. 

우리 동네에는 집에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호떡가게가 있다. 

항상 줄이 늘어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나는 자주 그 호떡 가게에 들러 호떡을 샀다. 

아내가 호떡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긴 줄을 견디며 기다리다가 앞에 딱 한 사람만 남겨둔 적이 있었다.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제 곧 호떡을 사 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 사람이 호떡을 열 개나 주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짜증이 버럭 나면서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호떡을 맛있게 먹을 아내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악착같이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었다.

L이 멍하니 서있는 나의 어깨를 툭 쳤다. 

“형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십니까?”

러시아군이 다시 키이우에 침범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장거리 미사일이 가끔씩 도심에 떨어져 큰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패트리엇이나 사드 같은 미사일 방어체계가 구비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러시아군이 중부전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동남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하여 이동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에 따라 의용군부대도 남부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나는 남쪽으로는 절대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적의 종심이 깊어서 우리 같은 특수부대가 활동하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들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매복과 습격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남부 지방으로 내려가면 좁은 지역에서 밀집된 양쪽이 서로 마주 보게 된다. 

이것은 고대 전쟁에서 중무장 밀집보병부대가 서로 접근해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나는 어떤 책에선가 일기당천의 검투사 집단이 단순한 중무장 밀집보병들에게 패퇴한 사실을 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쪽에서는 우리 같은 특수부대가 바로 고대의 검투사 집단처럼 힘을 못 쓸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빽빽하게 서로 맞물려서 싸우면 제일차세계대전의 참호전이나 한국전 막바지의 고지 전처럼 소모전이 되풀이될 뿐이다. 

거기에서는 우리 같은 고급 전사들도 그저 소모품으로 전락될 뿐인 것이다.

K형의 생각이 나와 다른 것이 문제였다. 

K형은 말했다. 

“우리가 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있었나? 힘이 있다고 부당하게 남을 괴롭히는 자들을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우리는 세계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다. 그 정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여기에서 싸울 것이다.” 

L이 동조했다. “한 번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지요.”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이상적으로 만 생각하는 K형과 우직한 L이 답답했다. 

계속 말다툼이 이어졌지만 내 언변으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난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고자 막사 밖으로 나왔다. 

드니프로 강변을 걸으면서 어떻게 하면 저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라도 해볼 작정이었다.

강변에 막 접어들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막사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러시아의 미사일이 의용군들의 막사를 타격한 것이었다.

걱정이 앞섰다. 

동료들의 안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발 무사했으면. 정신없이 막사로 뛰었다. 

막사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급대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시체와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막사에서는 동료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병원으로 향했다. 

손짓 발짓하며 사태를 알아본 결과 K형과 L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서 앞으로 예후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환자실의 면회는 금지되어있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면회가 가능할 때까지 몇 주 몇 달이 걸릴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계속해서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귀국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K형과 L이 남쪽으로 내려갔다면 아마 나는 홀가분하게 귀국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어느 정도는 체면치레를 했고, 나머지는 든든한 동료들에게 임무를 맡기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지금 귀국을 해버리면 둘은 두고두고 나를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죽음보다도 더욱 견디기 어려운 형벌일 것이다. 

나는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둘이서 못다 이룬 꿈을 내가 혼자서라도 이루어 주어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