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했어도 정신은 또렷했다. 

혹시나 노상강도라도 만난다면 멋지게 해치울 수 있겠다고 상상했다. 

정당방위이니 명분은 뚜렷하다. 그렇게라도 신나는 일이 발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이런, 내가 번호를 잘 못 눌렀나? 

다시 한 번 비밀번호를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가 않았다. 

분명히 아내가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이다. 

벌써 세 번째이다. 

늦게 들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술을 먹고 들어와서 그런지. 초인종을 계속 울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

집 근처의 어린이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서 생각했다. 

집을 나갈까? K형에게 한번 가볼까? 

 아니지, 너무 충동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셨다. 너는 평소에는 모든 일을 침착하게 잘 처리하면서 유독 화가 나면 끓어오르는 성질을 못 참는 것이 큰 흠이다. 제발 욱하는 성질을 다스려라.

서울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밤새도록 걸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하면 무언가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생각했다. 

결코 충동에 의한 결정이 아닐 것이다.

거리는 한산했다. 

늦은 밤의 추위에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거리에 수북이 쌓인 쓰레기를 쓰레기차가 치우고 있었다. 

청소부는 쓰레기봉투 하나하나를 숙달된 솜씨로 차에 얹었다.

도시를 벗어나니 길은 어둑해지고 인적은 거의 끊겼다. 

지나가는 차 소리와 내가 딛는 발소리만 두 귀에 들렸다. 

그냥 돌아갈까? 그러나 이 망설임을 두 발이 무시했다. 

두 발은 목적지가 정해진 자율주행 차처럼 이미 서울로 가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는 듯하였다. 

머리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뚜렷이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었다.

구름이 비껴나자 반달이 나왔고, 그 달은 도봉산을 비추고 있었다. 

선인봉의 절벽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 절벽위로 만장봉과 자운봉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장엄한 풍경이었다.

 “그래,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저렇게 장엄하게 살아봐야 할 거야.”

새벽이 되어서야 서울에 들어섰다. 

밤이슬을 맞은 몸은 축 쳐져서 기운도 없고 배도 고팠지만 두 발은 아직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아침이 새로 시작되어서 그런지 도시는 서서히 활력을 되찾고 있었다. 

힘들게 K형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폴란드의 메디카 검문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밀려온 수많은 피란 민들로 거리가 넘쳐났다. 

이들 뿐이 아니었다. 

피란민들을 돕는 국제기구의 봉사요원들과 우크라이나에 의용군으로 참전하려는 젊은이들과 길을 잃은 어린이들, 이들을 통제하는 경찰과 군인들.

K형은 무기판매상을 찾았다. 

의용군들은 모든 무기를 자비로 갖추어야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많은 무기상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쉽게 한 곳의 상점을 찾았다. 

뒷골목의 으슥한 곳에 상점이 있었다. 

입구는 좁았으나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각종 개인화기들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K형과 L은 소총으로 CZ-806 BREN-2를 골랐다. 

5.56mm탄을 쓰는 체코제 자동소총이다. 

우리 모두는 국산의 K2C1소총에 익숙해 있었지만 아쉽게도 여기에는 그 총이 없었다. 

새로 맞추어 입은 군복과 더불어 덩치가 있는 K형과 L에게는 제법 근사하게 어울려 보였다.

 나는 AK-74를 잡았다. 

그 유명한 칼라시니코프가 만든 총을 현대적으로 개량한 소총이었다. 

체격이 작은 나에게 어울렸다. 더구나 이 총은 현재 우크라이나 군이 사용하고 있는 중이므로 탄약문제에서나 기타 등등 여러모로 나에게 유리할 것 같았다.

권총은 셋 모두 CZ P-10C를 구입했다. 

역시 체코제이었다. 권총도 한국 제품인 K5가 우리들에게는 익숙했으나 그 권총도 여기에는 없었다.

칼은 K형과 L은 보위나이프를 골랐고, 나는 카람빗을 골랐다. 

체격과 선호도에 따른 결과였다.

무기를 모두 구입한 우리들은 사격장으로 향했다. 

무기판매상들은 교외에 사격장도 마련해놓고 있었다.

메디카는 작은 시골이지만 그 교외는 끝없이 넓었다. 

차를 타고 인적이 없는 넓은 교외로 나가자 ‘대장 부리바’란 영화에서 봤던 그 넓은 평원이 생각났다. 

이 평원이 한 때는 코사크들이 말을 타고 지배했던 곳이 아닌가? 

코사크 기병대들이 누비던 평원이 21세기가 된 지금에는 탱크들이 누비는 전장이 된 것이다. 

과연 인간들의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가 될 것인가? 

인류의 전쟁은 진정 끝이 없는 것인가?

고정된 자리에서 사격을 한 다음에는 움직이면서 사격을 했다. 

먼저 소총을 쏘고 바로 이어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특등사수였던 K형은 역시 사격에 예술적인 감각을 보였다. 

소총을 어깨에 걸고 권총을 뽑는 동작이 무척 빨랐다. 

그리고 권총사격은 모두 목표물에 명중되었다. 

만약 서부개척시대에 K형이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유명한 총잡이가 되었으리라.

L과 나는 사격에는 K형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근접전투만은 자신이 있었다. 

특히 L은 과거 부대 내에서 행해지던 근접전투에서는 늘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었다. 

기술뿐만이 아니고 체격과 체력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나는 대회에서는 L보다 한 수 뒤졌지만 나름대로 속마음은 달랐다. 

만약 실전에서 근접전투를 치른다면 누구에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준비를 해왔다. 

인적이 없는 뒷산에 아지트를 마련하고는 매일 근접전투 연습을 했다. 

특히 칼 쓰기에 집중했다. 

칼로 기술을 다루기보다는 일격필살을 목표로 했다. 

깊고 빠르게 찌르고 베기를 연습했다. 

하루에도 몇 개의 칼이 부러지거나 휘어져서 못쓰게 되었고, 두 팔에도 수많은 상처를 남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