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아내와 딸내미가 모임에 가는 날이다. 

나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내일 희룡이에게 갈 것인가? 아니면 회룡사에 갈 것인가?

희룡이는 고등학교 친구이다. 

개인 사업을 하는 친구로서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하다. 

마음이 넓은 양산박의 급시우 송강 같은 호걸이다. 

그 친구는 트레킹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보름에 한 번씩 친구들이 모여서 간단한 길을 걷는 모임이다. 

내일은 남산 둘레 길을 걷는다고 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둘레 길을 걷고 싶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회룡사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회룡사는 사패 산 입구에 있는 절이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다. 결국 고민하다가 회룡사게 가기로 작정하였다.

아침부터 회룡사에 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딸애가 찬 물을 끼얹었다. 

회룡역에서 회룡사 까지는 40분 정도가 걸리며 여러 갈림길이 있어서 길을 잘 못 들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혼자서 가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며 추석이 지난 다음에 셋이서 같이 가자고 하였다.

 딸애 친구의 아버지가 산에 혼자 같다가 돌아가신 경우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별로 높은 산이 아닌데도 혼자서 가는 것은 위험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날에는 회룡사도 못 가고 희룡이한테도 가지 못하였다. 

하루 종일 집 주변에서만 빈둥거렸다.

추석 다음다음 날이 되었다. 월요일 이었다. 이 날도 휴일이었다. 

아내는 고궁에 놀러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나는 즉시 수락하였다. 

점심은 집 근처에서 먹고 덕수궁에 가기로 작정하였다. 

집 근처의 부대찌개 집에 들러 음식을 주문하였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딸애가 갑자기 오늘 덕수궁에 가지 말고 회룡사에 가자고 말하였다. 

회룡사는 원래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가기로 하였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편한 옷을 입고, 아내가 걷는 동안 포기할 지도 모르므로 아내를 달래줄 간편한 음식과 물을 배낭에 넣고는 철저히 준비해서 떠날 작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자고? 

딸애 말로는 고궁은 평시에도 갈 수 있으므로 나중에 가기로 하고 오늘은 회룡사로 가자고, 물과 음식은 자기가 휴대한 장바구니에 담으면 되고 길이 험하지 않으니 그냥 지금 입고 있는 나들이 복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였다. 갑자기 마음이 설레었다. 회룡사에 간다.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이다.

월곡역에서 6호선을 타고 석계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바로 오는 열차는 광운대역이 종점이어서 그냥 보내고 다음 전철을 기다렸다. 

전에 모르고 그냥 광운대 행 열차를 탔다가 다른 전철로 갈아타기 위하여 높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고생한 기억이 났다. 

의정부행 열차가 바로 왔다. 전철을 탔는데 소리가 이상했다. 

보통 전철은 소음이 별로 없이 스르륵 달리는데 이 차는 유독 소음이 심했다.

 ‘쿵 쿵 쿵 쿵, 쿵쿵쿵쿵.’ 열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소리는 ‘타다다닥, 타다다닥.’으로 바뀌었다. 

꼭 옛적에 증기기관차를 탄 기분이 났다. 

열차의 소음이 꼭 ‘칙칙폭폭, 칙칙폭폭’ 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아주 그만이었다. 기차를 타고 제대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이 기차가 철원을 지나 금강산으로, 함흥으로, 시베리아로 내쳐갈 것만 같았다.

늘 보던 도봉산이 보였다. 

우이암을 거쳐 선인봉의 암장과 그 위의 봉우리들. 그리고 기차가 망월사역을 지나 회룡역에 가까워오자 그 경치는 다시 바뀌었다.

 아까는 겹쳐 보이던 선인봉과 만장봉과 자운봉의 옆모습이 따로 따로 떨어져서 뚜렷이 보였다. 

세 봉우리의 높이차이가 확실하게 보였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도봉산이 금강산보다도 더 윗길이라고 하였다. 

책에 설명이 있기는 한데 이해는 잘 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금강산을 자세히 보았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금강산을 아직 못 본 탓도 있을 것이다.

회룡역에서 내려 아파트 숲 사이를 걸었다. 역시 길이 복잡하였다. 

나 혼자서 왔다면 헤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딸애는 수 없이 검색을 하여 회룡사 가는 길을 빠삭하게 안다고 자랑을 하였다. 

길을 가다말고 여기서 누가 어떻게 헤맸는지도 설명을 해 주고, 또 어떤 곳에서는 전에 직경 5m, 깊이 5m의 싱크홀이 생겼던 곳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파트 옆의 축대가 높았다. 

내가 전공인 허튼소리를 아내에게 하였다.

 “이 축대는 잉카인들이 와서 쌓은 거야.” 

그 말을 듣고는 아내가 대꾸하였다.

 “맞아요. 면도날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촘촘하게 쌓았군요.” 

딸애가 짜증을 부렸다. 

“엄마는 맨 날 속으면서도 또 속아 넘어가네.” 

그러자 아내가 대꾸하였다. 

“그렇게라도 네 아빠 기를 살려줘야지 누가 네 아빠를 위해주겠니?” 

 딸애가 더욱 투덜댄다. 

“어느 때는 서로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라리면서 욕들을 하며 싸우더니 오늘은 또 착한 척을 해요.” 

아내가 이럴 때 늘 쓰는 그 썰로 일침을 놓았다. “야, 이년아. 그건 네가 시집을 안 가봐서 그래. 시집을 가봐야지 남편이 어떤 줄을 알지.”

계곡물이 맑고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계곡의 바닥은 모래가 거의 없고 거의 바위였다. 

넓은 암반 위를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입구에 큰 회화나무가 서 있었다. 수령이 420년이라고 하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엄청나게 높고 큰 다리가 눈앞에 보였다. 

서울 외각 순환도로였다. 다리 및을 지나면서 위로 오르막길이었다. 

나의 예상은 절까지 평탄한 길 인줄 알았었는데 예상과는 틀렸다. 

한 참을 올라가니 오른쪽에 있는 계곡이 저 만치로 내려다 보였다. 

깊은 계곡이 어릴 때 그림책에서 보았든 콜로라도의 계곡처럼 보였다. 

길을 따라 올라가지 않고 물을 따라 계곡 산행을 한다면 무척 힘들면서도 스릴과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폭포와 소의 연속이니. 그러나 계곡까지는 내려가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석굴암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자 계곡의 경치는 더욱 멋지게 변했다. 

커다란 바위덩이들이 계곡 안에 즐비했다. 

작은 폭포와 제법 큰 폭포를 오른쪽에 두고 올라갔다. 

이 길이 전에 싱크홀이 생겼던 곳이라고 길 가에 표시가 되었다.

폭포 옆길을 다 올라가자 바로 회룡사가 앞에 보였다. 

사패산과 어울려서 웅장하고 단아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시멘트가 있는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풍스러웠다. 

이성계와 무학 대사하고 인연이 깊은 절이라고 설명이 나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있는 의정부 회랑은 한양과 함흥을 잇는 직통 도로의 한 부분인 셈이다. 

절에 들어서자 새장이 보였다. 

새장 문이 열려있고 새는 어디로 간지 보이지가 않았다. 

나무에 감이 열려있는데 모양이 둥글지가 않고 아주 뾰족하였다. 감이 아닌 걸로도 보였다. 

극락보전과 대웅전을 구경하고 약사전 쪽으로 발길을 옮길 때 잔디밭에 앵무새 비슷한 새가 놀고 있었다. 

새를 기르는 아주머니가 무어라고 하자 새는 “쪼르르르륵, 쪼르르르륵.” 하고 대답했다. 

입구에 있던 새장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절을 다 보고 산문을 나서는데 아내의 얼굴에 땀이 줄줄 흘렀다. 

힘이 든다고 하였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와 딸애는 멀쩡한데 아내만 땀을 흘린다. 

아마 속이 허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내 입에서 불경한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직도 사찰의 경내를 의식한 나는 애써 입을 다물었다. 

사찰경내를 한참 벗어난 후에야 내가 입을 열었다. 

“아내에게 개소주를 한 마리 해 줘야겠네.” 

딸애가 정정하였다. “개소주가 아니라 흑염소 탕을 드시게 해야 해요.” 

양띠인 아내는 개소주도 흑염소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길을 내려가는 동안 아내는 힘이 든다며 딸애와 나에게 매달렸다. 

딸애가 아내를 부축하면서 달랬다. 

전철역에 가면 커피를 한잔 사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커피는 싫고 막걸리나 한잔 마셨으면 좋겠는데. 

도중에 도토리묵을 파는 집에서 내가 눈치를 주었지만 딸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그냥 지나쳤다.

석계역에서 6호선을 기다리는 동안 의자에 앉은 아내가 옆의 아주머니와 아주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나중에 물었더니 아주머니가 신은 운동화가 발에 편하겠다고 칭찬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 운동화는 20만 원 짜리이며 딸이 선물한 거라고 자랑을 하더라고 하였다. 

지금 신고 있는 아내의 운동화는 내가 2만원 주고 사준 것이다. 

그것을 아내는 아주 발에 잘 맞는다며 좋아했었다. 

오늘 운동화를 자랑한 아주머니는 아주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좋은 운동화를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 

더구나 딸이 그것을 선물해준 것이니. 아내가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 셈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시간이 지날 때까지 셋이서 모두 잠을 내쳐잤다. 

그 날 이후로 딸애는 무릎이 아프다며 투정을 부린다. 그날 엄마가 너무 많이 매달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