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가까운 카페에 마주 앉았다.

하시모토는 행복했다. 그는 최선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난 뒤, 어떻게 최선애에게 다가가야 할지 막연해서 전전긍긍하며 며칠 동안을 고민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렇게 단 둘이서 카페에 앉아있다. 마음이 뿌듯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늘 그녀에게 이만큼의 다가섬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오늘 여러 가지로 힘드셨죠? 결혼하는 본인보다 가족들이 챙길 것이 더 많잖아요.”

“예, 은근히 신경 쓸 것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드레스 입은 동생이 부러웠어요. 저는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아직 한 번도 드레스를 입어보지 못했거든요.”

그녀는 말을 꺼내놓고 아차 싶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난 사람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말해버린 것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역시 그가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대화를 멈춰졌다.

30대 중반과 후반의 여자와 남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반쯤은 알고 배우게 된다. 지식과 경험이 남은 삶을 살아낼 만큼 충분하게 준비되는 시기다. 다만, 경륜과 배려는 더 채워야 남은 여백을 채워 완전해지는 나이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겪으며 어른이 된 사람들은 때로 많은 것들을 다 배워버릴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삶이 고통스러웠던 사람과 이별의 고통을 알아버린 사람!

그들은 짧은 시간동안의 대화에서 서로가 겪어버린 삶의 고통이 얼마나 컸고, 그것을 버텨내려 애쓰며 살았는지를 알아챘다. 침묵 속에서 서로는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화보다도 깊게 서로를 포용하게 만들었다.

“선애상도 하얀 드레스를 곱게 입을 날이 올 거라 믿어요.”

한참의 침묵 뒤 그가 말했다.

“네, 고마워요. 하시모토상도 다시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을 찾으시기 바라요.”

그녀의 말에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그의 입술이 조금 벌어지려다 말았다. 그녀는 그가 어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마음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격랑이 일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한 말에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시모토상, 미안해요. 제가 실언을 했나보네요.”

그녀의 말을 들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겨우 두 번째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도 꺼내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만남의 횟수가 짧다고 마음까지 작지는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의 말뜻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음도 이상했다.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마음을 정한 듯 정색을 하고 말을 꺼냈다.

“우리는 회사에서 처음 만났죠.”

그렇게 서두를 꺼낸 그는 그 이후로 그의 마음에서 그녀가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있었음을 이야기 했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음도 이야기 했다.

“제가 선미상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오로지 선애상을 다시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그녀도 덩달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인 것을 알았기에 제게 희망이 생겼음이 기쁩니다. 물론 선애상의 마음을 얻어야 하겠고, 그러기 위해 제가 더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이미 행복합니다.”

차라리 고백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이미 서른을 넘긴 여자다. 그리고 아이가 둘이나 있는 몸이다. 그런 사람에게 보이는 이 사람의 열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그의 열정에 자신이 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봤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은 온통 살아남기 위한 본능의 발로였다. 지금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을 주저 없이 택할 것이다. 그는 일본에 있는 큰 회사의 오너 가족이라고 했다. 그를 택한다면 분명히 그녀의 삶이 훨씬 순탄해 질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선택을 하기 싫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만약 그와 같이 살게 된다면 일본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그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말해줄 필요를 느꼈다.

“저를 무척 좋게 생각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살아남기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살아온 사람입니다. 하시모토상의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많이 당황하셨을 것 이해합니다. 제가 너무 서둘렀죠. 그래도 저를 미리 막지는 말아주세요. 제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는 그 누구의 삶도 모두가 치열합니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선함도 악함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도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으니까요.”

“네. 알았어요. 우리 천천히 서로를 더 알아가며 생각해 보기로 해요. 다음에 한국에 오시면 또 뵐게요.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선애상, 정말 고마워요! 다음에 한국에 오면 연락드릴 테니 꼭 다시 만나요.”

그는 그녀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

‘우리 행복해요!’라고 얼굴에 써 붙인 듯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았다. 그들은 오늘은 처가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내일부터 신혼집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집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모두 행복하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고모도 몸이 무겁다며 일찍 자겠다고 했다. 설민국도 피곤한지 방에 들어가고 식탁에는 오랜만에 두 자매만 오붓하게 남았다.

“언니! 그 날 고생 많았지? 언니가 세심하게 엄마처럼 이모저모 잘 챙겨줘서 편안하게 결혼식을 마쳤어. 고마워.”

“아무렴 네가 신경 쓰고 마음 분주했던 것에 비하겠어? 큰 일 잘 치르고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누니 참 기쁘다. 설 서방이 잘 해줬어?”

“응, 여행 내내 잘 챙겨주고 자상하게 마음 써줘서 편안했어. 언니한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 언니는 면사포를 아직 한 번도 안 썼던 게 생각나서!”

“하시모토상이 나도 쓸 날이 있을 거래!”

불쑥 말하고 그녀는 ‘킥킥’ 웃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시모토상하고 그런 대화까지도 했었어?”

최선애는 동생에게 결혼식 날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가 언니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눈치 채지 못했었다.

“언니,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거야? 잘됐으면 좋겠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게 될 일이니? 어떤 부모가 아들이 아무리 재혼이라지만 자식이 둘이나 딸린 나를 좋아라 하시겠어. 그쪽 아버지가 큰 회사를 경영하는 부자라며! 나는 이렇게 보잘 것 없고. 나는 아무런 기대도 안 해. 옛 어른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하고 말씀하셨어. 하지만 하시모토상이 나를 좋게 생각해주는 것은 무척 고마웠어. 그리고 고모랑 애들한테도 다정하게 대해주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언니 아무것도 미리 생각하거나 결정하지 말자. 다시 한국에 오면 만나기로 했다니, 언니도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만나서 여러 번 얘기를 하다보면 좋은 관계로 가까워질 수도 있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너무 앞서거나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너희들 피곤하겠다. 어서 들어가 쉬어.”

다음날 아침, 최윤경이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직도 자고 있었다. 최선미는 고모를 깨우기 위해 그녀의 몸을 만지다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몸이 너무 뜨거웠다.

“고모, 몸이 불덩이 같아. 일어날 수 있겠어?”

“몸살이 온 거 같구나. 밤새 온 몸이 무엇으로 맞은 듯 쑤시고 아팠어.”

“그럼 우리를 부르지 그랬어.”

“몸살감기야. 이까지 것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떨지 마.”

“고모는 아직도 청춘인 줄 알아.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주사라도 놔달라고 하자. 일어나봐.”

그녀가 고모를 부축해서 나오자 다들 걱정이 앞섰다.

“괜찮아, 다들 어서 식사해.”

아직 호칭이 어색한 최선미는 설민국에게 가서 말했다.

“자기가 식사를 얼른 하고 나랑 같이 고모를 병원에 모시고 가자.”

“응! 그럴게.”

병원에서는 그녀가 급성폐렴에 걸렸다고 했다.

며칠 동안 동분서주하고, 조카 결혼에 신경 쓰더니 몸에 무리가 왔었나보다. 마음의 긴장이 풀린 탓도 컸을 것이다. ‘연로하신 분은 면역력이 약해 쉽게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며 입원하라는 의사의 당부대로 그녀는 병원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