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미는 조카들을 데리고 서울 현충원을 찾았다.

“민국씨, 대한이가 같이 왔어요.”

강대한은 이모부의 무덤 앞에 무너지며 소리 내어 울었다. 두 사람은 그가 후련하게 울도록 잠시 묘소 주변을 살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울면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은 마음을 씻어낸다. 그렇기에 눈물은 참으로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

얼마 후, 그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번뇌와 고통과 후회와 갈등을 눈물이 씻어내 맑게 만들어 주었다. 맑아진 마음이 그의 얼굴을 평화롭게 만들어준 듯, 혼란의 그림자가 사라진 눈에는 다시금 따스함이 감돌았다.

세 사람은 설민국의 산소 앞에 둘러앉았다. 가족만이 가질 수 있는 화목함이 그들에게서 감돌았다. 최선미는 설핏 네 사람이 앉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곁에 그리운 남편이 나타나서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 편안하고 따뜻한···

“대한아! 이모는 네게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배울 기회를 주고 싶다. 그렇지만 이모가 가르쳐줄 수는 없어. 왜냐하면, 지금의 마음 상태로는 이모가 자칫 네게 균형 있는 역사관을 가르치지 못할 우려가 있어서야. 왜곡되지 않은 관점을 가져야 역사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거거든. 너를 가르쳐줄 수 있는 두 분을 만나게 해줄게.”

“알았어요, 이모!”

세 사람은 마치 설민국의 배웅을 받는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최선미는 조카 강대한을 데리고 한영운을 찾았다. 그녀와 마주 앉은 한영운은 그녀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우리가 안일했어요. 부군의 죽음을 막을 방법을 고민하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의사 한분을 잃었습니다. 국가 간에도 법도와 신뢰가 있는 법인데 일본이 저렇게 비열한 짓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음을 통탄합니다. 인권을 부르짖는 미국 등이 보인 반응도 무척 실망스럽고, 우리 정부의 대응도 한심했습니다. 다시 한 번 부인께 사죄드립니다.”

“총사령관님! 이제 그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이미 지나간 일로 미래를 대비하는데 소홀해질까 염려됩니다. 저는 지금 설민국의 아내가 아닌 ‘대한독립의군부’의 단원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이 녀석은 제 조카입니다.”

한영운이 비로소 강대한을 바라보았다. 그가 설민국의 죽음에 관여된 사실을 아는 한영운은 조카를 데리고 이곳으로 온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에 조차 ‘의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람에 대해 이렇게 거친 격랑이 이는데, 아무리 조카라 한들 어떻게 태연한 듯 그녀는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총사령관님께 감히 부탁드립니다. 제 조카가 바른 한국인으로서의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한영운의 마음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을 하면서도, 그녀는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녀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최선미는 강대한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했다.

“총사령관님의 염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동안 제가 조카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지난 일은 아직 사리분별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탓에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야 조카는 스스로 깊이 뉘우치며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찾고 싶어 합니다.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까닭에 제 조카는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합니다. 가여운 조카의 삶을 옆에서 지켜 본 저는 조카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바른 길을 찾아 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 잠시 말없이 앉아있던 한영운이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바른 역사를 가르쳐 놓겠습니다.”

한영운은 강대한 만을 위해 특별히 강사진을 꾸렸다. 한국의 과거 역사와 근, 현대사를 총 망라한 커리큘럼이었다. 그 속에서 강대한은 다시 태어났다.

‘나는 그동안 겉모습만 한국사람 이었구나.’

피정복국 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일본인들에게는 종들이고 소모품들이었다. 모든 정복국가가 수탈과 착취를 통해 전리품을 챙겨가지만, 민족 전체를 영원히 없애려 하고, 2등 국민으로 흡수하려고 하는 나라는 없었다.

‘창씨’를 하고 ‘개명’을 하고 언어를 ‘말살’시키려 하고···

그러고도 모자라 이 땅에서 일본을 위협하는 인물이 나지 못하게 한다며 전국의 명산에 쇠말뚝을 박아 혈을 끊어내려 하였다. 더구나 아직 피지도 못한 처녀들을 끌고 가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사기를 높이려 성적인 노리개로 삼은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만행이었다. 이런 인간 이하의 범행이 드러나자 일본은 사실들을 은폐하고 감추고 부정하기에만 급급한 졸렬한 모습만 보이며, 감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사람 모습을 흉내만 내고 있는, 야차 같은 짐승들과 다름이 없는, 일본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았단 말인가’

강대한은 통탄하며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모, 부탁이 있어요. 저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데려다주세요.”

최선미는 강대한의 부탁에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조카의 인성이 바르게 교정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민족의 참된 정기를 이어온 ‘대한독립의군부’가 지닌 힘이 도도한 물결처럼 강렬하게, 온 누리를 뒤덮는 새벽안개처럼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닫혔던 마음을 열리게 하고 참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킨 것이다.

“그래! 이모와 같이 집회를 참관하자.”

집회는 어느덧 900회를 넘겨서 열리고 있었다. 무려 15년을 넘게 이어져 이제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한 집회다. 집회를 중단시키려는 다른 세력들의 무수하게 많은 시도를 넘어서 면면하게 이어지는 인권 유린에 대한 저항의 상징!

그녀에게는 남편과의 기억으로 가득한 공간에 조카를 등장시킨 것이다.

참관을 마친 두 사람이 사직공원을 찾았다.

“여기는 이모가 결혼한 곳이네요. 집회장소와 가까웠구나.”

“이모의 첫 신혼여행지가 수요 집회야.”

“이모가 두 분의 추억 장소 중심으로 저를 불러주셨네요. 이제야 저는 이모에게 온전하게 용서를 받은 느낌이에요. 고마워요!”

“너에 대한 오해를 네가 풀어주었잖아. 그리고 이제 참다운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되었고.”

“이모, 저 이제 일본으로 돌아갈게요. 대한국인으로서의 기개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고마워요.”

그녀는 조카를 가슴에 품어주었다.

강대한은 출국하기 전에 한영운을 만났다.

“그동안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총사령관님 덕에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얻었습니다.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세상을 살겠습니다.”

“배움은 가르치는 사람의 노력으로만 성취를 얻는 것이 아닐세. 자네의 배우려는 마음가짐 덕에 가르치는 나와 다른 교사들도 큰 보람을 얻었네. 어디에서 살든 대한국인의 자긍심과 본분을 망각하지 말게. 그곳에도 우리 동지들이 많이 있다네. 외로워하지 말고 성실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게.”

짧은 기간 동안 가진 사제의 인연이었지만, 시간만이 마음의 두께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기에 두 사람은 이별을 못내 아쉬워했다.

“제가 총사령관님께 청이 있습니다.”

강대한이 두어 발짝 출입문을 향하다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 무엇인가.”

“저를 ‘대한독립의군부’대원으로 받아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가.”

“제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한영운은 그의 다음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강대한은 마음을 정리하는 듯 잠시 시간을 두었다.

“저는 제 이모부께서 하시려고 했던 일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 일을 ‘대한독립의군부’ 대원의 자격으로 하고 싶습니다.”

“자네가 다시 ‘어신체’와 ‘영새부’를 탈취하겠다는 말인가?”

“제 부족한 소견으로는 이제는 그 물건들을 탈취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겠지. 일본이 경비를 전보다 훨씬 강화했을 테니.”

“저는 야스쿠니 신사 전부를 파괴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