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글을 쓸까하다 꽤 오래전에 쓴 글을 먼지 털어서 올립니다.

바둑과 친구
                                                                           저니
가끔 까까머리 중학교 때 추억이 생각이 납니다.
동네에서 윤 근호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도 가까이 있었지만, 둘은 틈만 나면 바둑돌을 붙잡고 씨름을 한 라이벌이었습니다.. 실력은 근호가 저보다 두 점은 강한 친구였으나 저의 오기에 치석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바둑실력 또한 15급에도 미치지 않는 실력이었지만 엎치락뒤치락 눈이 붉게 빠지도록 바둑을 두고 있으면 동네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의 지나가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데 충분했고 동네에서도 공부 안하고 바둑만 두는 천덕 꾸러기였습니다.
 
치수 고치기 7 번기 10 번기는 오 청원선생의 번기대국 보다 우리에겐 각별하고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즐거운 마음과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내 모습은 바둑판 나의 형세와 더불어 처참 하게 변해가곤 했다. 열 판에 두세 판을 이기지 못했으니 어린 마음에 그 상처는 꽤 깊었습니다.
얼굴은 붉그락푸르락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서 분한 기분을 억지로 삼켜서 울지 않으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요. 한쪽 대마를 살면 다른 쪽 대마가 죽어서 지던가 하다못해 다 이긴 바둑이라 생각했는데 공배를 메우다가 단수를 보지 못해서 지는 일이 중학교 내내 반복된 악몽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언제는 두 점 세 점 치수가 올라가서 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바둑을 둔 일도 있었는데 그때 "저 자식을 내가 무조건 발 밑에 둘 날을 만들겠다."라고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진학한 이후부터 그 친구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 동네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압박이 내내 나를 누른 이유라고 생각되지만, 좀처럼 바둑을 가까이 할 시간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부모님이 원하시던 대학에 입학한 날 저는, 바둑동아리를 찾았고 그 곳에서 나의 중학교 때 잊었던 투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아홉 점을 깔라는 자존심의 상처 속에 치른 첫 대국에서 나는 당당히 나의 집들과 돌들이 여지없이 뭉개지는 현실을 알게 되었고 나의 목표는 학과 공부가 아닌 바둑실력 향상이 대학생활의 목표와 결부되었습니다.
 
떨어지는 학점만큼 바둑실력이 늘었음은 책상에 꽂혀있는 전공서적보다 바둑 서적이 많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지요. 사까다 전집과 현현기경이니 관자보이니 기경중묘 등 지금 본다고 해도 실력의 격에 어울리지 않는 책을 쌓아놓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불른 시절 이었습니다.

그런 환희에 젖을 무렵 나의 영원한 숙적 근호 그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버스 정류장에서 우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입을 벌리고 서로의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빙글 빙글 돌았습니다.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처럼 서로 그날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뒤로 밀었습니다.
토요일 오전이라고 기억되는데 제 방에 특별 대국실을 차리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윤 근호라는 친구도 그 동안 바둑이 많이 늘었는지 저보고 몇 점 치석을 해야 할거라고 자신했고 저 역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아마 예전의 빚을 만방으로 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예전대로 우린 호선으로 두기 시작했습니다.
 
첫판이 끝났을 때 우리의 얼굴은 서로 붉어 있었습니다. 서로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서로의 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꽤 여러 판을 두었지만, 그것은 그 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이상스럽게도 그날 대국의 결과는 저에겐 어떤 기쁨도 주지 않았지만, 그렇게 영원한 숙적으로 남겨야 할 대상을 잃어 버린 공허함이 저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학 때 목표로 했던 선배들을 이긴 기쁨 뒤엔 그런 공허함이 없었는데 패배를 인정하고 떠난 그 친구의 뒷모습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생각날 때마다 근호가 나의 가까이서 어떠한 분야에서든 서로의 의욕에 고취되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 역시 바둑실력이 느는 것보다. 바둑을 이기는 것보다 바둑을 통한 서로 나눈 수많은 수담 속의 우정이 나에게는 더 큰 의미가 되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근호의 근성은 남다릅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저를 기다릴지 모릅니다.
그 근성의 눈빛은 언제나 날 압도했기 때문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에게 지는 날을 꿈꾸는 것은 오늘 같은 가을 날의 감상일까요?

처절한 바둑판의 사투가 의미하는 것은 

                                           저니

웃는 모습 속에

나의 본성이 숨어있는 19로의 사투.

돌이 부딪칠 때 마다

나의 잔인함은

상대의 숨소리를 압박한다.

마치 전쟁터의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전쟁에서 하나하나의 돌은

인생 자체이기도 하고

힘없이 쓸려 내려간

나의 삶의 한 자락이기도 하다.

그 격정의 끝에서

지고 이기는 결과에 떠나서

부둥켜 안은 나를 찾는 것은

시신을 찾는 모정의 마음처럼

이름없는 사구에서

횡 하니 뒹굴고 있을

나를 찾는 애절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