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어깨 넘어로 배웠지만 집에는 바둑판도 바둑알도 없었습니다.

집집마다 접는 바둑판 없는 집이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집에는 판이라고는 천으로 이불 깁듯이 예쁘게 만든 가로 세월 1미터정도의 판만 있었습니다. 원래 용도는 다림질판이라고 했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도는 어른들의 취미생활투판이었습니다. 삼촌에게는 접는 바둑판이 있었습니다. 몇번을 싸인펜과 볼펜으로 줄을 긋고 니스칠을 한 손때가 잔뜩묻은 합판재질의 바둑판이었습니다. 이음쇠부분은 몇번이나 못질을 해서 못의 크기도 서로 다르고 말입니다. 바둑판이 없는 나에게는 그 바둑판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이런저런 집안 사정상 둘째 아들집이었던 우리가 할아버지와 삼촌과 같이 한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집이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들어온 것이지요. 이사를 오고 삼촌방이 기웃거리면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어린시절 책꽂이에 꼽혀있던 바둑책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바둑알로 흙장난을 하며 놀면서 책꽂이를 두리번 거리다가 책에 그림이 있어 몇번 가지고 놀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둑교본이었던 것입니다. 십여년이나 지나서 막 성년이되었을때였는데 용케 어린시절의 기억 속에서 찾은 것이지요.

집 밖에서는 바둑을 두지만, 집에 오면 바둑둘 사람도 없었고 내 바둑판도 없어 혼자 바둑을 놓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은행 다니는 삼촌 우연히 일찍 들어오는 날 중 가끔 바둑을 둘뿐이었습니다. 집이 전쟁통에 할아버지가 구한 집이라 구조가 이상했습니다. 두집의 벽을 헐고 한집이 된 형태로 담장 안에는 있지만 완전히 두집이 구별되어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삼촌과 같은 집에 살아도 대문만 같이 사용할뿐 어떻게 보면 옆집인 구조였습니다. 전쟁통에는 우리식구만 20명이 넘었고 피난온 집이 세들어 있어 엄청 많이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집식구 중에는 할아버지의 형님댁 식구들도 있었으니 실상은 세집이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깨넘어로 배운 바둑 실력은 책도 보고 대국 횟수도 많아지면서 점점 틀을 갖추어갔고 학교가서 배워온 바둑 실력은 금방 집안바둑실력을 능가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때의 기분은 여러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생활에 정체되어 있는 가족들의 바둑실력과 달리 밖에 가서 배운 실력은 집안에서는 슈퍼맨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비록 밖에서는 만만한 하수였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아버지와 하던 중에 바둑 이야기가 나와서 아버지와 바둑을 두게 되었습니다. 한판의 바둑이 나의 완승으로 끝이 나자 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아버지가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아버지 나이였던 시절 집에 좋은 바둑판이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때 할아버지와도 바둑을 두고 고모들과도 바둑을 두고 등등 바둑둔 이야기로 이어졌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 좋다는 바둑판에만 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형님이 결혼할때 형수님이 살림과 같이 가지고 온 바둑판인데..하면서 말입니다. 즉, 나의 큰어머니께서 결혼할때 가지고온 바둑판이라는 건데... 수십년전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도 결혼후 분가해서 몇십년을 따로 살았고해서 바둑판이 어디있는지 모른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년후 그 집에는 우리집 식구들만 살게되었습니다. 다시금 그때의 이야기가 생각난 나는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유력한 곳은 할아버지 방의 다락이었습니다. 늘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고 각종 전설의 종착역이었습니다. 전쟁통에 구한 총도 있었다고 했고 호랑이 가죽도 있을 것이라고 했고 말입니다. 그 전설의 가득한 다락을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확인하러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다락의 저 먼곳에 있는 창문으로부터 작은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사람이 앉아서만 다닐 수 있는 다락은 온갖 물건드르로 가득했습니다. 그 어두운 와중에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둑판이었습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너무나 쉽게 들어왔습니다. 짐들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그 가장 밑자리에 바둑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짐들을 치우고 바둑판을 꺼냈을때의 그 감격. 나도 바둑판이 생겼다는 그 기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바둑판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아마 지금도 친구들 중에는 가장 오래되고 좋은 바둑판일 것입니다.

비록, 안목이 높아진 지금 눈으로 보면 여러부분의 단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바둑판입니다. 바둑판을 바둑상사에 가져다가 윗판을 밀고 새로 칠을 하고 줄을 그었을때 그 느낌. 수십년의 잠에서 깨어난 바둑판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 바둑판이 꼭 나에게 소유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안 식구들 중에 바둑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바둑을 이기고 가지고 가라는 바둑실력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때 당시 기력을 지금 생각해보면 범무서운 줄 모르던 하룻강아지 9급)

어제 할머니 제사였습니다. 수십년만에 보는 고모님도 있었고 사촌 누나도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제사에서 서로 참석을 잘 못하고 참석을 해도 어긋나다가 이번 제사때 같이 보게 된 것입니다. 가장 늦게 문을 열고 들어선 나에게 "장동건"이라는 환호성을 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어 그 바둑판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했지만 아마 이야기를 했으면 다들 기억이 났을텐데 말입니다.

이제는 고모님이 할머니처럼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처럼 늙어버렸고 고모님은 병환으로 기력이 쇠해진 큰아버지를 보고 "오빠, 엄마가 오빠 얼마나 좋아했는데... 건강해야해.."하고 눈물을 비추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