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식당이 문을 열 무렵이 되자마자 영태는 아내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섰다. 

그런데 밤 사이에 영태의 마음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자고 이 생각 저 생각하던 영태는 혹시 아내의 말이 참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자기가 완벽하지 못하게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 후회가 되었다. 

자기는 쌈밥집 아주머니에게 아내가 저녁을 사 먹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이 잘 못된 것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이라면 아내가 오늘 저녁에 이 식당에 왔었느냐? 야만 했다. 

식당 아주머니가 ‘아니오’라고 대답한 것은 저녁을 먹었느냐? 에 대한 대답일 수가 있는 것이다. 

영태는 자기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밤새도록 자책하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렸다.

식당에 가까워오면서 영태는 자기가 잘못을 했고 아내는 무고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어젯밤에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무 잘 못이 없는 아내를 윽박지르고 고문을 가한 것이 아닌가? 

이 잘못을 어떻게 용서를 빈단 말인가? 

물론 아내는 자기가 공연히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잊어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도 아내에게는 더욱 불행한 일이다. 

영태는 아내에게 잘 못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아내에게 쌈밥을 사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시 영태의 예상이 맞았다. 

식당 아주머니는 어제 저녁에 아내가 식당에 와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고 하였다. 

물론 비누도 여기에서 아내에게 건네졌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아내와 같이 쌈밥을 먹는 중에 어제 아내에게 비누를 건넸던 아저씨가 우연찮게도 같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화장품 사업을 하다가 그 사업을 접고 다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재고품인 화장품을 이곳저곳에 나누어 주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였다. 

모든 의문이 깨끗이 풀린 것이다.

영태는 어떤 사태를 확실한 증거도 없이 넘겨 집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깨달았다.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내에게 쌈밥 한 번 사준 것만으로는 용서를 빌기에 한 참이나 모자랐다. 

영태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아내에게 시럽을 듬뿍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컵을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의 편의점에서 과자 세 봉지를 샀다. 

파랑, 노랑, 붉은색 과자 세 봉지였다. 

커피를 빨면서, 영태의 아내는 영태가 두 손에 한 아름 든 과자봉지들을 보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내를 보자 영태의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영태의 아내 못지않게 영태도 과자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집에 가서 과자 세 봉지를 꺼내먹을 생각에 영태의 가슴은 상당히 부풀었다.

차도를 건너는데 리어카에 폐지를 잔뜩 실은 한 노파가 눈에 띠었다. 

길을 다 건넌 다음에 영태의 아내가 눈짓을 했다. 

눈짓을 보자마자 영태는 얼른 파란 과자봉지를 노파에게 드렸다. 

어릴 적에 어렵게 자란 영태와는 달리 영태의 아내는 어릴 때 부유하게 자랐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영태의 아내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그런 장점에 대하여 영태는 아내를 존경하는 편이었다. 

영태 자신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 선뜻 마음에 닿지 않는다.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이라고 자조했다. 

영태가 기억하기에 자기는 남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남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여겼다.

영태의 기억에 크게 남는 도움들이 있다. 

어릴 적에 어머니께 매를 맞고는 집을 뛰쳐나가 서성거릴 때, 동네 어른들께서 따뜻하면서도 바른 충고를 해주셨다. 

“영태야, 너희 어머니가 너 만을 바라보면서 힘들게 사시는 것을 알고 있지? 어머니께 잘 해드려라.”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영태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외갓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산간벽지의 관광지에서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는 아들의 공부를 위하여 읍내에 있는 외갓집에 아들을 맡겼다.

 6학년 말에 외갓집에 사정이 생겨서 영태는 산간벽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서 들어갔기 때문에 6학년 때에는 엄청나게 공부를 할 때였다. 

그 해의 시험과목은 국어와 산수였다. 

매일 시험을 보고 혼나고, 시험을 보고 혼나고를 반복했다. 

공부가 지겨워진 영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힘든 공부를 집어치우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위기를 구해주신분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셨다. 

담임선생님은 영태를 자기 집에서 두 달간 재워주고 먹여주셨다. 

그 덕분에 영태는 그 지방에서는 꽤 유명한 명문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었다.

영태의 어머니는 절에서 누룽지를 많이 얻어오셨다. 

그 누룽지를 끓여먹으면 아주 맛이 있었다. 

꽁 보리밥을 먹는 것 보다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것보다는 백배나 더 좋았다. 

영태가 살던 시골 동네는 전기가 아주 늦게 들어왔다. 

영태가 대학교 다닐 때에나 전기가 들어왔을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밤에 등잔불로 불을 밝혔다. 

사기로 만든 등잔에 심지를 끼우고 등유를 넣어서 불을 켜는 것이다. 

이 등잔불은 희미해서 글씨가 작은 책은 보기가 어려웠다. 

물론 글씨가 큰 책은 볼 수 있었다. 

영태 어머니께서 읽으시던 고대소설은 글씨가 컸다. 

영태는 늘 어머니께서 읽어주시던 고대소설 ‘류충렬전’ 이나 ‘조웅전’의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영태가 보는 학교의 책은 글씨가 작았으므로 영태가 공부를 할 때에는 촛불을 켰다. 

촛불은 등잔불보다 훨씬 밝아서 충분히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 양초 역시 어머니께서 절에서 얻어온 것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