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총 동창회 바둑대회를 올해에는 개최한다고. 

나는 기꺼이 참석한다고 대답을 했다. 

선후배들을 만나고, 점심을 공짜로 먹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거나하게 취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나는 매일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즐기는 편인데 거기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다소 피곤한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집구석에서 편하게 빈둥거리기만 하면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적당한 고생은 사서라도 해볼 만한 것이겠다.

9시 반까지 오라고 했는데 그러려면 집에서는 9시에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나는 9시 반에 출발했다. 

어느 핸가 내가 제일 먼저 기원에 도착하여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에 홀로 앉아있었다. 

조용한 방안에서 점점 분주해지는 도시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소 지루했었다. 

일부러 늦게 나갔다. 

전철역까지 가는 동안 이번 행사에 대한 글을 써볼까 생각했다. 

마침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는 중이니 그 글체를 한 번 연습 해 볼 겸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와보니 기원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전에는 양철로 담을 쌓고는 한 창 공사를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새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주변 환경도 깨끗하게 바뀌었다. 

낯 선 풍경에 기원을 못 찾고는 헤매었다. 

30분가량을 허비했다. 

기원에 도착하니 이미 행사가 시작되어있었다. 

서둘러 명찰을 받고는 자리에 앉았다. 

넓은 방이 꽉 차 있었다. 어림잡아도 80명은 넘어보였다.

우리 기수의 친구들이 보였다. 

열 명이 훌쩍 넘게 왔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나중에 보니 모두 17명이나 되었다. 

우리 기수도 전에는 매년 바둑대회를 열었었다. 

나도 회장을 한번 한 적이 있다. 

우리 우보 회는 여러 사정으로 코로나 전에 모임을 그만두었다. 

얼마나 바둑이 고팠으려나! 

예전에 모였던 역전의 용사들이 거의 다 모인 셈이었다. 

물론 안 보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생활에 바쁘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있거나 이미 저세상으로 갔거나.

바로 단체전과 개인전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우리기수는 단체전에 나가지 않았다. 

웬일인지 물어보니 일회전은 부전승이란다.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우리기수가 상을 타야만 한다. 

그래야 그 상금으로 저녁때 넉넉히 먹을 수가 있다.

 만약 상을 하나도 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 야 하나? 

그 때는 뭐 독지가가 나타나겠지. 

설마 저녁때 술도 못 마시고 헤어지기야 하겠어? 

개인전은 갑 조와 을 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3급 이하의 실력자들은 갑 조이고 4급 이상들은 을 조이었다. 

 나는 4급으로 을 조이다. 

첫 판을 이겼다. 아슬아슬했다. 

좌변에 있던 상대방의 대마를 잡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바로 우변에 있던 나의 대마가 위기에 몰린 것이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살길을 찾던 중 뜻 밖에 상대방에게서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나왔다. 

선배라고 봐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얼씨구나 하고는 얼른 살아버렸고, 그것으로 바둑도 끝났다.

한 판을 끝내고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들은 식권을 받아들고 근처의 유명 회관으로 향했다. 

술은 무한정 갖다먹어도 된다고 하였다. 다만 남기지만 말라고. 

처음에는 우리 기수들은 술을 안 마시려고 했다. 

상을 타려면 맑은 정신으로 시합에 임해야하므로. 

그러나 선배들과 후배들이 너나없이 모두들 술병을 나르는 것을 본 우리들은 바로 눈이 뒤집혔고, 막걸리와 소주병을 꺼내왔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두 번째 판은 쉽게 이겼다. 

상대방 진영에서 수를 내어 대마를 잡았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상대방의 예봉을 모두 피하였다. 

상대방은 깍듯이 패배를 선언하고 아주 잘 두신다고 칭찬을 했다. 마음이 흐뭇하였다.

세 번째 판을 졌다. 

상대방은 후배인데 아주 패기 있게 바둑을 두었다. 

초반에 내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패가 안 되는데 패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눈이 어른거려서 그랬나? 

패로 잡으려고 단수를 치려는 순간 실수를 깨달았다.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나는 분투하였고 상대방은 느슨하게 대처하였다. 

어느 덧 형세는 오리무중이 되었다. 

감독관인 후배가 와서 동기인 상대방을 나무랐다. 

“야, 임마. 선배님 앞에서 바둑돌을 그렇게 싸가지 없이 세게 놓니. 그러니까 바둑도 불리하지.” 

정말로 내가 약간 유리해진 것 같았다. 

치열하게 종반에 임하는데 빨리 빨리 바둑을 마무리 하라는 경고방송이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착하게 바둑을 두었어야했는데 너무 모범생이었던 나는 그만 서둘러서 끝내려고 하였다. 

조그만 틈을 발견한 상대방이 날카롭게 추궁하고 나왔다. 

결국 시간관계로 바둑은 다 끝내지 못하고 연기바둑을 두러온 여류 프로 기사가 판정을 해주었다. 

TV에서 본 것 보다 훨씬 더 이뻤다. 

옥구슬 굴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이 조금 유리하네요.” 

그 한 마디를 듣자마자 나는 패배를 선언하고는 바둑돌을 바로 정리했다. 

어차피 내가 이겼어도 우리 기수와 좌 웅을 겨뤄야 했으므로 진 것이 어찌 보면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나를 이긴 상대방은 또 다시 내 친구 T도 이겼고, 준결승에서 우리기수의 K에게 졌다.

또 다른 조에서는 우리기수의 S가 승승장구를 하였다. 

한 판만 이기면 준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판에서 바둑을 그만 그르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기 바둑고수가 안타까워하였다. 

이길 수 있는 길이 수 십 가지였는데 모조리 피해갔다고. 

S는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그럴 줄 알았으면 대국 도중에 화장실에라도 다녀올걸. 하하.”

결국 우리기수의 K가 을 조 개인전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런데 상금액수를 확인하고는 모두들 실망했다. 

십 만원이었다. 그것으로 17명이 어떻게 저녁을 먹지? 

다행히 독지가가 여럿 있었다.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후원금을 보내온 친구들이었다. “친구야 고맙다.”

우리들은 기원 근처의 허름한 삼겹살집으로 들어갔다. 

K는 원주에서 왔고, J는 전주에서 올라왔고, 또 한 친구는 멀리 피지에서 왔다. 

서로들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웠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도중에 잠깐 ‘술을 절제하자.’란 명제를 잊어버린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맑은 정신으로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