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는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죽 가다가 끝의 휴식공간에 들어섰다. 

휠체어를 세워놓고 벤치에 앉았다. 

핸드폰을 꺼내었다. 

무슨 말로 사과를 시작할지 고민하면서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절반쯤 눌렀을 때 앞에서 ‘우두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뿔사! 일어서려던 아내가 넘어지는 소리였다. 

전화기를 집어던지다시피 하고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때는 늦어버렸다. 

아내는 이미 넘어져버렸다.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손바닥과 무릎 외에는 아픈 곳도 별로 없다고 하였다. 

병만은 이 사건을 처음에는 숨길까 생각하기도 했다. 

별 탈 없이 지나 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병원 곳곳에 붙어있는 ‘낙상금지’라는 표어를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병원에 신고를 하였다. 

병원에서는 병만이 보기에 비상이 걸린 듯하였다. 

즉시 정밀 진단에 들어가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샅샅이 파헤쳤다. 

병만은 차마 전화를 받다가 사고를 일으켰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창 밖에 보이는 천문대가 돌아가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여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그만 실수를 저질렀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사 분들도 이과 출신들이니 과학적인 관찰에는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계산이 병만의 머릿속에 있었다. 

다행히 정밀검사에서도 아내에게서는 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간호사분들만 병만 때문에 호되게 혼나고 고생한 셈이었다. 

이후로 병만은 간호사 분들 앞에서는 제대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힘든 재활 치료과정을 꿋꿋이 수행해나가는 아내가 대견했다. 

사실은 요령을 피우지 못하도록 딸애가 옆에서 감독을 한 영향도 상당했으리라. 

아무튼 이 병원에서 지낸 2개월 후에 아내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병원의 규정상 2개월 후에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만 하였다. 

아내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당당하게 두 발로 걸어서 택시를 불러 타고는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병만의 아내가 최종적으로 입원한 곳은 재활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는 휠체어를 탄 환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걸을 수 있는 환자들 이었다. 

6인실의 한 쪽을 차지했다. 출입구에 면한 곳이었다. 

가장 전망이 좋은 창 쪽은 한참동안 순번을 기다려야했다. 

병실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병만의 아내가 입원한 날에도 보호자들은 배추쌈을 싸서 나누어 먹으며 화기애애하게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환자에게 주는 식사량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병만은 아내에게 주어진 음식을 아내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바로 전의 병원에 비하면 치밀함은 덜했지만 그래도 이 병원의 치료과정은 빡센 편이었다. 

 아내는 어떻게든지 요령을 피워서 편하게 훈련을 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딸애가 눈을 부라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딸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날에는 아내의 세상이었다. 

병만이 아무리 옆에서 야단을 쳐도 병만의 말은 아내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병원에 와서 처음으로 병만은 야간 간호를 하게 되었다. 

스트레스로 날카로워진 딸애와 대판 싸우고 나서였다. 

그 동안은 낮에는 병만이, 밤에는 딸애가 맡아서 간호를 했지만 아무래도 야간 근무가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간 근무라고 해서 처음에는 아주 어렵게 생각했지만 지내고 보니 별것이 아니었다. 

이 병원에서는 8시쯤에는 대개 잠자리에 들기 시작한다. 

8시전에 방영하는 인기 연속극을 환자와 보호자들이 시청한 다음에는 모두 보호자 침대를 펼쳐놓고 커튼을 치고 잠 잘 준비들을 한다. 

그리고 8시가 넘으면 소등을 하고는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병만은 점퍼를 덮고 그 위에 담요를 다시 덮었다. 포근하였다. 

여기는 따듯한 실내가 아닌가? 

더군다나 바로 옆의 위에서는 아내가 잠을 자고 있으니 마음도 충분히 안정이 되었다. 

모험가들이 실외에서 비박을 하는 것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이 병원에서 병만은 아주 귀중한 체험을 하였다. 글을 쓴 것이었다. 

이 병원의 복도와 화장실 곳곳에는 ‘재활 응원 글’이라는 200자 정도 되는 짧은 글들이 게시되어있었다. 

아주 감동적인 글들도 많았다. 

그 글들을 읽으면 어쩐지 힘이 솟았다. 

이 글들은 일 년 동안 게시되고는 해가 바뀌면 다시 다른 글들로 대체가 되었다. 

그 응원 글 공모에 병만이 참가한 것이었다. 

병만은 학창 시절에 글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말은 더욱 못하지만 글도 잘 쓰지 못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치부하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내를 간병하면서 느끼는 우울 감이 쌓여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글이 쓰고 싶어졌다. 

집에 가서 단숨에 200자를 써 내려갔다. 

사무실에 제출하고는 은근히 기다렸다. 

결국 대상은 못 받았지만 우수상을 받았다. 

이 일로 병만은 글 쓰는 일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틈날 때마다 글을 써서 친구들의 카페와 무료 사이트에 발표하였다. 

간혹 칭찬을 받을 때면 기분이 아주 우쭐하였다.

3개월 후에 병만의 아내는 퇴원하여 집에 돌아왔다. 

육체적인 면은 상당히 호전되어 아프기 전의 상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인지능력은 초등학생 정도이고, 단기 기억력이 상당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도 집에 와서 전과 같이 생활하다보면 정신적인 면도 많이 좋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죽지 않고 살게 된 것만도, 또 누워있지 않고 걸어서 돌아다니게 된 것만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병만은 너무 큰 기대는 오히려 신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고 여기며 이 정도로도 충분한 만족함을 느꼈다.

병만이 친구들 모임에 참석해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아내에게서였다. 

자기를 찾아 집을 나왔다고 하였다. 

자기를 못 찾고는 실내 포장마차 주인의 전화를 빌려서 전화를 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병만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병만은 친구들과 하던 일을 제쳐두고는 지하철역으로 향하였다. 

지하철로도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아내가 있었다. 

딸애에게도 급하게 전화를 하였다. 

딸애는 아내가 집을 나간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내를 찾게 되었다. 

병만과 딸애는 맥이 쪽 빠졌지만 그래도 아내를 찾은 것에 크게 만족하였다.

또 다른 날에는 한 밤중에 집안의 전화기가 울린 적이 있었다. 역시 아내에게서였다. 

아프기 전에 가끔 찾아갔던 남대문의 새벽시장에 간 거였다. 

그 날에도 병만과 딸애는 아내가 나간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