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94, 사범의 노욕

두 집을 이겼다.

두 점을 놓던 상대는 너무 벅찬 느낌 이어 최근 선에 고미 5개로 바꿨다.

문정동 보세 옷 가게 구역 뒤쪽의 구치소에 근무하시는지 그는 교도관이라 들었다.

죄수들이 터프 하여 그들을 상대하다 보면 같이 터프 해 지는 것일지.

잃고 따는 것엔 무심하고 이기든 지든 많이 차이가 나 같은 편이 되면 부담스럽다.

황당한 수로 계속 공격에만 나서는 상대는 아직 경륜이 부족한 듯 하지만 서도 나름 일관성 있게 잡으러만 온다. 사냥을 즐기는 심성인가 보다.

초반에 상대의 우변 대마를 하나 접수했는데도 부자 몸조심한다는 식으로 조금씩 물러선 것이 좌하에 흑의 大家를 만드는 것을 방치하며 밀렸는데도 몇 집은 이긴 것이다.

그렇지만 별 무소용이지.

내편 이교장이 16집을 졌으니 두 집을 이겨봐야 우리가 진 것이다.

바둑 한 판 이기기가 이렇게 힘든 것인데 이겨봐야 같은 편이 많이 지면 소용도 없고 돈만 잃는다.

옆에 앉은 이교장은 또 27집을 진다.

돈 일 이 만원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만 최소한 성의껏 은 두어야 같은 편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인데, 불리하지도 않은 바둑을 종반 패를 하다 멀쩡한 대마를 죽이고 진 것이다. 저런 이들과는 바둑을 편가를 때 두지 않는 것이 상책인데.

명색이 사범이란 작자가 종반 끝내기에 마무리는 짓지 않고 노림 수만 획책하는 것이 더 우스운 인사이지.

우측의 같은 편 강원장은 김 사범에게 6집을 졌다. 계가를 해보니 딱 6집이다. 최선을 다하는 그의 바둑이기에 같은 편이 되면 마음이 편하다. 둘이서 같은 편이 되면 승률100%인데 오늘은 이교장이 혼자 다 망친 것이다. 화를 내보아야 무엇 할 것인가?

 사람만 더 우스워지지.

저 양반하고 치수를 어떻게 뒀어요?

“두 점에” 최 사범과 둔 이 교장은 말꼬리를 흐린다.

“저 양반 엉터리 바둑에 상대 말 잡으러만 다니니 정수로만 두면 최소 5방은 무조건 이기는데”

“나는 선 7목인데”

나와 호선인 이교장이 그에겐 두 점을 놓고도 지나보다. 내가 바둑을 너무 얌전하게 두니 정수로 두면 큰 차이가 나지 않고 이 교장 같은 분이 잘 버티는 것인가 보지.

명색이 작은 기원 사범이던 그는 정말 호랑이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 노릇일지 웃기는 양반이다.

바둑이야 잘 둘 수도 있고 못 둘 수도 있고 실력 차는 치석을 하면 해결되는 것이니 별 것 아니겠지만 바둑 두는 매너가 영 아니다.

조금이라도 유리하랴 치면 옆에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는데 어쩌고 저쩌고 제 혼자 설명에 희희낙락이다. 귀가 어두워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는 둘러앉은 이들이 제 욕을 하고 있어도 항상 듬성한 이빨을 드러낸 채 바보스런 웃음이다.

바둑판에 저 혼자 손가락질 해가며 중얼중얼거리는 것은 참 신비스럽기 조차하다. 저 나이에 세상물정을 모르고 저리 순진한 것인지 한심한 것인지 의아스런 인간이란 느낌뿐이다. 새끼손가락을 뒤집어 상대와 두고 있는 바둑판 위에 짚고 있다. 새 묘기까지 선보이는군.

김 사범, 박 사범, 황 사범, 전 사범, 최 사범, 구 사범, 손 사범, 심 사범..

사범 字 붙는 이들이 많기도 하지만 기력 외에 인품이나 모습에서도 사범 이란 단어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일까?

여럿 중에 사범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이는 누구일까?

예전엔 사범이란 기원에서 손님을 끌기 위하여 다방의 가오 마담처럼 월급을 줘가며 대신 처음 오는 뜨내기 손님이나 아침 일찍부터 찾아오는 노인들도 모두 마다 않고 바둑을 둬주며 내기는 하지 않아 손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상당한 기력의 소유자를 사범이라 칭했는데 기원운영이 어려워 문 닫는 곳이 속출하고 사범월급은 커녕 여직원 월급도 주기 어려워 주인장이 종일 지키는 곳이 기원이 되었으니 사범이란 용어는 바둑교실이나 도장에나 남을 유물이겠지.

어렸을 적 기원에는 기원손님들의 이름과 급수가 나무명패로 표찰처럼 죽 붙어있었다. 제일 앞은 원장이나 사범인데 그 당시 사범이란 가까이 다가서기 쉽지 않은 고아한 기력과 기품의 소유자라 선망했건만 이제는 기원에선 사라진 용어일 듯 하다.

프로 유단자들이나 연구생들이 모처럼 기원에 들리기라도 하면 사범이라 칭하겠지만

그 또한 공인된 기력 외에 그 사람과 속내를 겪어보며 인품에 마음속으로 승복할만한 시간이나 기회가 흔해 마음속으로 진정한 존경심을 품으며 사범이라 호칭하게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K기원 사범들.

그만한 기력에 도달하려면 평생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을 텐데,

많은 것을 바둑에서 배우고 느낀다고 생각하며 두어 왔을 텐데,

시대에 뒤쳐진 퇴물들의 놀이에 돈 만원이라도 용채를 벌려고 노욕을 못 버리는 것이 현실 아닌가?

김 사범은 네 점 접은 교도소양반의 대마를 잡아 좌 하와 변을 돌아가며 80여 호가 넘는 대가를 이루고도 상대의 유일한 집 우상의 새카만 철벽 속으로 들어간다. 패를 내어 살고 오히려 흑 귀를 잡아 만방으로 끝난다.

방내기도 아닌데 저렇게 심하게 두면 속으로 원심만 살 텐데,

사범소리 듣는 이들은 최소한이라도 격조 있는 바둑을 두어야 하는 것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