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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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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慾(1) 선비만석 바둑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김 씨는 관직에 고위공직자로 있다가 퇴직한 사람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군수영감님” 으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바둑을 좋아하다 못해 다른 사람 바둑 두는 곳에서 바둑훈수와 끼어들기를 좋아해 미움도 많이 받았으나 천성이 그래서 인지 나이 들어서 그런 버릇을 고치지 못한 탓으로 동네 기원에서 언제 부터인지 기피대상 1호로 꼽혔다. 밥만 먹으면 K시의 만방기원에서 소일하는 그에게 요즘 들어 고민이 하나 생겼다. 고민이란 것은 9대독자 외아들이라고 애지중지 하던 아들놈이 혼기가 꽉 찼는데도 도저히 장가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도 명문대학을 나와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도 붙어서 서울 고등법원에서 근무하는 아들놈은 취미라고는 유일하게 사진을 찍으러 여행을 하는 것인데 판사생활을 하다 보니 수많은 재판서류와 씨름 하느라 어느새 삼십 줄에 들어선지 여러 해 지났건만 이 녀석은 틈만 나면 사진기를 둘러메고 여행을 떠나니 어디 여자 만날 틈이 있어야 장가를 가던지 할 것인데 여자에겐 도통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김 씨는 그저 아들 중매를 서겠다는 사람만 생기면 반가워 할 지경에 이르렀다. 김 씨가 아들을 장가보내기로 마음을 정하고 보니 김 씨 눈에 들어오는 처자들은 모두를 예뻐 보였다. 다만 아들놈이 바둑에 취미가 없어서 바둑을 가르치려다 결국은 포기 하였지만 욕심이라면 며느리 될 아가씨가 바둑을 둘 줄 아는 여자였으면 하는 노욕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여류 프로기사를 며느리로 볼 엄두는 낼 수 없고 김 씨 정도의 실력이거나 아니면 그만 못해도 석 점 정도의 치수로 바둑을 아는 아가씨를 며느리로 삼고 싶었다. 그러던 김 씨가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체전 바둑대회에 관람 차 대회장에 들렀다가 그만 한눈에 반해버린 처자 때문에 병이 생겼다. 바둑대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김 씨는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꾀병을 앓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게 되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 졌다. “아니, 영감 도대체 무슨 병이래요? 병원에 가서 진찰이라도 받아봐야 할 것 아니에요?!” 김 씨가 머리를 싸매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꾀병을 앓고 있자 김 씨의 아내는 겁이 덜컥 났다. 늘그막에 영감을 잃어버리면 그야말로 어쩔 것인가 더군다나 아들놈이 아직 장가도 가기 전이니 너무도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대책을 세우고자 김 씨에게 닦달을 해보니 아들놈을 무조건 데려 오라는 이야기만 할 뿐 그만 입을 자물쇠 채우듯 채워버리자 아내는 결국 아들을 불러 내렸다. 아들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 들어오자 김 씨는 아들에게 유언을 한다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 올해가 가기 전에 네놈 장가가는 것을 봐야지 안 그러면 내가 제명에 못 죽는다. 너 어쩔 셈이냐?! 이 애비가 참한 며느리 감 하나 소개 해줄 터이니 만나보겠느냐?” “아니, 아버지 위독하시다더니........ 저 장가보내려고 꾀병을 앓으시는 거예요?” “이놈아, 네 나이기 몇이냐? 나이 서른셋이나 먹도록 이 애비에게 손주 놈도 하나 안겨 주지 못하는 불효막심한 놈” “내참, 그러시면 맞선을 보라고 하시면 되지.......아버지는........” 김 씨의 아들은 아버지의 꾀병이 자신 때문 이란 걸 알자 그만 웃음이 나왔으나 아버지 앞이라 민망해서 웃지도 못하고 뒷머리만 긁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강요로 맞선을 보기로 덜컥 약속을 하였다. 아들이 맞선을 보기로 약속하자 김 씨는 바둑대회에서 점 찍어둔 아가씨를 수소문해서 만나보았다. 미모에 바둑실력도 출중한 아가씨는 연구생출신이고 M대학 바둑학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바둑전문지에 취재기자로 맹활약을 하는 아가씨였다. 그러나 김 씨의 아들은 이미 장래를 약속한 아가씨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원이니 맞선을 보기로 하였는데 아버지를 통해서 그 아가씨가 바둑을 잘 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위기를 벗어날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내었다. 드디어 맞선을 보기로 약속된 날 아들은 아버지에게 내기를 걸었다. “아버지, 그 아가씨가 바둑을 잘 둔다면서요?” “그럼, 연구생 일조 출신인데 당연하지........” “제가 그 아가씨와 바둑을 두어서 이기면 제가 그 아가씨와 결혼을 안 해도 야단 안치실거지요.” “네놈이 미쳤구나. 네가 바둑을 둘 줄이나 아냐?” “아버지, 저도 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웠습니다.” “그런 엉터리 바둑으로 연구생을 어떻게 이기냐? 네 맘대로 해라. 결과야 뻔 한 거니까.......다만 지면 그 아가씨와 무조건 결혼 하는 거다.” “알았습니다. 두말 하지 않으실 거죠.” 아들은 김 씨에게 그렇게 다짐을 받았다. 김 씨는 아들에게 그러라고 약속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김 씨의 노욕에 불과했다. (다음에 계속) 老慾(2) 선비만석 승부란 한 사람이 이기면 한 사람은 지는 것이다. 즉 승자와 패자가 구분되어야 하는 숙명을 승부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김씨의 아들은 승부수를 던졌다. 기실 대학에 다니면서 고시를 남들이 다 붙는 재학 중에 붙지 못하고 법대를 졸업한 후에 붙은 이유도 바둑 때문이었다. 주말인 토요일 날 점심시간에 김씨가 그 처녀를 집으로 불러 대국을 하기로 정하는 바람에 김씨의 아들은 결혼을 약속한 여자와의 데이트도 취소를 하고는 집에서 아가씨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가씨와의 대국을 이겨서 아버지의 욕심을 잠재우고 자신이 사귀는 아가씨를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둑을 둔지가 오래 되어서 아무래도 석 점은 접혀야 할 것 같았다. 연구생 1조출신이라면 프로와 다름없는 실력인데 겨우 오로에서 아마5단인 자신이 석 점으로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일 것 같다. 그렇다고 넉 점까지 접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다. 거실에서 바둑판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식구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현관 쪽으로 향했다. “아 이놈아, 뭘 해 어서 문 열어 드리지 않고.............” 김 씨의 불호령이 아들의 귀를 강타했다. 김 씨의 아들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연한 연두색 정장 차림의 아가씨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문 앞에 서있었다. “아, 최 사범 어서와요. 내가 너무 무례한 부탁을 했지요.......” 김 씨가 황급히 아가씨를 안내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김 씨의 아들은 그 아가씨의 첫 인상이 어딘가 눈에 익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보았더라?) 몹시 궁금하였으나 물어볼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최 사범이라 불리는 아가씨도 김 씨의 아들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목례를 하였다. “최 연희라고 합니다. 이렇게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늙은이가 너무 주책을 부려서 미안합니다. 최 사범님.” “아니에요, 군수님이 불러주시니 저야 영광이죠.” “아이고, 지금 점심준비가 되었으니 우선 오찬을 하신 후에.......” 김 씨의 아들은 아버지가 저리도 젊은 아가씨에게 쩔쩔매는 것이 신기했다. 군수 출신이라 남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젊은 아가씨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어쩌면 아버지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온다고 전날부터 어머니는 장을 보시고 미리미리 점심준비를 하신 탓에 식탁은 푸짐한 요리가 자리를 꽉 채웠다. 최 사범 이라는 아가씨는 아주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김씨의 아들은 최 사범이 음식을 먹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인상이 아주 붙임성 있게 생기고 눈도 큰데다 키도 늘씬한 아가씨가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자 어머니는 이것저것 더 권하면서 손님 접대에 신경을 스시는 것이 마치 며느리 될 사람이 온 듯 그렇게 하신다. 김 씨의 아들은 음식이 푸짐하여 좋기는 하였으나 잠시 후의 대국에 치수를 얼마나 하여야 할까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어찌 되었거나 이겨야 하는데 이기려면 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넉 점이라도 접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오찬이 끝나고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저........치수는 어떻게 할까요?” “이놈아, 네놈이 바둑 좀 두는 것 같은데 그래도 최 사범에게는 넉 점은 접어야 판이 짜일 거다.” 김 씨가 아들의 실력을 얍 잡아 보는 듯한 말투로 말하다 김 씨의 아들인 용재의 마음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넉 점을 접혀야 되겠죠?” 용재는 그렇게 말하면서 최 사범이라는 아가씨와 눈을 마주치면서 입가에 웃음을 웃었다. 최 사범도 용재의 웃음에 가볍게 웃어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넉 점을 접고 제가 이기긴 힘들겠네요.......걱정 안하셔도 될 거예요.” 하고 말하고는 용재가 흑둘 네 점을 네 귀에 착 점하기를 기다려서는 섬섬옥수의 하얀 손을 들어 바둑통 속으로 담그더니 흰 돌 하나를 들어서는 나비처럼 날렵하게 우하 귀에 날일자로 걸친다. 용재는 착실히 지키기만 하면 이긴다는 생각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바둑돌이 어우러져 가면 갈수록 백돌들은 살아서 꿈틀댄다. 반면에 흑돌 들은 자꾸만 움츠려 들면서 지키기에 급급하다. 김 씨는 아들놈이 움츠려만 드는 바둑을 두자 혀를 끌끌 찼다. 사내자식이 미리 겁부터 먹고 싸움을 피하는 꼴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바둑은 두어 시간이 넘도록 마치 청룡백호가 어우러지듯 그렇게 어우러지다가 종국을 맞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老慾(3) 선비만석 바둑에서의 화국은 빅이라고 하던가. 요즈음은 이 빅을 없애고자 허상의 반집을 만들어서 승패를 분명히 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으니 프로에게 반집은 영원히 넘어야할 숙명일 것이다. 반집 승부를 쫒아 19로의 반상을 헤매는 승부사의 고뇌를 프로가 아닌 사람은 어찌 알랴. 물론 아마추어 바둑도 요즈음은 흑번으로 두는 사람이 여섯 집 반을 공제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접바둑은 그러한 룰이 적용되지 않는다. 용재가 바둑을 마치고 종국이 되어 계가를 하여보니 반면은 빅이었다. 용재는 바둑을 두면서 최 사범의 바둑이 자신이 넉 점을 접히고도 이길 수 없는 바둑임을 몇 수두지 않아서 이내 알아 차렸다. 물 흐르듯 하나의 빈틈없이 두면서도 다른 사람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도록 반면을 빅으로 이끌어 가는 그녀의 바둑에 용재는 바둑 두는 시간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아니, 이럴 수가.........빅이라니요. 최 사범님 혹 봐 주신 것 아닙니까?!” 종국 후에 계가를 한 결과를 직접 보게 된 김씨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아해 하였다. “아드님 바둑 실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질 뻔 한 것을 가까스로 빅으로 만들었는데....... 빅이면 어찌해야 하나요?” 최 사범이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띠우면서 정색을 하고 김 씨에게 반문하면서 용재와 눈을 맞추었다. 용재는 그녀의 시선 속에 무엇인지 모를 카리스마를 느꼈다. “거참, 빅이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니.........” 김 씨가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김 씨도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 탓에 빅이면 어쩐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제가 용재 씨와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되었네요.” 최 사범은 용재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의 톤을 조금 높여서 말했다. 용재는 왜 최 사범이 자신과의 대국을 일부러 빅으로 만들었는지 그 속내를 짐작 할 수 없었으나 어찌 되었거나 최 사범과의 결혼만은 모면 할 수 있게 된 것을 최 사범에게 감사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거참, 최 사범이 이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용재 너는 결혼할 아가씨를 데려 오기 전에는 한 번 더 바둑을 두어야 할 줄 알아라.” 김 씨는 바둑이 빅이 된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아들에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아버지, 그렇잖아도 아버지에게 다음주에 소개시켜드릴 여자가 있습니다.”
용재는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받았다. 아버지가 초청한 최 사범 앞에서 자신이 여자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였다. ‘아니, 네놈이 사귀는 여자가 있단 말이냐? 뉘 집 자식인데? 직업은 있느냐? 학교는 어디까지 나오고?“ 아들이 아가씨를 사귀고 있다고 하자 김 씨는 속사포처럼 질문을 하였다. 자칫 하다가는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할 아들놈이 아가씨가 있다는 말에 반가워서 최 사범이 옆에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아들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아이참, 아버지 손님도 계신데.......다음 주에 데리고 오면 그 때 직접 물어보세요. 아마 아버지 마음에 쏙 드는 여성일겁니다.” 용재는 최 사범 보기가 갑자기 민망스러워서 그렇게 말하고는 종국 후의 바둑판에 놓인 바둑돌을 통에 쓸어 담았다. 최 연희는 김 씨의 간절한 부탁으로 용재와의 대국을 허락하였으나 김씨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용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여 사전에 사람을 넣어서 알아보았다.
그가 서울 고등법원의 부장판사이며 취미는 바둑과 등산인데다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라는 것을 사전에 알았고 인물 또한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완소남 이란 것을 알고는 김 씨가 추진한 대국에서 무조건 이겨서 용재와의 결혼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하였으나 그것은 자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한가지 묘수를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바둑을 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바둑이 빅이 되는 것을 김 씨의 아들 용재 자신이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다음은 최 사범의 기막힌 작전에 용재가 빠져 들도록 하리라는 계획을 세웠다. 넉 점 바둑이 사실은 힘든 바둑이었다. 용재도 오로에서 5단으로 두는 실력이니 그리 만만한 바둑은 아니었다. 하나 연구생 일조에서 입단의 문턱을 두고 프로 기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기자로서 출발한 연희에게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다.
처절한 프로의 승부세계에서 어차피 살아남는 자는 승자뿐인 것이 그녀는 싫었다. 바둑을 전 세계 적으로 알리고 뛰어난 바둑기자로서의 명성을 얻고 싶다는 쪽으로 진로를 바꾼 것은 그녀의 글 쓰는 재주 때문이었다. “차랑, 과일 좀 드세요” 김 씨의 아내가 향기가 진한 유자차와 과일들을 가지고 대국이 끝난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 최 사범 이거 미안합니다. 내가 너무 노욕을 부렸나 봅니다. 바둑이 빅이 되었으니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보네요. 허허허” “아닙니다. 제가 꼭 이기려고 했는데....... 용재 씨가 저랑 결혼하기가 겁이 났던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두시는 바람에 결국 빅이 되었네요.” 용재는 얼굴색 하나 변함이 없이 둘러대는 최 사범에게서 말 못할 기운을 느꼈다. 최 사범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비책을 용재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 한판의 바둑이 용재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바둑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하였다. (다음에 계속)
4편 재판서류 부피는 사건이 복잡 할수록 두꺼워 진다. 판사의 업무 중에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재판서류를 읽고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형사사건에 있어서는 법률을 위반하였느냐 아니냐의 판단인 반면에 민사재판을 하는 경우는 곤혹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용재는 재산다툼의 민사사건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재판임을 아는 지라 그런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하지만 초임 판사도 아니고 부장판사인 자신이 맡아야 하는 민사재판이 점차 많아지자 많이 힘들었다. 바둑도 곤마가 많아지면 힘들 듯 재판도 복잡한 민사재판은 판사라는 직업이 남들이 보기에는 선망의 대상인지 몰라도 당자자인 용재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각종 증거자료를 보고, 이해당사자간의 다툼에 대해 재판상의 판결을 내리려면 그것은 중노동이었다. “띠리리링........” 용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용재는 자신이 사귀는 미선이가 전화를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얼른 받았다. “나야, 이 시간에 웬일이야?” “용재 씨, 저 최 연희 기자입니다.” “네?!, 최 기자라고요.” “왜요, 전 전화하면 안 되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여자친구 전화 기다리시는 걸 눈치 없는 제가 전화를 했나 보네요!!” 여자들의 직감은 이럴 때는 소름이 돋는다. 용재는 최 연희 기자가 어쩐 일일까 궁금해 졌다. 지난번 바둑을 둔 뒤로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으나 자신이 먼저 전화를 하기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 뒤로는 최 기자에 대해 말이 없으시기에 그는 그만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에서 아주 커다란 박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쩐 일이세요?” “제가 이번에 고교 동문 전 바둑시합을 사전에 취재를 하기로 되어있거든요. 출전고등학교와 선수명단을 보다가 용재 씨 이름이 K고등학교 선수 명단에 있기에 취재를 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절 취재 하신다고요?” “용재 씨가 주장으로 되어있던데 판사님이라 너무 바쁘신 것 아니에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럼 가도 괜찮은 걸로 알고 내일 들리겠습니다. 내일 점심이나 한 끼 사주셔요.” “아, 네.......” 용재가 미쳐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용재는 그녀의 행동이 무례하기 보다는 자신에 넘치는 행동처럼 느껴져서 내심 흥미를 느꼈다. 마침 내일은 목요일이라 재판도 없으니 점심시간을 내는 것은 무리가 아닌 듯 하였다. 사실 바둑을 두고 난 뒤에 최 연희 기자가 왜 일부러 자신이 진 바둑을 빅으로 만들어 주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눈치를 챌까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지 못하였으니 이번에 만나면 그 이유를 물어보리라 생각하였다. 용재는 최 연희와 통화를 한 뒤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도 맑아지고 재판 서류를 보는 것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최 연희는 바둑을 둔 이후에 용재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렸으나 용재의 아버지는 그 뒤로 아무런 연락을 주지 않았고 차일피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고교바둑 동문 전 선수명단을 우연히 살펴보다가 낯익은 이름인 용재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용재와 인연을 이어갈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최 연희는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용재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이 고교 동문 전 취재는 이미 보도국에서 다른 기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최 연희는 보도국장을 찾아가서 자신이 고교 동문전을 취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 최 기자 고교 동문전엔 나이 드신 분들이 출전하는데 우리 최 기자 스타일과는 안 맞을 텐데.......어쩐 일이람?” “국장님, 제가 이번 고교 동문전에 취재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게 뭐지? 말해봐 이유가 타당하면 내 들어주지” “지금은 뭐라 말씀드리기 곤란하고요 담에 일이 잘되면 제가 한턱 쏩니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자넨 꽃 미남 프로기사 취재가 전문 아니던가?” “아니 해 주실 건지 아닐 건지 그걸 말씀해주세요 국장님.” “최 기자 떼쓰는데 안 해 주면 나중에 그 원망 내가 어찌 듣나” “감사합니다. 국장님.” 이렇게 어렵게 만든 취재의 기회를 최 연희는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용재라는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여자의 유혹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진하게 꿈틀대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표범 같은 노림수를 그녀는 준비하고 있었다. 바둑을 빅으로 만들 때부터 시작된 그녀의 노림수가 용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용재와의 통화를 끝낸 최 연희는 피부메이크업을 받기로 하였다. 단 한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평소의 그녀의 지론대로 그녀는 용재를 그녀의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싶어졌다. 마치 엄청난 힘으로 상대방의 대마를 함몰 시키는 싸움꾼처럼 그렇게 그녀의 욕망이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계속)
5편 용재는 아침부터 불안했다. 최 연희가 점심을 사달라고 하였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가자 혹여 미숙이 전화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염려가 되었다. 미숙은 가끔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서 용재와 점심을 먹자고 하기 때문이었다. “부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야, 그냥 좀 기분이.......” 총무과 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왔다가 용재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말을 걸었다. 용재는 자신이 초조해 하고 있는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용재의 핸드폰이 거세게 떨었다. 최 연희였다. “여보세요. 연희 씨........지금 어디예요?” “어머 용재 씨, 제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저 지금 법원 앞이거든요. 지금 나오실 수 있나요?” “아, 그러세요. 금방 나가지요.” 전하를 끊은 용재는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가지러 가기위해 승강기를 탔다. 그 때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미숙이다. 하필 이런 때 전화를 하는 것이 맘에 걸린다. “자기, 어디야?” “아, 나 점심약속이 있어서........” “누구랑?” “검찰청 부장검사 하고.........” “에이, 하필이면 오늘이야........”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이지?” “어휴 누가 판사님 아니랄까봐...........오늘이 우리 만난지 삼백일 되는 날이잖아.......” “아.......삼백일.........이다, 저녁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알았어, 점심 맛있게 먹어.......”
미숙의 전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승강기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오늘따라 외식을 하러 나가는 직원이 많은 모양이다. 용재는 자신의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법원의 현관 앞에서 기다릴 최 연희가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이 보면 또 머라고 수군거릴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판사라는 직업이 이럴 때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현관 앞에는 법원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그녀는 그런 곳에서 기다릴까? 혹시 나를 자기와 사귀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현관 앞으로 차를 몰았다. 연희는 용재가 어떤 모습으로 자기를 데리러 올까 궁금하였다. 법원의 부장판사라는 공식적인 직함이 그를 나이 보다는 점잖은 사람으로 보이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그는 삼십대 초반이다. 열정적인 마음이 가슴속에 있다면 불을 지피면 활활 타오를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어제부터 자신의 미모가 돋보이도록 더욱 정성을 들였다. 연희는 사랑은 재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쟁취하지 못했던 그 사랑을 용재를 쟁취함으로 얻고 싶었다. 검은 승용차 한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랜저였다. 차가 그녀 앞에 서더니 용재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조수석 차문을 열고는 그녀가 타기를 기다렸다. 연희가 차에 오르자 용재는 재빨리 차에 타더니 차를 몰고 법원의 정문을 나서자 도심지를 향해 수많은 차량의 물결에 섞여버렸다. 서초동 법원 앞은 차량의 물결로 뒤덮여 있었다. “어디로 가실 거죠?!” “뭘 좋아 하세요” “점심시간인데 간단한 걸로 할까요?!” “아닙니다. 연희 씨가 좋아하는 것으로 하지요.” “스테이크 아주 맛있게 하는 집 아세요?!” “예, 알죠.” “낮이긴 하지만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와인 한잔을 하면서 스테이크를 먹으면 어떨까요?” “좋아요. 제가 안내하죠.” 용재는 도심지를 통과하자 한강변 88올림픽대로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양식집 “뜨락”이 생각났다. 미숙과도 몇 번 다녀온 곳이었다. 점심시간을 어쩌면 길게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고교동문전 취재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터뷰를 빙자하여 용재 자신을 만나러 온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연희는 용재가 차를 모는 옆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준수한 외모에 판사라는 직함이 주는 카리스마 때문인지 용재는 어디하나 빈틈이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오늘은 탐색전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천천히 좀더 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그에게 가장 알맞은 대처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오늘은 그저 고교동문전 취재에 관해서만 그에게 묻기로 하였다. 처음부터 너무 들이대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야 말로 위험한 도박이다. 내 패를 보이는 것처럼 위험한 도박은 없다. 그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처음부터 드러내 보이는 것이야 말로 패를 다 보여주는 것이니 전혀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그렇게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그녀가 바둑을 빅으로 만들던 그날의 마음속의 다짐을 용재가 알아채게 해서는 오히려 우스운 여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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