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초식

난로 앞에 자리를 잡곤 wild swan 읽던 것을 펴 든다.

기원중앙의 작은 전기풍로 는 애처롭게 작은 모습으로 어려운 사정을 웅변하는 듯도 싶다. 석유난로 하나라도 큼지막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으면 그다지 가난한 마음이 들지 않을 텐데 석유값이 비싸서일까?

12년 고교 선배인 원장은 풍상을 겪어 오시느라 그렇겠지만 인색하고 기원의 분위기나 청소 청결은 안중에 없으신 듯 하다. 나를 포함한 딸깍발이 들의 한계일까?

저편에선 벌써 10명이 편을 갈라 편 바둑을 시작하느라 소란하다.

각 팀에 다섯이면 꼴찌가 두 명 이어 다섯 중 둘은 지면 벌금까지 내야하고 워낙 여럿이 두다 보면 승패는 그야말로 뒤죽박죽 운 일 뿐이다.

오후 이른 시간인데도 판이 시작된 것에 마귀와 손님의 비율을 세어본다.

10명중 6명이 마귀이군.

청조의 몰락과 국민당 공산당의 태동 일본과의 항전 등 중국현대사 속의 여인 삼대의 이야기는 만주를 배경으로 어린 딸을 안고 군벌의 첩살이를 탈출한 후 40년 연상의 한의사와 결혼한 할머니 와 만주에서 일제하에 학교를 다니고 교사가 되어 공산당활동을 하며 공산당 간부와 결혼 후 중공이 자리잡아가는 과정의 민초들의 이야기 등 이제 반 정도 읽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만주의 옛 풍속과 가까워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잘 모르고 있던 중국공산당, 그들이 한국전에 백만을 보내며 미제의 침략과 대만의 장개석이 본토를 침공할지 두려워하고 버마 등에선 잔존세력이 준동을 일으키며 공산당은 조직강화와 숙청에 힘쓰는 등 흥미진진한 전개이다.

돋보기를 쓴 채로 한 줄 한 줄 책갈피에 끼우는 받침으로 줄을 대가며 읽지만 손을 놓기가 어렵다.

바둑 두러 온 것인가 책을 읽으러 온 것인가?

편 바둑에 들어 중앙대마는 맞보기로 살기에 상변 한 칸을 벌려 실리를 확보한다.

오퍼상 박사장의 치중에 바깥으로 한 칸 뛰면 되는 것을 깜박 잊고 손이 따라가 중앙대마가 죽어 55집을 지곤 편 전체를 지게 한다. 그 후 김이 새서 인지 몇 집을 간신히 이기면 편 다른 이가 몇 십 집씩 지곤 하여 계속 잃기만 하여 십여만 원을 넘는다. 마귀들은 판을 키우자며 만원 이 만원 삼 만원으로 계속 올린다. 운수 좋은 날이 있으면 없는 날도 있으니 그 정도에서 물러서면 될 것을 복구한답시고 밤11시가 넘도록 일어서지도 못한다. 이렇게 되면 바둑이 아니고 놀음 일뿐인데.

승부수를 던진다는 것이 나락에 빠져드는 것 이겠지.

“삼성 사장님은 개 초식에 약해”

“정석도 잘 알고 잘 두는 이들한테도 센데 막 바둑엔 약하셔” 마귀들이 곁에서 하는 이야기는 공감도 되지만 염장을 지른다.

네 점 하수에게 중앙대마를 잡히고 진다.

이런 이들 하고 바둑을 두는 내가 잘못이지.

필리핀에 몇 해 있을 때 기원도 없고 소일거리를 미국에서 헌책을 보낸 것을 싸게 파는 책방들이 있어 여러 권씩 사다가 보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

Wild swan 과 csi, a beautiful mind 세 권을 사다 놓곤 아직 첫 권도 반 밖에 못 읽고선 기원에서 시간을 보내니 한심한 것인지.

이청 선생의 글속에서 본 이야기를 하자 북한에서 발행한 이조 실록을 꼭 사주겠다는 처에게 감사하며 책만 볼 수 있다면 행복한 것이지만 내가 지금 책이나 보고 있을 시간인가 싶어 사치라 여겨지며 마음만 다급하다.

한 판의 바둑 속에 시간을 잊고 싶지만

정작 바둑은 번민과 후회만 남기는가?

처에게 내심 걱정만 주는 것은 아닐까?

벌써 6 년여 인지 이름도 밝히지 않으시며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바둑인,

벌써 몇 년째 꾸준히 해외장애아동결연 두 구좌를 후원해 주시는 바둑인,

해외 초교건립 자금을 쾌척 해준 동기인 바둑인,

바둑 배운지 몇 십 년 지나서나마 바둑의 의미와 역사를 알게 해 주신 이청 선생 등

반 상 에는 많은 것이 담기는 것 이겠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