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온 국민의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 가슴속에 자리 잡은 한 겨레로서의 자부심과 서로를 향한 신뢰와 온기는 더욱 커져갔다. 국민들이 열망에 정치가 화답했다. 정치가들도 모두 다 같이 한민족의 일원이기에, 마음속의 바람이 같았기에, 나뉘어진 겨레의 아픔이 이제 치유할 기회가 도래되었음을 알기에 ···

다시 강원도 고성의 ‘금강산 전망대’ 717OP. 이곳에 다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번에는 낮이었다. 양국의 정상이 이번에는 공개회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세계 여러 나라의 취재기자들과 방송장비도 보였다. 남북의 회담 장면이 남, 북한만이 아닌 세계를 향해 중계되고 있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 휴전선에서 일어나는 역사적인 회담은 전 세계인의 비상한 이목을 집중시켰다.

“북측에서 발표하신 ‘일본 14도시의 포격’ 발언을 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말았습니다. ‘완벽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일본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갖가지 행위들에 남조선의 인민들이 불편해 하듯이 우리 인민들도 분노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그 분노를 남조선의 ‘의사’들이 씻어주었는데 우리는 한민족의 이름으로 그 정도는 해내야 한다는 각오를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한민족은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 일로 우리는 양국 사이에 남아있었던 역사의 앙금을 모두 깨끗하게 씻어냈습니다. 다시 하얗게 새로워진 우리 민족의 비단에 앞날을 향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 그림이 우리의 웅장한 미래를 펼치는 명작이 되도록 북조선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양국 정상은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감격적인 포옹을 나누었다.

이 중계를 보며 가장 처참해진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평화를 꽃피우는 비둘기역할을 하였다.’

‘한반도가 일본의 도움으로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야스쿠니를 폭파당한 일본이 대인배의 모습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선물했다.’

모든 일본의 매체들이 정부를 조롱하고 있었다.

일본 정치인들이 맞는 역풍은 더욱 거셌다. 내각이 총 사퇴하고, 우익에 기대어 정치적인 생명을 유지하던 정치인들이 대거 밀려났다. 그리고 언론들은 세습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치 풍토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일본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학을 막 졸업한 아들이 지역구를 승계 받는다. 아무 정치적인 자산이 없고, 경험조차 하나도 없는 애송이들이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손쉽게 정계에 입문하고 계파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일본 정치고 정치인들이다. 이것이 정당한 일인가. 세계 유일의 폐습이 이대로 유지되어도 좋을 만큼 일본인들은 정치에 무감각한 것인가, 아니면 무지한 것인가.’

‘이런 정치 풍토는 정치적인 철학이 없는 정치인들을 양산하고, 그렇게 정치를 시작한 이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뱉는 우익들의 말에 현혹된다. 밑천이 없는 정치인들의 근본 없는 정치 이념을 우익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지만 현실이었다.

북한이 ‘반일 3.1 인민봉기 기념일’을 맞아 최선애 일가를 북한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통신을 통일부에 전달하였다. 이미 한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라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 이른바 ‘독립운동의 성골가’로 불리고 있는 최윤경 일가를 이용해, 한민족이 공동으로 기념으로 삼고 있는 3.1절을 맞아, 남, 북한의 화해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모든 매체는 ‘독립운동의 성골가’를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매우 매력 있는 타이틀로 부각시키며, 특집으로 다루려는 시도를 수없이 하였다. 그렇지만, 최선애는 모든 요청을 거절했다. 공익광고나 기업광고에 출연 요청마저도 사절했다.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다.

‘독립운동이라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를 이행했음을 빌미로 우리 가족은 어떠한 이익이나 특권을 누리는 일도 사양한다.’

그녀의 이런 입장 표명은 국민들을 더욱 열광하게 하였고, 모든 매체의 구애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녀가 북한의 초대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북한에 ‘가족들이 고모의 고향인 선천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고모가 살아있을 때 늘 그리워하던 곳을 다녀오고 싶었다.

‘선천에 흰 흙이 있어서 백현리 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어. 거기가 고모 고향이야. 고모의 첫사랑 박혁오빠는 선천 경찰서를 폭파 하던 날, 20리길을 부상당한 몸으로 걸어서 고모를 찾아왔지. 그 동네에서 오빠가 돌아가셨다.’

고모는 첫사랑을 이야기 할 때 얼굴이 이른 아침의 나팔꽃처럼 빛나다가,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한낮의 나팔꽃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정부의 허락으로 ‘독립운동 성골가’는 북한의 3.1절 행사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대로 북한은 일행을 선천군 백현리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그녀의 가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곳에 고모 최윤경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져 있었다. 북한은 그녀의 가족들에게 진심을 전달하고자 방북기간 내내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배려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우리 민족에게 인식되어지는 의미가 엄청난 것임을 이번 방북으로 절실하게 느꼈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생각은 지금의 대중들이 보내는 환호가 일시적인 바람이고, 곧 사그라질 관심으로 여겼어. 나는 이 현실이 차라리 두렵다. 제부는 목숨을 던졌고, 선미는 남편을 희생당한 채로 살고 있고, 내 아들 대한이는 몇 차례나 목숨을 걸었다. 나는 너희들의 희생에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언니! 또 그런 말을 한다. 언니가 집안을 지탱해주지 않았으면 우리의 현재는 없어. 집에 기둥이 없으면 천정이 무너져. 그리고 언니는 대한이의 엄마야. 대한민국의 ‘의사’ 한 명이 언니 손으로 길러졌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돼. 나도 북한을 다녀오고 생각이 더 많아졌어. 나는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가야할지 방향을 잡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맞아, 엄마. 엄마가 나를 낳고 길러주었어. 엄마의 귀한 희생으로 오늘의 내가 있는 거야. 이모 말씀처럼 나도 지금이 매우 혼란스러워요. 내가 이런 환호와 관심을 받으려고 거사를 한 것이 아니잖아. 모든 게 조심스럽고, 사실은 겁이 나. 나는 그냥 평범한 한국의 20대 남자일 뿐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 한용운 총사령관님과 이재길 의장님을 모시고 여쭤보자. 과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좋은 생각이다. 지금 우리 네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분이 필요해.”

남한의 통일부장관과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가졌다. 점점 더 강력해지는 국민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수용하고자 실무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위원장님과 제가 앞으로 무척 자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요구가 무척 강렬합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장관님. 순수하게 하나이고 싶은 민족의 염원을 우리가 잘 받들 수 있도록 정말 자주 만나서 잘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두 분 정상들은 지난번 비밀 회동 때 주고받은 전화기를 가끔 사용하시는 것 같던데요.”

“두 분들의 의지가 강하십니다. 이번에는 민족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더군요.”

“남한의 국민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북한의 동포들보다 더 풍요로워서는 안 된다. 같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몹시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체제의 우열을 떠나서 같이 넉넉하게 살고 싶은 염원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삶을 한가지의 잣대로만 가치를 매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북한 체제가 가지는 가치도 심오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만 옳다는 사고방식은 위험합니다. 저도 장관님의 말씀이 순수한 의도임을 이해합니다. 경제적인 풍요는 사실 매우 소중합니다. 그동안 국제적인 역학관계로 북조선이 풍요를 누릴 기회가 무척 제한되었었지요. 우리 인민들이 많은 고초를 겪은 것 저는 잘 압니다. 모두가 풍요롭기 위해서는 우선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도록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이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길을 만들다가 더우면 그늘에서 잠시 쉬고, 가시덤불이 나타나면 조금 지체되더라도 잘 치워서, 서두르지 말고 완전하고 넓은 길을 우리가 만들어서, 백년이 지난 뒤에는 한반도 전체에 풍요와 여유로움이 차고 넘칠 나라를 꼭 이룩합시다.”

“첫 만남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호상간에 많이 연락하고, 자주 만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실무진들이 자유롭고 창조적인 발상을 많이 하도록 돕고, 민족의 염원을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자 실무진 구성을 마치고, 다음 회동에는 모두 모여서 각 분야별로 심도 있는 해결 방안을 찾도록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더 많이 노력하고, 고민해서 이번 기회에 반드시 하나 되는 민족의 꿈을 이루어냅시다.”

두 사람이 꼭 부여잡은 손끝에 희망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