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는 옷장 문을 열었다. 여성스럽고 세련된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 옷들은 이제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낡았지만 편하게 입을 수 있었던 옛날 옷들이 그리웠다. 그것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녀는 바뀐 몸에 맞는 새 옷들을 장만한 후 옛날 옷들을 버릴 때의 그 환희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정말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독하게 마음 먹고 고구마와 사과 등으로 연명하여 얻은 7kg의 감량은, 기쁨에 눈이 먼 그녀가 잠시 허술해진 틈을 타 9kg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녀를 뒤엎어 버렸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늘씬해진 몸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새 옷을 입고 동료들의 놀라운 눈초리를 즐겼던 순간들이 너무도 달콤했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이 생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단 하나의 해결책은 역시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눈물을 머금고 다이어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운동을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운동과는 담쌓고 살아온 그간의 인생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사이버세상의 조언을 구해보기로 했다.

-         남의 얘기인줄만 알았던 요요가 제게도 찾아왔어요. 넘 우울하네여 ㅠ.ㅠ 이대로 살기엔 맘에 쏙 들었던 저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다시 다이어트를 하기엔 두려움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

epple: 현실을 받아들이세여 -_-

toyle: 다시 다이어트하는 수바께 엄써여. 홧팅 하세여!

badalove: 바둑 다이어트 완전 강추에여! 저도 거기서 했는데 요요도 없구여, 굶기만 하는 것도 아니에여. 님도 한번 가보세요!

로미엣: 난 아무리 먹어도 살 안찌던데ㅋ

forse: 힘내세요, 저도 그 심정 완전 이해ㅋ 꼭 극복하시길!

……………………

역시 다이어트는 모두에게 흥미로운 얘깃거리인 걸까? 그녀는 수없이 달린 댓글들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대부분의 말은 그녀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바둑 다이어트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궁금했다. 잠시 망설이다 검색해보니 꽤 그럴 듯한 홈페이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바둑 다이어트 입니다!

굶기만 하는 다이어트는 옛말, 균형 잡힌 식사로 건강미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렴한 가격! 체계적인 관리!

바다 센터를 방문하시면 친절한 상담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바둑 다이어트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그녀가 아는 바둑이라면 나무로 된 판 위에 검은 돌과 흰 돌을 올려놓는 게임이다. 그런데 게임으로 어떻게 다이어트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굶지 않는 체계적인 관리라는 말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한번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꽤나 절박한 심정이었던 그녀는 센터의 주소와 연락처를 메모하고 있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약간 남쪽으로 벗어난 곳에 위치한 바다 센터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진 멋스러운 건물이었다. 깊은 바다같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외벽과 물결치는 듯한 라인이 만나 마치 건물전체가 생생한 파도인 듯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곳이라면 자주 드나들어도 싫증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여직원이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저, 오늘 처음 왔는데요, 상담을 받고 싶어서요.”

“중앙 계단으로 한 층만 올라가시면 됩니다.”

하늘색 유니폼과 짙은 화장이 잘 어울리는 여직원이 넓은 홀을 가리키며 말했다. 1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홀은 칸막이 하나 없이 탁 트인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과 특수 유리가 만들어내는 푸르른 햇빛이 시원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곳곳에 간이 카페, 과일 가게, 스낵바 박스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깔끔한 푸른 빛을 자랑하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여유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있었는데, 그 곳이 안내원이 말한 중앙 계단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다이어트뿐 아니라 친구와 수다를 떨러 와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은 기다란 소파와 테이블을 갖춘 라운지와 독립된 개인 사무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슷비슷한 사무실들이 미로같이 복잡한 패턴으로 배치되어 있어 길을 잃기 딱 좋은 구조였지만 다행히 각 사무실마다 큼지막한 고유 번호를 갖고 있어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곳 저곳을 방황하던 수지는 상담실이라는 커다란 문패를 가진 사무실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정장을 갖춰 입은 한 여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수지는 여자의 육감으로 그녀가 40대쯤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늘씬한 몸매와 빛나는 피부는 20대인 그녀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처음 방문하셨죠?”

“네. 홈페이지에서 보고 찾아왔어요.”

수지가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편하게 앉으세요.”

상담실 여성이 수지에게 의자를 권해주고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앉았다.

“네.”

“특별히 궁금하신 점이 있으세요?”

“아니요,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요.”

“네. 우선 등록을 하시면 개인 관리 선생님을 배정받게 되세요. 그리고 체성분 검사를 진행하신 후에 앞으로의 계획을 같이 짜실 거에요. 평소에 드시는 음식이나 생활 습관을 분석해서 문제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구요. 그리고 그 계획을 토대로 대국을 시작하시는 겁니다.”

“네?”

“다이어트를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바둑의 보급을 위해 설립되었거든요. 그래서 저희 프로그램은 많은 경우에 바둑 용어를 사용해요. 그리고 관리를 받으시는 분들은 저희 센터의 바둑 수업을 30% 할인된 가격에 들으실 수 있습니다. 1층 홀의 테이블 밑에는 바둑판 세트가 항상 구비되어 있어 편하게 이용하실 수 있고요.”

“전 별로 바둑을 배우고 싶지 않은데, 괜찮을까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저…비용은……?”

“모든 비용은 후불입니다. 개인 관리사가 정해준 기간 안에 목표한 감량에 성공하시면 대국에 승리한 것으로 인정되어 돈을 내지 않으셔도 되요. 하지만 대국에서 지실 경우 20만원의 관리비용이 부과됩니다. 하지만 재대국을 신청하시면 10만원만 내시고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실 수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그 동안 받은 관리가 전부 무료란 말씀이세요?”

“그렇죠. 그리고 대국이 진행되는 동안 특별히 부과되는 요금도 없을 거에요.”

20만원의 관리비용은 결코 큰 액수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이어트에 성공할 경우 무료라니,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론 의심스러운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큰 센터에 수많은 관리사들까지 있다면 분명 그에 걸맞은 수입이 필요할 것이다. 혹시 불가능한 목표를 정해줘 돈을 내게끔 만드는 것은 아닐까?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분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되나요?”

“지난 달 데이터에 의하면 38% 가량의 고객님께서 대국에 승리하셨어요. 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고객님께서 승리하시도록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중에 있죠.”

“네……”

10명 중 3~4명 이라면 그녀도 자신 있었다. 바둑을 모른다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이 분이 괜찮다고 하지 않은가. 사실 처음 센터를 본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은 거의 기울어져 있었다.

“저, 바로 등록할게요.”

수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여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선생님이 좋으시겠죠?”

“네. 그렇게 해주세요.”

아무래도 남자와 숨겨진 체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쑥스러울 것 같았다.

“27번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지금 바로 예약 잡아드릴게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선생님과 직접 약속을 잡으시는 거에요.”

자신의 임무를 다한 그녀가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지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상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27번 문을 열며 수지가 말했다.

“어서 오세요. 박수지씨 맞으시죠?”

이번에는 수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그녀를 맞이했다.

“네.”

“제 이름은 한지혜에요, 앞으로 수지씨를 도와 프로그램을 진행할 거에요.”

“네. 잘 부탁 드릴게요.”

“우선 체성분 검사부터 할까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를 따라가니 사무실 한쪽 구석에 최첨단 체중계처럼 생긴 큼지막한 기계가 있었다. 수지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 기계 위에 올라섰다. 생각만 해도 혐오스러운 숫자들이 눈앞에 나타나 그녀를 괴롭혔다. 잠시 후 책상 위의 우유 빛 프린터가 그녀의 몸을 수치화 시킨 질서 정연한 그래프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표를 보기 전에 몇 가지 기본 사항을 가르쳐 드릴게요. 일단 이거 하나 받으시구요.”

한지혜라고 자신을 소개한 관리사가 스테이플러로 고정된 몇 장의 A4용지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뭐에요?”

“잘 읽어보시면 어려운 내용은 없을 거에요. 거기 처음 페이지 아래쪽에 착수금지 부분 읽어보시겠어요?”

“착수금지: 빵, 피자, 스파게티 등 밀가루 음식. 기름에 튀긴 음식. 술, 커피, 탄산음료.”

“착수금지가 무슨 뜻인지 대충 아시겠죠?”

“행마: 3층 행마 센터에서 처방 받을 것. 이건 무슨 뜻이에요?”

“앉아있는 자세, 걸음걸이 등 일상생활에서 숙지하셔야 할 내용이에요. 3층에 가면 행마는 물론 맥도 처방 받으실 수 있어요.”

“맥이요?”

“셋째 페이지에 보시면 나와요.”

“맥: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운동 및 스트레칭. 그렇구나……”

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궁금한 거 없으세요?”

“주의사항 (포석): 식사시간을 맞출 것, 정해진 양만 먹을 것, 식단에 항상 신경 쓸 것. 여기서 처음 두 개는 알겠는데, 식단은 어떻게 신경 써야 하죠? 그리고 괄호 안의 포석은 무슨 의미에요?”

“식단은 이제 저와 표를 보면서 상의 할 거에요. 그리고 포석은 처음 대국을 시작하고 2주간을 의미해요.”

“네……”

“가장 중요한 건, 제게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거에요. 수지씨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제게 말해주고 같이 수습할 길을 찾아야 해요. 약속할 수 있죠?”

“네.”

“그럼 우선 수지씨의 식습관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볼까요?”

수지는 회식자리에서 과음 하던 일과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일을 떠올리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