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을 타고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만나.. 대뜸 다가가 ‘프로기사 이름 셋을 대봐라!’ 라고 한다면.. 아마도 망설임없이.. ‘조훈현! 이창호! 그리고.. 유창혁!’ 이라고 외치지 않을까?

유창혁 사범님과의 첫 만남은 사석이었다.. 99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이건 나중에.. ^^

두 번째 만남은.. 올해 6월 계시원 면접을 보기 위해 들어간 한국기원 1층에서였다. 한국기원 1층 현관에서 (경비아저씨를 빼면) 만난 첫 번째 사람.. 그리고 한국기원에서 만난 첫 번째 프로기사.. 한국기원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나눠본 사범님.. ‘첫’ 자를 붙이자면 끝이 없다.

누구에게나 ‘첫’기억은 오래 남는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설레고, 처음 운전대를 잡던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께를 움츠리게 되니까..

그렇게 만난 유창혁 사범님.. 그 인연 덕분인지.. 나중에 또 '첫'자를 붙일 일이 생겼다.. (무슨 일이냐구요? 아래 읽다보면 알게됩니다^^)

계시를 해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계시원 면접이 정말 떨리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조심조심 한국기원 1층의 바둑TV스튜디오로 들어가는데, 유창혁 사범님이 그 앞에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계셨다. 한 눈에 알아봤다. ‘앗! 유창혁 사범님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순간 내 머릿속엔..


여기서 잠깐!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분들게 질문~!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완소(완전소중) 사범님이 지나가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꺼 같으세요? 어떤 행동을 하고 싶으세요?

은하(프바사&아바사 닉네임:은빛하늘을 줄여서 '은하'라고 부릅니다)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말걸고 싶어.. 말걸고 싶어.. 악수 해보고 싶어.. 악수 해보고 싶어...’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찼습니다. 그래서 통화중이신 사범님께.. ‘빨리 통화를 마치고 제쪽을 좀 쳐다봐주세요!!’란 텔레파시를 계속해서 보냈지요.. 아하하^^;;;

드디어 사범님의 통화가 끝났다.. 그러나 은하쪽은 보지 않고 바둑TV분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서는 사범님.. (좌절..)

‘안되! 이럴순없어!’ 라는 생각에..
계단을 올라가는 사범님을 쫓아가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사범님! 담에 만나게되면 꼭 악수 부탁드립니다! 저 사범님 팬이에요!"
그러자 사범님이 ‘네.. 감사합니다.’ 하시곤 계단을 마저 올라가셨다..

지금 생각하니 참 당돌하고, 창피하다..
그치만.. 후회보단.. 대화(라고 하기엔 좀 짧지만^^)를 해봤다는 뿌듯함(?)에 으쓱으쓱.. 덩실덩실.. ^^

2007년 7월 15일. KB바둑리그 지방투어. 청주.

첫 계시 대국은.. 유창혁 9단과 안달훈 8단.

아.. 이렇게 유창혁 사범님과 또 '처음'을 함께하는구나.. 으쓱으쓱..!

유창혁 사범님을 만나고 나서.. 면접도 잘 본데다.. 이번 첫 계시도 유창혁 사범님과 함께(?)하는지라..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범님은 이런건 꿈에도 모르시겠지만.. ^^)

화장실에 다녀와보니 사범님들이 벌써 앉아계셨다. 세판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오른쪽 편엔 조국수님이 앉아계셔서 더욱 긴장과 흥분이.. >.< (이 이야기는 앞에서 했었죠?)

"이거 뭡니까?" 제가 미리 준비해둔 녹차를 보고 유창혁 사범님이 물으셨다.. "녹차에요. 목마르실까봐 준비한거에요." 대답해놓고는 뿌듯.. ^-^

피디님의 싸인이 떨어지고..

"지금부터 대국을 시작하겠습니다." 멘트를 하고..

양 선수와 계시원인 나. 동시에 인사하고.. 두 사범님은 돌을 잡고.. 나는 계시용 시계의 버튼을 꾸욱 눌렀다.

초반부터 안달훈 사범님은 신중하게 한수 한수 오래 시간을 들여가며 두셨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백 초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멘트를 하게 되었다. 반면 정말 빨리 두시는 유창혁 사범님.. 덕분에 정신 바짝 차리면서 시계의 버튼을 눌러댔다.

그 때문에 유창혁 사범님은 거의 초반이 끝나서야 초읽기를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동안 많이 헤깔렸다. 안사범님 차례에선 초시계를 보며 초읽기를.. 유사범님 차례에선 계시용 시계를 보며 10분이 지나갔는지 안지나갔는지를 수시로 살펴야 했기 때문에.. ㅜㅜ

그런데 오히려 중반부터는 유사범님이 먼저 초읽기 30초 3번중에 두 번을 쓰시곤, 계속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셨다. 반면 안사범님은 초읽기가 두 번 남아있었다..

그래서 유사범님 차례에선 "마지막 20초. 하나..둘.." 하고 멘트를.. 안사범님 차례에선 "20초. 하나..둘.." 해야하는 상황.. 정신 바짝차리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실수해서 행여라도 두 사범님의 승부에 영향을 미치면 안되니까.. 목소리도 거슬리거나 신경쓰이지 않으려고 조금은 굵게 내려고 노력.. 노력..

그런데!

잠깐 딴생각을 했다.. '바둑판이 만약 배라면.. 타이타닉처럼 발랑~ 뒤집어지겠다..' 라는 생각..

무슨말이냐면.. 거의 100수 정도까지 바둑판 한쪽 편에 바둑알이 몰리는 상황이어서.. (나를 기준으로.. 왼쪽은.. 화점에만 백돌 두개.. 오른쪽 변에서는 치열하게 돌들이 얽히고 있었기때문에.. )

그러자마자 실수가..!

안사범님 초읽기에서 그냥 ‘20초’라고 해야 하는데.. ‘마지막 20초’라고 한것..

말을 하자마자 실수를 깨닫고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불신의 눈빛으로 (째려)보는 안사범님과 눈이 마주쳤다. ‘히익!!’

그렇습니다.. 저.. 바짝! 쫄았습니다.. ㅜㅜ

그 와중에 얼른 카메라를 보니 두 대 모두 불이 꺼져있네..(다행이다)

얼른 정신을 차리곤 "죄송합니다. 셋, 넷.." 하며 카운트를 시작했다. (왜 ‘셋’부터 했냐구요? 실수해서 사과까지.. 2~3초정도가 흐른 것 같아서요.. 실수는 실수고 사과는 사과지만.. 어쨋든 계시는 공평해야 하니까.. ^^ㅋ)

다행히 이미 돌을 잡고 막 두려고 하셨던 안사범님은.. '넷'에서 바둑판위에 돌을 올려놓으셨다. '따악!' 돌놓는 소리가 여느때보다 크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참고로 제가 초를 세는 요령은요(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제가 만든 요령..) 초시계가 20:00초를 가리키면 ‘20초’하면서 카운트를 시작하는데.. ‘여덟’을 셀 때 초시계가 32초를 가리키도록 세요. 그게 양 선수 모두 같은 시간이 주어지도록 세는 방법인 것 같더라구요..

사실 초시계를 보며 계시를 하다보면 20:00초에 정확히 ‘20초’라는 멘트를 해야 하지만.. 20:10초.. 20:35초 등등.. 멘트를 시작할때마다 정확하게 20:00에 시작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러다보니 0.01초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가 생겨요..

그래서 조금 늦게(20:30초라던가.. 0.1초~1초의 오차..) ‘20초’ 멘트를 한 경우.. 카운트 속도를 약간 빠르게 해서.. 결국 중간 카운트인 여덟에 32초를 맞췄더니.. 어느정도 일관되게 카운트를 할 수 있더라구요..

실수를 해놓고는 대국 내내 불안했다. 내 실수로 안달훈 사범님이 뭔가 평정심이 흐트러진다거나.. 신경이 쓰여서.. 질까봐..

다행(유사범님 죄송합니다.. ㅜㅜ)스럽게도.. 안달훈 사범님의 승..

불계승이었는데.. 저는 ‘돌을 던진다’는 표현은 정말 반상위에 돌을 살짝 던지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제가 바둑을 알게되었던 초등학교 시절엔.. 종종 바둑을 두다가 만방으로 깨지고는 사석을 집어 바둑판위에 툭! 던지는 것으로 패배를 인정하곤 했으니까.. (나중에 그 이야길 사범님들께 했다가 망신만 당했지요 ㅋㅋ)

그래서 유사범님이 돌을 던지지 않으시길래 계속 진행되는 줄 알고.. 20초를 기다렸다가 카운트를 했더니.. 두 사범님이 동시에.. ‘그만’이라고 하시며 손바닥을 내미시기에.. 창피하면서도 그 모습은 재미있었습니다.

두분이 동시에 제쪽을 쳐다보며.. 선서 하는듯 손바닥을 내밀며 '그만..' ^^

그렇게 내 첫 계시대국이 끝났다. 대국장 밖을 나와서야 그 대국이 안달훈 사범님의 입대 전 마지막 대국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마지막 대국에 멋진 실수(?)를 안겨드린 셈이네.. 아.. 만회할 기회도 안주시고 군대에 가시다니.. ㅜㅜ (그래도 마지막 대국을 승리하시고 가시네요.. 그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진심으로.. 안사범님의 건강한 군생활을 기원합니다. ^^

아차... 유사범님과 악수를 또 못했다.. ㅜㅜ
대국 전엔.. 혹여나 정신통일에 지장있으실까봐 악수신청을 못하고..
대국 후엔.. 안타깝게 지셔서.. 왠지 모를 죄송함에 차마 악수를 신청할수가 없었다..

다음번에 뵙게 되면..
유사범님이 멋지게 승리하시고 대국장을 나오시자마자.. 꼬옥..!

'팬입니다! 악수 한번만 부탁드립니다!'라고 할꺼다. 화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