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루” 카페는 잠실운동장을 지나서 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석이 은숙을 그곳까지 불러낼 줄은 은숙도 미쳐 생강하지 못했다. 결혼생활이라는 것이 너무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던 그녀에게 바둑은 어찌 보면 스트레스를 푸는 계기가 된지도 몰랐다. 기철과의 대화는 은숙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기철도 바둑을 두다 알게 된 사이인 은숙에게 때론 연인처럼 때론 오빠처럼 그녀의 대화 상대가 기꺼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은숙은 남편인 민석에게 미안한 감정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민석이 퇴근시간에 맞추어 나오라고  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은숙은 마냥 기분이 들떠서 88올림픽 도로를 힘껏 밟았다.

  민석은 요즘 들어 은숙에게서 이상한 기분을 느끼던 차에 얼마 전 기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기철은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민석과는 바둑으로 라이벌관계에 있던 사이었으나 민석은 대학으로 진학하였고  기철은 전문기사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구생일조에 속해 있었으나 기철이 처절한 승부욕이 부족한 탓인지 매년 입단 일순위에 거론되면서도 정작 입단대회에서는 반타작의 성적을 내기를 삼년을 하더니 연구생에서 퇴출당하고는 그저 바둑이나 두면서 소일하는 그런 룸펜이 되었다는 소식을 동창들로부터 듣기는 하였으나 고등학교 이후로 기철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민석이 기철이 전화를 한 것에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였으나 한 편으로는 기철이 여자랑 같이 바둑을 두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 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여서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민석이 기철을 만나서 술 한 잔과 더불어 바둑이야기까지 하다 보니 요즘 기철이 바둑대회에서 자주 만나는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고 민석은 기철과 이야기를 주고 받다보니 웬지 자신의 아내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이내 아내는 바둑을 못 둔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그냥 기철이 만나는 여성이 도대체 어떤 여성인가 궁금해 하는 것으로 기철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날 기철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 민석은 예전처럼 바둑 TV를 시청하면서 KB리그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데 웬일인지 은숙도 그의 옆에서 바둑TV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전 같으면 드라마를 보겠다고 우기던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바둑TV를 보고 있자 민석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 뱉었다.

 “당신이 웬일이야. 바둑TV를 다보고......”

 “왜요? 나는 바둑TV보면 안된다고 헌법에라도 나와 있나요?”

  “아니, 그게 아니고 당신은 바둑이라면 싫어하잖아......”

  “참내, 사람은 세월이 가면 변하는 것  몰라요......”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당신이 바둑을 아는 것도 아니고......”

  “사람 무시하시네요. 당신이 맨 날 바둑판 끼고 사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도 있답니다.”

  “거참, 그래도 단수, 정도나 아는 수준이지 뭐........”

  은숙이 “강나루” 카페에 들어선 것은 오후 일곱 시 삼십분이 지나서였다. 민석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한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있던 민석이 손을 들며 일어섰다. 은숙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띠며 민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그녀의 눈에 민석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사람하나가 눈에 띠었다. (누굴까?) 은숙은 민석이 누군가 함께 하고 있던 사람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차림새로 보아 여자는 아니었다. 은숙은 민석에게로 다가가면서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자 그만 발걸음이 자석에 달라붙은 것처럼 멈추어졌다. 민석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기철이었다.

  “아니, 여보 빨리 오지 않고 뭘 해?!” 

  민석이 멈추어선 은숙에게 빨리 오라고 하였으나 은숙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는 괜시리 가슴이 쿵닥쿵닥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기철과는 바둑대회에서 만나 대국을 벌리기도 하였고 또 바둑을 핑계로 만나서 차도 함께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었으나 민석이 자기를 부른 자리에 왜? 기철이 앉아있단 말인가. 민석에게 마치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처럼 느껴져 얼굴이 화끈 거리고 오금이 저리면서 더 이상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고 뒷덜미에 진땀이 흘러 내렸다. 그 때였다. 기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기철이 그렇게 말하면서 은숙을 불렀다. (아니 제수씨라니 그럼 두 사람이 아는 사이란 말인가?) 은숙은 그제 서야 긴장이 풀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하, 이 사람 나 몰래 이 친구를 만나고 다녔다 이거지.......이거 불륜이야......”

  민석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말했다.

  “예끼, 이 사람아 아무려면 내가 제수씨랑 ...........”

  기철도 함께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은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럼풋이 눈치채었다.

  “제수씨, 아니 어디 사람이 없어 바둑도 지질이 못 두는 민석이 놈과 사시나요. 이제라도 무르세요.”

  “뭐라고, 이놈아 하지만 이젠 일수불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고선 둘은 또 박장대소를 하였다.

  민석이 아내가 바둑을 둘 줄 아는 것은 눈치 채고는 기철을 만나 기철이 바둑대회에서 자주 만나는 여성이 자신의 아내임을 알고는 셋이서 저녁을 먹자고 기철과 민석이 꾸민 짓이었음을 은숙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들로부터 듣고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은숙은 기철에게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기 시작하였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