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원 일기 - #17. 울산투어 번외편(2) - 최은실

생각해보니.. 한번도 내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내 일기의 주인공도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번외편(2)의 주인공은.. 나..

은빛하늘.. 최은실..

지금의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바둑리그에서도.. 계시원 일기 에서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껏 그걸 깨닫지를 못했었다.

지난 청주투어에서는..

당일 날 내려가 정신없이 계시하는 법을 배우고..

우루루 모여서 맛없는 당근볶음밥(!)을 허겁지겁 먹고는..

대국 시작과 함께.. 엄청난 긴장 속에서 연속 두 판 계시를 하고..

끝나자마자 차를 얻어 타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그런데.. 이번 울산투어.. 하루 일찍 내려가 겪은 모든 일상들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8월 12일 아침.

늦잠잘 새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분장실로 쓰이게 된 우리방.

어디 편히 앉아 있을 곳도 없는 애매한 상황 속에서..

나는.. 뭔가.. 답답하고 속상한.. 그런 이상한 느낌에..

아침식사를 거르고.. 방안 구석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조금 지나간.. 예전 기억 한 조각...

친구가 긴 연애 끝에 드디어 내년 봄에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양가 부모님이 반대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라서 더욱 기뻤다.

직장이 있지만..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결혼식을 정말 성대하게 치르고 싶다는 친구.

그 돈으로 저금해서 살림밑천 마련해야지~ 라는 은하의 말에..

결혼식만큼은 내가 주인공인데.. 정말 멋지게 할꺼라는 그녀의 대답.

그 말에 은하는.. “언젠 네가 주인공이 아니었니? 니 인생 주인공이 너지..” 라며 웃었다.

그리고 이달에 한번 보자고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이달 초의 일인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 대화가.. 문득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린시절의 기억..

엄마와 마트에 장을 보러 갈때마다 반복되었던 그런 일들...

이건 아빠가 좋아하는 반찬. 이건 은하 도시락 반찬꺼리. 이건 OO이가 먹을 간식...

카트 속에 식구들이 먹을 걸 잔득 채우고선.. 계산대로 향하던 엄마..

좌판의 백도를 힐끗 쳐다보신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백도..

백도 한 개를 집었다가는.. 비싼 가격표를 보고는 이내 내려놓으신다.

“왜애~ 나 백도 먹고 싶어요~”

은하의 투정에 그제서야 못 이기는 척 백도를 집어 카트에 싣는 엄마.

백도 몇 개 못 살만큼 어려운 살림도 아니었지만..

엄만 항상 식구들이 우선이었다.

아마도 엄마가 먹고 싶은 걸 아껴서.. 우리 먹을 껄 더 사시려고 했겠지..

그리고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나..

그날 저녁식사 후 먹은 백도는 맛있었다.

잴 큰 백도조각은 아빠꺼.. 그리고 이건 은하꺼.. 이건 동생 OO꺼.. 엄마는 멍 자욱이 살짝 있는 작은 조각을 집으신다.

“엄마.. 큰거드세요~”

“아냐.. 엄만 깡치(백도 씨가 있는 부분)도 있어..”

늘 식구들이 우선이었던 우리 엄마..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껏 엄마 인생의 주인공은 엄마였을까..?

엄마는.. 나처럼.. 이렇게 속상하진 않았을까..?

누구나 인생을 산다.

그렇지만..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 네가 주인공이 아니었니? 니 인생 주인공이 너지..” 라는 철없는 은하의 말에..

웃음으로 답했던 내 친구.. 그녀는 나보다 먼저..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걸까?

어쩌면 입술을 깨물며..

그냥 삼키기에도 너무나 쓴.. 그런 대답을 입에 물고 있지는 않았을까?

은하도 주인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주목 받고 관심 받고.. 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도 있었고..

좀 더 화려한 주인공을 꿈꾸며 고시 준비를 하고..

좀 더 주목받는 주인공을 꿈꾸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은하는 지금 조연이다.

인정하기 서글프지만.. 사실..  그렇게 서글퍼 할일도 아니다.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몇 명뿐..

대부분은 조연이 아니던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금 은하의 역할은..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분장실로 바뀐.. 사람들이 잔득 오가는 방안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얼른 샤워하고 꽃단장을 해야겠다고..

평소보다 조금은 억지스런 높은 톤으로 애써 밝게 말하고는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엄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주인공 자리를 기꺼이 내주고..

식구들을 위해.. 은하를 위해.. 살아왔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만 어떤 마음이었을까.. 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하늘에 별이 빛난다.

하늘 가득 밝은 별이 빛나면.. 은빛하늘이 된다.

은빛하늘을 만들고 싶었다.

은빛하늘 속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은하는 별이 아니다.

이번엔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샤워 물줄기를 맞으며 울고 있으려니..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은하는 별이 아니다.

아직 아닐 수도 있고.. 영영 아닐 수도 있다.

은하는 지금..  작은 반딧불이..다.

꽁지에 작은 빛을 매달고.. 있는 힘껏 빛을 내며 날개짓을 한다.

비록 날개는 작아 높이 날지 못하고..

꽁지의 빛은 너무 약해 별 처럼  밝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빛을 내는 그런 반딧불이..

은하는 그렇게 은빛하늘을 만든다.

은빛하늘 속에서 밝게 빛나는 별..

그리고..

조금은 아래지만.. 조금은 약하지만..

그 속에서 함께 빛을 내는 반딧불이..

샤워기를 잠그고 방긋 웃어본다.

거울 속의 부은 눈이 어색하다.

찬물로 세수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한다.

반딧불이 꽁지에 힘이 들어간다.

작은 날개를 파닥파닥.. 비행할 준비 완료.

그리고..

불이 반짝.

피에스 :

대국이 끝나고 행사장으로 내려갔다.

승리한 울산 디아채팀이 무대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울산 디아채팀의 고근태 사범님이 잔득 부은 얼굴로 행사장 밖에 서있다.

은하 : 왜 여기있어? 인터뷰안해? (언제부턴가 서로 말을 편하게 하고 있다.)

고사범님 : 승자만 한대~ 오늘 3:0 이라서 난 바둑 안뒀잖아. 이런게 어딨어! 다 함께 올라가던가~

은하 : 하하하..

고사범님 : 나 완전.. 오늘 들러리야.. ㅜㅜ

은하 : 그런게 어딨어~^^  오늘 주인공은 근태야.. (토닥토닥)

고사범님 : ... (입이 한발은 나와서 시무룩하다..)

“고근태 사범님~ 싸인 해주세요~”

어디선가 쪼로록~ 달려와 싸인을 해달라는 꼬마팬..

근태가 신이 나서 열심히 싸인을 한다..

이내 몰려드는 근태의 팬들..

은하 : 거봐.. 근태 완전 인기인인데? 주인공 파이팅~!!

은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런 근태를 흐뭇하게 지켜본다..

때로는 주인공이 되고.. 그리고 때로는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

오늘도 은하는 조금씩 인생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