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129, 후배

경남창원에서 올라오는 길이라는 후배는 거의 다 왔다며 1시에 양재역에서 만나기로 한다.

플랜트의 산업설비 전산부문을 맡는 L그룹에 평생을 바쳤는데 해병대 장교답게 역동적이면서도 예의바르다. 몇 해 전 퇴직하고 몇 차례 투자를 했다가 쓴맛만 보았단다.

세 점 접은 바둑은 오로3단인 그의 평소모습대로 워낙 힘이 좋아 계속 대마가 몰리며 고전을 하다 작은 실수를 비집고 대마를 잡아 끝난다. 점심으로 꼼장어와 소주 한 병을 나누어 한판에 한 점씩 고치기로 하였으나 자신이 없어 다시 세 점으로 시작한다.

K대 대표출신이라는 원장은 손님들과 바둑이론을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웬만한 곳은 문을 닫고 손님이 없기가 태반인데 양재는 워낙 목이 좋아서인지 손님이 가득하다. K대 출신 프로들과 아마 시니어 고수들도 많이 찾는다며 후배는 조혜연 프로가 K대에 입학한 것도 알고 있다.

방내기는 안 해 보았는지 그는 두 번째 판도 초반부터 협공으로 난전을 불사한다.

돈이 걸린 바둑이나 방내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최선이니 접바둑은 치석을 활용하며 실리를 쌓으며 기다리는 것이 정도일 텐데 실리를 먼저 내주고 세를 쌓으며 상대를 힘으로 대마사냥을 하는 것은 스타일에 맞고 즐거울지는 몰라도 승산은 떨어질 것이다. 더욱이 지면 많이 지게 되니 방내기에서는 좋은 손님이겠지.

즐기는 것으로만 그치면 화초바둑이고 반상의 쓴맛도 모른다면 동네바둑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겠지.

대형 전투 속에 몰리면서도 무리수를 짚어 불계로 두 번째 판을 마친다.

방내기를 하면 많이 잃을 스타일이군. 퇴직 후 여러 차례 손해를 보았다더니 세상을 반상처럼 너무 쉽게 보았나보다.

오래전 오로에 고교동호회를 만들 때 그의 도움이 너무나 컸었고 오래전 혜화동 봉사단 후원의 밤 모임에 어린 딸까지 데리고 와주던 그는 내게는 평생의 친구들보다도 값진 존재이다.

어렸던 딸은 분당의 외고에 재학 중이고 진학 후 봉사의 길을 걷고 싶단다. UN의 정식직원으로 처음 채용된 키르키즈스탄 선교사 따님의 이야기를 참고로 들려준다. 세계를 상대로 꿈을 펼칠 수 있는 젊은이들이 소중한 것이라고. 진학에 고심하는 청년들과 부모들에게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본다. 한국의사 면허증을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에서나 알아주지 러시아 의사면허증이 외국에선 더 인정받을 텐데 50불의 수업료로 의사가 되어 세계구호의 일을 할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한다. 후배는 말없이 듣고만 앉아있다. 진학 후 딸의 해외봉사활동에 조언을 구하여 당근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점심의 낮술 탓은 아니겠지만 두 번을 진 그는 세 번째는 조금 장기전 스타일로 바꿔 긴 바둑이 된다. 계가는 네 집 부족이다. 그렇지 이런 게 승부지.

이제 바둑인 으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야지 싶으면서도 주저하며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국제바둑아카데미를 만들어 신문에 난 후배나 이청선생의 칼럼 속 말씀 “저돌적인 정신이 대업을 이룰 때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에서 용기를 얻는다.

더욱이 내겐 저리 사랑스런 자랑스런 후배가 있지 않은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