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은 하루종일 잠을 잤다. 토요일인 전날도 하루 종일 잠을 잤는데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일요일인 오늘도 오후까지 자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직장생활이 오래되자 그에게 개운한 아침이라는 단어는 꿈같은 희망사항이었다. 임동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점차 사회는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더욱 높은 노동강도를 요구했고 요즘은 야근이 일상생활화 되었다. 업무에 간혹 여유가 생기면 또 다른 업무가 주어졌고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할수록 점점 더 바빠지기만 하는 생활이었다.

그런 그에게 생활의 활력을 주는 것이 있다면 유일한 취미인 화초 가꾸기였다. 제대로 된 취미는 아니지만 여기 저기서 얻어온 화초를 키웠다. 퇴근한 늦은 밤 또는 휴일 간혹 물을 주며 조금씩 자라는 화분을 보면 잃어버린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고가의 분재도 아니고 화려한 꽃이 피는 것도 아닐뿐만 아니라 요즘의 유행처럼 야생화를 키우는 것도 아니었다. 하나 같이 남들에게 자랑할 수 없는 볼품 없는 화분이었지만 유일한 낙이었다.어느 해는 시장에서 사온 딸기화분을 키우기도 했고 또 어느 해는 폐교에서 얻어 온 목화를 키우기도 했다. 제대로 키우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그러거럭 자라 때가 되면 꽃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다. 그런 모습이 임동에게는 기쁨이었다.

'몇 시간 뒤면 또 잠을 자야하고 일어나면 숨 쉴틈 없는 일상이 시작되겠지'
화분을 바라보다 상념에 빠진 임동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얼마전부터 열심히 등산을 다닌다는 친구였다. 그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작은 배낭을 맨 등산복 차림이었다. 방에서 작은 찻상을 마주하며 앉았다.

"친구, 요즘 등산에 취미를 붙였다더만 오늘도 산에 갔다오는 모양이군"

인사차 등산 이야기를 꺼내었더니, 그는 손사레치며 말을 잇는다.

"아닐세, 그건 말하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퍼트린 거짓말이야. 자네가 잘 알지 않나? 난 타고 나기를 근골이 약해 등산은 무리일쎄. 겨우 산책정도가 가장 알맞는 운동이지. 내가 취미를 붙인 것은 그냥 여행을 다니는 것이네. 바람도 쐬고 사진도 찍으면서 말이야. 그러다가 여행을 떠난 곳에 산이 있으면 겨우 산의 초입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것인데 그렇게 소문이 난 것이야"

임동의 생각에도 그랬다. 등산을 한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그에게 등산은 무리라 생각했다. 어릴때 부터 보통 체격이었지만 왠지 큰 병을 앓은 것도 아닌데 체력이 약했다.  늘 건강을 조심하며 술담배도 하지 않던 녀석이었고 이때까지 무슨 운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산을 생각보다 많이 올라가게 되었고 너무 피곤해서 쉬다보니 신기한 나무가 있어서 캐서 왔다는 이야기는 어색했다. 친구가 나무를 캐온 것에 대해 그대로 자라도록 놔두는 것이 좋았을텐데 쓸데없는 일을 했다며 임동이 책하는 말을 하자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네, 나와 오랜 기간 알고 지냈지만 어디 내가 나뭇잎 꺾는 것을 본적 있나?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더라고. 산을 평소보다 많이 올라간 탓에 지쳐 길가 바위에 앉아있는데 바위 뒤에서 묘한 향기가 나더라고. 내가 워낙 몸을 사리며 살아온 탓에 담배도 피지 않고 매연이 싫어 집도 시외에 얻어살고 있잖아. 그런 탓인지 후각이 남들보다 그나마 살아있어 냄새를 잘 맡지. 약하지만 은은한 향이 나더라고. 그래서 돌아보았더니 잎이 겨우 3-4장 난 작은 나무였는데 나뭇잎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었어. 신기하지 않나? 예전 연꽃밭에 간 적이 있었지. 한겨울이라 연꽃은 모두 지고 앙상한 줄기만 낙씨찌처럼 올라와 있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 연꽃 향기를 맡은거야. 그래서 이녀석도 나중에 꽃이 피면 굉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지고 온거야."

친구 임동에게 나중에 다시 산에 가서 볼 수도 있겠지만, 바쁘게 살다보면 꽃이 필때 올 수 있다는 장담도 못하겠고, 이 나무가 봄에 피는 꽃인지 가을에 피는 꽃인지도 알 수 없는데 언제 필 줄 알고 찾아간단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자 나중에 필 꽃이 너무 궁금하여 캐올 수밖에 없었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캐오면서도 전혀 죄책감이나 꺼림직함에 없었다고 했다. 당연히 캐올 사람이 캐왔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캐더라도 자연을 훼손했다는 느낌이 없듯이 임동의 친구 또한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캐오긴 했으나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화분 하나 키운 적이 없는데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었다. 크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나무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한 수 앞을 보지 못해 앞으로의 행동이 대책없음에 생각이 이르자 괜한 일을 했다는 늦은 후회와 타개에 대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올 무렵 임동이 화분을 관심있게 키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임동에게 나무를 맡기면 그나마 죽지 않고 자랄 것이고 또한 꽃이 피면 어떤 꽃이 핀 것인지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에 가지 않고 바로 임동의 집에 들려 나무를 맡긴 것이었다. 그는 배낭에서 신문지에 쌓인 나무를 내어 놓았고 그러고는 훌쩍 떠나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한참이 지났다. 일요일 눈을 뜨니 가족들은 모두 아직 잠에 푹 빠져있었다. 임동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났다. 예전과 비교하면 놀랄 일이었다. 늘 출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급히 일어나 허겁지급 집을 나섰고 지하철 안에서는 늘 졸기 일쑤였다. 그런데 부지 불식간에 그에게 피곤이 없어졌다. 주말뿐만 아니라 주중에도 늘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니 상쾌한 새벽을 맞이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일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그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다. 숙면을 취한 탓에 피곤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씩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늘 날이 밝아올 무렵이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해가 길어지자 점점더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피곤은 점점 줄어 없어졌고 점점 개운함과 상쾌함에 커졌다. 혹시, 친구가 준 나무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나무를 더욱 애지중지 키웠다.

창문을 열고 환기도 시키고 화분도 볼겸해서 베란다로 가니 친구가 가져다 준 나무에 꽃봉오리가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꽃봉오리는 임동을 기다리기나 한듯이 임동이 오자 말자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임동은 개화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고속으로 돌려보듯이 꽃이 급속히 피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분홍빛과 흰빛을 동시에 가진 연분홍색의 꽃이 피었다.

'두가지 색을 가지는 꽃이 가능할까?'

임동이 의문을 품는 순간에도 꽃은 계속 피어서 5잎의 소박한 크기의 꽃모양을 완성했다. 소박한 크기에 연한 꽃잎색에 비해서 향기가 아주 진했다. 꿀맛이 나는 향기였다. 임동의 친구가 궁금해했던 꽃이 핀 것이었다. 임동의 친구가 궁금해 했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이었다. 이백의 청평조사에서 당현종이 모란과 양귀비를 번갈아 보며 취해있듯이 임동도 꽃향기에 취해 나비가 되어 눈을 감고 꽃의 빛깔을 음미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란 새콤한 향기가 전해졌다. 꽃의 향기가 변한 것일까하고 눈을 떠보니 꽃은 이미 져버렸고 꽃이 있던 자리에는 손톱만한 열매가 맺혀있었다.

손톱만했던 열매는 5분도 안되서 애기 주먹만한 열매로 커졌다. 변화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노란 열매의 껍질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유리구슬처럼 안이 환히 다 보였다. 투명해진 열매안에 무엇이 있나 궁금해 하며 자세히 쳐다보는 순간 임동은 숨이 막히고 움직일 수없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작은 열매안에는 두명의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밝은 표정의 그들은 서로 하하하, 껄껄껄 호탕하게 소리내어 웃으며 바둑돌을 놓고 있었다. 놓을 때 마다의 울리는 열매안의 공간은 쩌렁쩌렁 울렸다. 거대한 종소리에 몸이 울리는 것처럼 열매를 울리던 소리는 다시 임동에게 전해져 임동의 몸을 울렸다. 바둑돌과 바둑판의 부딪히며 내는 쩌렁쩌렁한 소리는 청명한 소리로 바뀌었고 임동의 귀로 들어와서는 머리를 관통하고 몸을 관통하였다.

'소리가 몸을 타고 관통 하다니...'

임동은 갑자기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또 열매안에서 사람이 보이는 일을 당하고 또 소리가 피처럼 몸을 돌며 관통하자 모든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이 조금씩 떨리더니 갑자기 전신이 떨렸다. 몸을 돌던 청명한 소리의 기운은 배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점차 배 속에서 중심을 잡아가자 몸의 떨림도 멈추었다. 그리고 두 노인이 두는 바둑판의 형세를 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겼다. 두노인의 바둑이 얼마나 재미있게 전개되든지 임동이 이때까지 두어온 어떤 바둑보다 그리고 어떤 고수들의 바둑보다 흥미진지하고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바둑이 종반으로 다가갈 무렵 멀리서 '아빠~' 하는 소리가 임동의 귀에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볼록렌즈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세상이 어지러워 보였다.

다시 임동의 귀에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누구요?"
"..."

임동은 마땅히 자신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순간에 도대체 뭐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바둑구경꾼? 집주인?...' 겨우 임동의 머리에 몇 개의 단어가 떠오를때 노인은 임동을 부르는 딸에게 고개를 돌려보고는 황망히 두던 바둑판을 접고 일어섰다.

'친구, 오늘 바둑은 다음에 다시 두어야겠네'
'그러세'

두노인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고. 어쩔줄 몰라하는 임동은 점차 정신을 잃어갔다. 임동은 친구가 캐다준 나무를 보고 있다가 편재가 되어버렸고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