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영태 네가 밥을 굶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영태의 5촌 당숙이 쌀 두 말을 주었다. 

영태는 고향에서 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는 산모퉁이를 지나 들판 길을 걷고, 깊은 소가 내려다보이는 벼랑길을 지나고, 가파른 산길을 넘고, 바지를 걷어 올린 후에 찬 시냇물을 건너며 이십 오리 길을 숨차게 걸어왔다. 

이상하게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하얀 쌀밥을 먹을 생각에 온몸에 힘이 저절로 생겨났던 것이다.

영태는 고1때부터 고2때까지 버스통학을 하였다.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대씩 오는 편이었다. 

비포장도로를 버스는 늘 털털거리며 달렸다. 

모자가 계속 흘러내렸다. 입학하면서 어머니가 사준 모자는 무척 컸다. 

커지는 머리를 감안하여 졸업할 때까지 쓰라고 아주 큰 모자를 사 주신 것이었다. 

영태를 보면 화학 선생님이 늘 놀리셨다. 

“야, 너는 모자를 쓴 거냐 아니면 자루를 뒤집어 쓴 거냐?” 

그 때는 배급받은 밀가루로 삼시세끼 수제비를 해 먹었다. 

끓는 물에 그저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떼어 넣기만 하면 되는 수제비는 집안의 누구라도 쉽게 해 먹을 수 있었다. 

문제는 도시락이었다. 국물을 도시락에 담을 수는 없었다. 

수제비를 꼭 짜서 물기를 뺀 다음에 도시락에 담았다. 

수제비 도시락은 그래도 먹기가 좋은 편이었다. 

어머니가 꽁보리밥을 도시락에 싸 주실 때가 문제였다. 

많이 먹으라고 꾹꾹 눌러서 담은 보리밥은 무척 빡빡하였다. 

거기다가 반찬이라고는 장독에서 바로 퍼온 날된장뿐이었다. 

영태는 반에서 제일 늦게까지 점심을 먹었다. 

빡빡한 밥을 먹기가 고역이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다 먹고서 운동장으로 놀러나간 후에도 영태는 우물우물 밥을 씹고 있었다. 

그 때 옆자리의 짝꿍이 도움을 주었다.

 늘 도시락 반찬을 나누어주었다. 

그 친구도 하숙을 하는 처지인지라 도시락 반찬이 크게 좋을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장아찌와 콩 조림은 날된장보다는 훨씬 나았다.

고3 초기에 외할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들이 영태가 누군지 의아해하는 동안 한 영어선생님이 영태를 기억하였다. 

“아,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만 학생.” 

외할머니의 친 여동생이 영태의 학교가 있는 도시에 살고 있었다. 아주 부자였다. 

그 여동생의 아들이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참이었다. 

외할머니는 영태에게 가정교사로 입주할 것을 권유하셨다. 영태는 즉각 찬성하였다. 

마침 배가 고파서 기운이 아주 없을 때였다. 

연필을 쥔 손의 힘이 떨어져서 글씨를 쓰다가, 수학문제 계산을 하다가 자주 연필을 떨어뜨리는 형편이었다.

그 중1학생은 어릴 때 영태가 사는 외갓집에 영태와 같은 학년인 그의 누나와 함께 자주 놀러왔었다. 

그 둘이 시골에 놀러오면 영태는 반갑게 그 둘을 데리고 마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신기해하는 시골생활의 낭만을 즐겨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이 되었다. 

그날엔 어쩐지 누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얼굴을 찌푸리고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영태는 어떻게 하든지 그 여학생의 표정을 밝게 변화시켜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둘을 데리고 동네의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영태의 특기인 나무타기를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나무를 올라가며 흘끗 여학생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주 신기해하는 동생의 표정과는 크게 대조가 되었다. 

실망한 영태는 무언가 과감한 시도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내려오면서 나무 몸통이 아닌 나뭇가지 끝으로 내려오기를 시도했다. 

잘 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는 처음으로 감행하는 무모한 시도였다. 

나뭇가지를 잡고 죽 내려오면서 여학생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분명히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놀라고 감격한 표정으로 “어머, 어머.”하면서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그 표정을 보면서 영태가 느낀 뿌듯한 희열은 지금까지도 영태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그 여학생과의 아기자기한 기억은 초등하교 5학년 때가 끝이었다. 

6학년이 되어서 그 여학생이 친구들과 같이 시골에 왔을 때는 서로들 커진 몸집 때문인지 이상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어 둘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영태가 입주했을 당시 그 여학생은 바로 전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도시의 부잣집에서 생활하니 여러 가지가 좋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첫차를 기다리지 않아서 좋았고, 꽁보리밥에 목이 메면서 도시락을 먹지 않아서 좋았고, 늘 고깃국을 먹어서 좋았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TV를 보아서 좋았다. 

하루는 재미있는 연속극에 빠져있을 때였다. 

놀러온 그 집의 친척 아저씨가 넌지시 충고를 하였다. 

“학생, 고 3이 아닌가?”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영태는 자기의 주제를 알아차렸다. 그 뒤로는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바로 자기 방에 와서 공부에 매진하였다.

매일 고깃국을 먹어서 그런지 몸에 힘이 솟았다. 

이제 힘이 없어서 연필을 떨어뜨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성적도 학기 초에 비해 상당히 향상되었다. 

중1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는 본만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그 중1학생에게는 전문적인 과외 교사들이 따로 있었다. 

영태는 그 학생의 성적에 대하여 한 번도 걱정이나 압박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가정교사란 말은 그저 구색을 갖추는 말이었고, 실제로는 생활이 어려운 먼 친척 학생에게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여학생이 공부하던 방에 올라가 보았다. 

3층에 있는 그녀의 방은 학생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책과 가구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였다. 

그 방 한쪽에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앉은뱅이책상이 영태의 눈에 띠었다. 

나중에 그 책상은 영태의 시골 방안에 놓여있게 되었다. 

그 책상에 앉아서 영태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도로 확장으로 시골집이 철거되면서 그 책상은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었다.

남은 과자 두 개를 들고 영태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경비 아저씨가 비를 들고 청소 하고 있는 모습이 영태의 눈에 띠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영태의 가슴에 바로 싸하는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영태아내가 영태에게 눈짓을 보냈다. 

영태는 바로 이번에는 노란봉투를 경비 아저씨께 건넸다. 

과자 세 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