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기가 몰려와서 비몽사몽간에 화장실을 갔다가 창밖을 보니 날이 밝으려고 하는 새벽이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출근을 위해서 잠을 깨야겠다는 생각으로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 TV위에 놓은 시계를 보니 일요일이다. 가족들은 자면서도 일요일인 것을 아는지 주말의 단잠에 푹 빠져있었다. 도시를 내려다 보기위해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발밑 화분에서 야릇한 향기가 난다. 친구 녀석이 가져다준 나무에서 꽃봉오리가 생겼다.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주인을 알아보듯 꽃도 내가 온 것 안 듯이 꽃봉오리는 꽃잎을 활짝 열면서 연분홍색의 꽃이 되었는데 5잎의 소박한 크기지만 향기가 아주 진했다. 냄새에서 꿀맛이 느껴진다면 이상할까? 한 마리의 나비마냥 꽃향기에 취해서 눈을 감고 음미하고 있으니 꽃에서는 노란 새콤한 향기가 났다. 눈을 떠보니 꽃은 이미 지고 없었고 손톱만한 열매가 맺혀있었다. 손톱만한 열매는 이내 주먹만한 열매가 되었는데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자 열매의 껍질이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슬과 같이 되었다. 순간 숨이 막히고 정신을 잃었다

상쾌한 봄날 아침의 나무들은 푸르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신선한 아침의 공기와 햇살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연두색의 잎들이 반짝반짝 보석이 되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건물의 벽이며, 바닥이며, 가로수며 심지어 화장실의 눈높이까지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것은 동아리마다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입생인 나에게는 천일야화처럼 신기하고 재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신입생의 대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한 장 한 장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길 양편에서는 동아리마다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신입생 가두모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긴 머리칼은 샴푸광고의 연예인 머릿결처럼 부드럽게 다사로운 봄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원피스의 치맛자락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 광고처럼 하늘거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매력에 흠뻑 취해 나르시스가 된 나는 가입신청서를 다가오는 선배들에게, 그저 미소만 보내며 “저... 나중에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사양을 하며 거리를 지나쳤습니다. 오전 한번, 오후 한번 너무 많지 않게 며칠을 신입생 모집현장을 거닐며 살짝살짝 곁눈으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르시스의 최후가 외롭게 연못 옆에서 꽃이 되는 것도 모른 체 공주가 청혼하러온 이웃나라 왕자들을 줄 세워놓고 바라보듯이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난데없는 사건처럼 나에게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다음날 가입하러 그곳에 갔을 땐 이미 가두모집이 끝나버렸고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어울리지 않게 바람이 횡하니 불고 있었습니다. 장이 끝나고 상인들이 떠난 시장과 같은 서부영화에서 결투가 끝난 뒤와 같은 황량함만이 있을 뿐 이었습니다. 나의 아쉬움은 낙엽이 되어 바람에 데굴데굴 뒹굽니다. 신입생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도 못하며 지낼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모집기간을 몰랐던 것에 대해 자책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라고 했는데 그 분위에 정신을 잃은 탓이었습니다. 천하의 권력을 가진 진시황도 시간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돈 많은 재벌 총수도 시간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미모밖에 없는 나 역시 시간은 돌릴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상상도 못한 사건이라 순간 움찔했지만 수습하기위해서는 파티에서 돌아온 신데렐라처럼 잠시 억척스럽기로 했습니다. 직접 그동안 보아왔던 동아리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찾아가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내 이미지에 어울리는 짓은 아니지만 당당히 가입하러 왔노라고 말하기로 한 것입니다. 내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난 가두 모집때처럼 반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억척스럽기로 마음먹고 나니, 혹시 신데렐라도 죽자 살자 힘에 단내 나도록 집안일 끝내고 마차도 직접 만들어서 파티에 타고 간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아리가 모여서 있는 학생회관 앞에는 야외공연장이 있었습니다. 나의 청춘과 미모를 뽐낼 미래를 상상하며 무심히 주위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곳에는 한 떨기 홀로피어 있는 빨간 장미와 같이 도도한 한명의 꽃미남이 보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호호호' 의미를 밝히기를 거부하는 내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인생에서 자신의 남자를 만났을 때 머리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라고 표현했지만, 그냥 지나가는 바람소리처럼 애써 흘렸습니다.

그는 야외공연장의 무대가 잘 보이는 경사진 관객석 위쪽 끝에 앉아 일렉트릭기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연주하는 모습이 마치 객석의 환호를 들으면서 연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연극이 끝난 후의 느낌처럼 공연장에서 홀로  관객석에 앉아 그때를 되새기는 심정으로 연주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곡을 연주하고 있을까. 불후의 명곡 이글스의 “호텔캘리포니아”를 잔잔히 연주하고 있는 것 일까? 아니면 캐논변주곡을 조용히 연주하고 있는 것 일까? 표정을 보니 “오버 더 레인보우”를 연주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음악에는 눈외한인 나의 눈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귀에는 연주되는 일렉기타의 음을 듣기위해서 기타와 연결된 헤드폰을 모자 위에 눌러 쓰고 있었고 희고 긴 손가락은 음을 찾아 기타의 이곳저곳으로 마치 푸른하늘을 한 마리의 흰 학이  날듯 우아하게 손가락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태어났다면 고운 흰색 비단 옷을 입고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의 모습에 '기필코 그가 있는 동아리에 가입하고 말 것이다.' 피를 토하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의 연주에 누구보다 많은 환호와 응원을 보내고 그는 연주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보내주는 꽃다발을 마다하고 무대 뒤의 나에게로 와 살짝 안고는 깊은 키스를 해주는 것입니다. 아니면 건반을 연습해 그와 함께 시선을 마주치며 음을 주고 받으며 연주하는 모습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연주가 끝이 나면 같이 무대 앞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관객의  호응에 답례를 하고 나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상상이 상상속에서 현실이 된 지 오래였습니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