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월 1일(수요일) 쾌청

행사 시작 5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관광하는 날이다. 여행을 즐기지 않는 참가자들을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수요일 기전(Wednesday Hard-core Tournament)”을 제외한 모든 공식 기전은 오늘 하루 전면 휴전이다. 어린이들만 참가하는 청소년 기전도 예외 없이 휴무다.

주최 측에서 오늘의 관광 일정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다루었는지는 그 준비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처음 주최측에서 준비한 관광지는 모두 11개소. 행사 시작하는 날부터 11개소 관광지와  그 지역 특성을 간략하게 설명한 소개문을 나열하고, 각자 원하는 코스를 선택하도록 서명란을 만들어 놓았다. 관광비는 30불 공통. 4일 동안의 서명자를 집계한 결과 다음과 같이 4개의 관광 코스로 결정되었다.

1. 필라델피아 시내관광 (자유의 종, 독립기념관, 시내관광)

2. 볼티모어 시내 관광 (국립수족관, 볼티모어 내항, 시내관광)

3. 게티스버그 국립공원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곳, 링컨 대통령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이정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란 명 연설문이 발표된 곳)

4. 펜실베니아 허쉬/허쉬 테마공원 (초콜릿으로 유명한 Hershey의 본고장. 지금은 각종 놀이시설로 더 유명하다)

필자는 필라델피아 관광코스를 택했다. 미국 민주주의 역사를 알려면 필라델피아를 방문하라는 정치학 박사 친구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20여 차례 미국을 방문하였으나, 그렇게 가보고 싶던 이 역사의 도시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오전 6시 30분, 아침 산책을 생략한 채 식당으로 향했다. 황성규 옹과 권영국 씨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세 사람이 모두 달랐다. 권영국 씨는 게티스버그 국립공원 코스를 택한 반면, 황성규 옹은 수요일 기전에 참가 신청을 냈다고 한다.

수요일 기전이란, 수요일 하루 동안에 참가자 전원이 급수별로 4국을 두어 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다. 첫 국을 오전 8시 30분, 제2국 10시 30분, 제3국 1시 30분, 제4국 3시 30분에 두어 당일로 우승자를 가린다. 각 급수별로 총 호선이며, 7호반 공제가 있고, 대국시간은 각자 45분, 초읽기는 20초씩 5회가 허용된다. 국제 기전으로서는 말 그대로 하루 동안의 강행군(Hard-core)이다.

이미 예고된 대로 식당 입구에서 점심 대용으로 준비된 빵과 음료 및 후식이 든 봉투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다.

오전 8시 30분, 본관 앞. 몸체 긴 검은색 버스 2대가 대기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 타고 온 버스다. 요금 30불을 내고 탑승하자 곧 출발이다. 

◀사진설명: 비행장과 필라델피아 관광에 사용된 허리 긴 버스. 뒤편에 화장실이 달려 있다.

앞쪽 좌석은 일본인 중 노년 남녀 탑승객이 12명, 중간쪽 좌석은 서양인 7명과 필자,  뒤쪽 좌석엔 중국계가 8명. 합계 28명이다.
좌석의 위치 선정도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일본인들은 일찍 와서 전면과 옆면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앞 좌석을 차지하고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관조하는 반면, 중국인들은 뒷좌석에서 자기들끼리 잡담에 여념이 없다. 그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중간 좌석에까지 들려 시끄럽다.

일본인 2세 여자 안내원이 인원을 점검하고 둔탁한 일본식 영어발음으로 오늘의 일정을 설명했다. 목적지인 헌법 기념관(National Constitution Center)까지 주행시간은 1시간 40분, 목적지에 도착하면 각자 헤어져 관광을 하고 오후 3시 30분 그 장소에 다시 집합할 것과 필요한 지도 및 관광 정보는 근처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캠퍼스의 좁은 길을 빠져나와 야외 넓은 길에서 차창 밖으로 스치는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군데군데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빨간색 벽돌집들이 초록색 초원과 어울려 그대로 풍경화다.

10시 45분, 일차 목적지인 국립헌법기념관에 도착했다. 안내양의 추가안내를 기대했으나, 관광 안내소 있는 곳만 알려 주고는 자기 할일 다 했다는 듯이 제 갈길을 재촉한다. 안내원은 직업적인 안내원이 아닌 것 같다. 주최측에서 무보수로 간단한 안내를 부탁한 모양이다.

필라델피아 시내 관광코스는 대략 6가지를 꼽는다.

벤자민 프랭크린 기념관과 우주과학, 천문 기상학, 물리학, 전기 전자공학관 등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프랭크린 과학박물관. 수족관. 미니 관광버스로 시내 곳곳을 안내하는 트롤리 투어. 동물원. 헌법 기념관. 자연박물관 또는 해양박물관 등.

필자는 먼저 헌법기념관을 택했다.

직사각형 모양의 2층 구조로 된 이 대리석 건물은 웅장한 규모와 그 안에 비치된 내용물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필라델피아 중심부에 위치한 이 건물은 대지면적 약 15,000 평방미터, 건축비 미화 1억 3천 7백만 불이 투입되었으며, 이 건물이 완성되기까지의 우여곡절도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사진설명: 200 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헌법기념관. 연간 방문객이 100만 명에 이른다.

헌법기념관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헌법이 발효된 1789년보다 거의 100년의 시간이 지난 1886년 9월 18일, 필라델피아에 모인  13개 지역의 대표자 회에서였다.

그러나 필요성만 제기되었을 뿐, 구체적인 대안 없이 또 한 세기가 흘렀다.

1982년 당시 필라델피아 시장인 빌 그린(Bill Green )이 헌법 제정 200주년에 맞추어 “We the people 200”라고 명명된 사업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4년이 지난 1986년 드디어 “국립헌법기념관(The National Constitution Center)”이란 실체가 탄생하였으며, 1년 후 기념관 건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88년 헌법기념관을 합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법안(Constitution Heritage Act of 1988 )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으며, 1988년 9월 16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하였다.

그 당시 건립위원회는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다트모스 대학총장, 브라운 대학총장, 스탠포드 대학교수, 콜럼비아 대학교수, 버클리 대학교수, 상원의원이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인적 구성과는 달리 기념관의 설립 방향, 규모, 위치 선정, 예산 문제 등에 있어서 획일적인 의견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업은 오랜 시간 지지부진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에는 항상 해프닝과 히어로가 있다고 했던가?

1996년 12월 9일 그날도 기념관 건립위원회에서는 끝모를 예산문제로 지루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때 회의장에 예고없이 나타난 사람은 필라델피아 시장인 에드워드 지 렌들(Edward G. Rendel). 그 자리에서 그는 이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업인가, 어떠한 복안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건립 위원회의 새 위원장직 수락연설을 했다. 곧이어 그는 토셀라(Joseph M. Torsella)라는 32세밖에 안 된 젊은 기업가를 실무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해프닝이었다.

그후 이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2000년 9월 17일, 헌법 서명 213년 만에 빌 클린턴 (Bill Clinton) 대통령이 착공식에서 첫 삽을 뜨고, 독립 기념일인 2003년 7월 4일 성대한 개관식을 갖게 되었다. 개관식에서 미합중국 최초 여성 대법원 판사가 개막 연설을 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 기념관에는 매년 100만 명이 방문을 한다고 한다.

(8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