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 전체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골프장에서 수많은 사고가 있었지만, 이처럼 처참하지는 않았다. 캐디들 모두에게 이 일은 온전히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제 언니는 어떻게 될까.”

목숨을 건진다 해도 문제였다. 가해자가 병원 치료비를 부담해준다 하더라도 몸이 망가져 앞날이 막막할 것이 뻔했다. 회사에서도 위로금 몇 푼 내놓고 말 것이다. 캐디 일이 위험하고 고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부분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다. 고용된 신분이 아니어서 산재보험에 가입되지 않는 그들을 위해 ‘캐디보험’이 있지만, 그들은 가입을 꺼린다. 수입이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 필요하지 않다는 짧은 생각에, 정부로부터 받는 갖가지 혜택이 사라질까봐, 오래하지 않을 일이라서 등 이유는 몹시 다양하다.

잠들기 힘든 밤이어서인지 근처의 식당이 캐디들로 가득했다. 삼삼오오 둘러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지만 어떤 좌석에서도 웃음소리는 새어나오지 않았다.

현균도 연지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녁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한 그녀가 숙소에 들어가면 울기만 하고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녀 곁에 있을 겸, 조금이라도 음식을 먹게 해줄 겸. 직접 현장을 목격한 그녀는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아직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지자 그가 농담 삼아 한마디 건넸다.

“그 날 우리가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그의 농담 같은 말에 그녀의 눈에 초점이 잠시 모였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시선은 풀어졌다.

“내 생각에는 한 것이 맞아.”

그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그녀는 한동안 그를 피했다. 아무리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첫 경험이 주는 충격은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시트를 물들인 빨간 색의 자국!

‘내가 이 사람과 첫 번째 섹스를 했구나.’

그녀는 생각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곁에 있어주며 정성을 보였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는 아리송했었다. 딱 한번, 단 한차례 그의 성기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입이 잠시 달싹인 듯 했다.

“네 생각에는 어때?”

자꾸만 물어오는 그의 마음을 잘 아는 그녀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우리 한 거 맞아. 그게 너여서 나는 고맙고 행복했었어.’

그녀는 말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길은 고맙다고, 잠시지만 서로를 함께 소유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가득 차 있던 고통이 그 날의 기억으로 조금 채워지며 숨 쉴 여백을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식탁위의 찌개가 식어가는 것도 잊었다.

“내가 또 김회장님 팀을 맡게 된 거야?”

김회장이 회장님의 지인임을 잘 아는 그녀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너스레를 떨었다. 회장님이 동반하지 않는 팀이라 다른 캐디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런 우연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신경 쓰지 마. 순서가 그렇게 걸린 것뿐이잖아.”

옆에 있던 마스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지난번 캐디 사고 때 고생을 많이 한 마스터는 아직도 얼굴이 핼쑥해졌다. 사고가 있던 날 그녀의 대응과 처리는 완벽했다.

“그 날 마스터 언니가 정말 힘들었을 거야. 역시 마스터는 마스터더라.”

캐디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다친 캐디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꾸준하게 찾았다. 골프장 전 임직원과 캐디, 용역사까지 참여하게 하는 모금운동을 벌여 병상에 있던 캐디가 감동으로 울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마스터님.”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울며 눈으로만 감사의 뜻을 보내는 딸을 대신해 그녀의 어머니가 마스터의 손을 부여잡고 한 말이었다.

정애는 마스터 덕분에 마음 홀가분하게 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팀은 회장님 팀과 다름없이 최선을 다해야 돼.”

그녀가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던 마스터가 조언을 하며 일행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정말이네. 멤버가 장난 아니다. 차관이면 고위급 공무원 아니야? 차관 둘에 회장 두 명이 이라니. 나 쫄려서 일 제대로 못할 거 같네.”

“어이구 능청은. 수고해!”

마스터가 눈을 흘기며 자리를 떴다.

정애는 꼼꼼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늘 준비하던 여분의 볼을 최고급 공으로 바꿔 실었고, 저렴한 나무 티 대신 고습 플라스틱 티를 실었다. 볼 타올도 새것으로 바꾸고 카트도 구석구석 세심하게 닦았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저는 오늘 고객님들의 라운딩을 도와드릴 캐디 정애입니다. 이름이 외자인 것이 좀 남다르죠. 즐겁고 건강한 라운딩을 위해 몸의 긴장을 풀어줄 스트레칭 체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애써 ‘솔’톤으로 인사를 시작했다.

“정애씨는 언제나 활기차고 명랑해보여. 오늘도 잘 부탁해요.”

김회장이 아는 체를 해줘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오늘 차관님 두 분을 모셨어. 이분들이 이 골프장에서는 처음 운동하시는 거니까 신경을 더 많이 써줘요.”

김회장은 웃으며 그녀에게 팁을 건네줬다.

“회장님 너무 후하게 주셨어요. 고맙습니다.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후한 팁에 그녀는 오히려 부담이 커졌다.

‘회장님이 무척 잘 보여야 하는 공무원들이구나. 실수 없이 잘 해내자.’

그녀는 최선을 다해 멘트를 하고 라이를 보고 골프장 각 홀의 특징과 장점을 설명하며 경기를 진행해나갔다. 주로 대화와 농담은 두 분 회장님들이 하였고 공무원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라운딩의 분위기를 높이려 애를 썼다.

“이 홀은 파3홀입니다. 제가 돌발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니어’ 내기를 걸어요. 상품은 무엇으로 할까요.”

파3홀의 티잉그라운드에서 한 번에 공을 홀컵에 가장 가까이 붙이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녀의 제안에 김회장이 화답했다.

“이긴 사람이 원하는 거 들어주기로 하십시다. 그게 뭐든 상관없이!”

두 회장님은 공무원들에게 청탁할 일이 각각 있었다. 반면 두 차관들은 그다지 필요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이곳에 왔다는 것은 웬만한 청탁은 들어 줄 생각을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회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그들이었기에 내기에는 자신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홀은 제가 톱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김차관이 과장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라운딩 분위기가 살아났다는 마음에 정애도 한껏 고무되었다.

“저들 포함한 다섯 명이 약속을 한 것입니다. 네 분 고객님, 파이팅!”

“승자는 김차관님이십니다. 홀컵 10cm 니어는 제가 처음 보네요. 대단하십니다. 홀인원 나오는 줄 알았어요. 런이 조금만 길었어도! 아쉽지만 축하드립니다.”

“내가 15cm를 붙였을 때 나는 ‘내가 먹었다’ 생각했는데, 차관님이 한 술을 더 뜨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우리 네 사람이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한꺼번에 버디가 두개나 나오자 홀 아웃을 하는 카트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분위기를 살리려는 그녀의 의도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제가 별로 필요한 것이 생각이 안 나네요. 우리 다섯이 저녁식사나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그의 말에 그녀는 ‘아이쿠’ 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저녁 식사에 참석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차관님이 너무 약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2차는 책임지겠습니다.”

김회장이 접대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한 술 더 뜨며 나섰다.

‘이거 큰일이네. 꼼짝없이 2차까지 가게 생겼어.’

그녀의 속마음을 알 길 없는 네 사람 좋아라하며 박수를 치자 그녀도 하는 수 없었다.

“우리 고객님들 화끈하고 멋지십니다.”

김회장은 조카뻘인 김차관에게 미리 말을 해 두었었다.

“조카님, 제가 이번 라운딩에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 두었습니다.”